29화 이렇게 안기고 싶었나
말 등 위에 앉아 보니 생각보다 높았다. 좀… 어지러운 것도 같고. 이 와중에 말까지 소란스
럽게 이리저리 움직이니 더 핑핑 돌았다.
황제는 이미 말 위에 앉아 달릴 준비를 마쳤는데 벨리타는 뭐 하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갈
색 말이 마치 낯선 사람을 태운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구는 것도 이상했고.
말 위에 앉은 벨리타의 상태도 가히 좋지 않아 보였다.
재빨리 시종장이 다가가 말을 진정시키고 얼른 황후를 말에서 내리게 했다.
“안 달릴 거요?”
말 위에 올라갔다 내려온 것뿐인데 벨리타는 이미 멀리 달려갔다 온 것처럼 속이 울렁거
렸다.
“달리…고 싶은데…….”
말을 못 타요. 혼자서는.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냥 두 발로 걷기나 할 걸 그랬나 후
회가 되었다.
따각따각.
그가 흑마를 타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타고는 싶은 거요?”
소원이었던 벨리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앗!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그녀가 말 위에 있었다. 정확히는 말 등 위 칼리크 앞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 올렸던 것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그러든가 얼마나
놀랐는지.
“엄마야.”
갑자기 달려 나가는 흑마 때문에 벨리타는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그의 허리를 잡고 안길
수밖에 없었다.
빠르긴 얼마나 빠른지, 주변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그냥 휙휙 지나가서 뭐가 뭔지, 어딜
달리고 있는지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사실 떨어질까 봐 무서워 죽어라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폭 묻고 있느라 더 주변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볼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속도감 하나만큼은 끝내줬다. 어지러울
정도로 빨랐다. 공기를 가르며 달린다는 게 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그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 태풍같이 스치는 바람을 즐길 수 있었
다. 점점 그에게서 몸이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보다 그렇게 무섭지도 않았다. 이 정도로 달
리려면 얼마나 연습을 해야 할까?
앗.
그의 손이 어깨를 감싸더니 자신 쪽으로 그녀를 당겨 안았다. 다시 그의 가슴에 폭 안기게
된 벨리타는 살짝 입술을 삐죽거렸다.
뭘 이렇게 세게 끌어안는 거람.
걸핏하면 끌어당기고 안고… 키…스도 너무 오래 하고.
이렇다는 건 적어도 죽일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싫어했겠지만 지금은 좀 달라
진 건 알겠다. 그러니 자꾸 매일 오라 하고 만나기만 하면 매번 어떻게 해서든 만지려 들
고, 게다가 첫날밤 언급까지.
다시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도 조금만 떨어지면 다시
끌어안고, 그러니 그의 가슴에 다시 얼굴이 닿고. 이런 자세는 또 처음이라 그의 가슴이 얼
마나 단단하고 넓은지 새삼 느껴진다.
또 그가 바짝 끌어안았다. 지금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벨리타는 그가 자꾸 이러
는 정확한 이유가 궁금해지긴 했다.
황제 칼리크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일부러 말을 못 타는 척을 하다니. 결국, 내 말 위에 같이 앉고 싶어서 그런 머리를 쓴 것
같은데 그렇다면 모른 척해 주지.
말을 잘 탈 줄 알면서 흑마가 달리자마자 놀란 척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남자 마음 들썩이게 하는 재주는 다 부린다.
이 정도는 속아 준다. 이런 식으로 여자를 안고 말을 타 본 적이 없어서 그는 낯선 느낌이
었다. 몇백 번 몇천 번은 달려 본 이 길이 다르게 느껴졌다. 더더군다나 다른 여자도 아닌
벨리타를 안고 말을 타 보다니. 매번 다른 걸 경험하게 해 주는 벨리타가 기특하기까지 했
다.
평상시보다는 덜 빠르게 달리고 있지만 벨리타의 몸이 조금 떨어지자 위험했다. 얼른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한 손으로 고삐를 모아 쥐고는 속도를 더 늦추었다. 흑
마도 두 사람을 태워 본 적 없어 적응되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러다 벨리타가 떨어지면 크게
다친다. 질주하는 건 혼자 탔을 때 하면 되지.
다시 가까워진 벨리타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이 귀엽기까지 했다. 그녀를
꼭 안고 말을 타는 것도 느낌이 괜찮았다. 키스할 때 안아 보긴 했어도 이렇게 제 가슴에
폭 안아 본 건 처음이었다. 턱 밑에 벨리타의 정수리가 닿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느껴졌
다. 이것 또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안기고 싶었나, 이걸 좋아해 이런 머리를 썼나 싶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뭐, 노력은 가상하다. 정을 쌓으려는 첫 단계치고는 괜찮았다. 다음엔 또 뭘 들고나올지 기
대가 되었다. 정을 쌓으려면 더 자주, 오래 만나야 하니까 그쪽으로 머리를 굴리겠지. 그게
수순일 것이다.
벨리타는 얼굴에 스치는 바람을 즐겼다. 왜 사람들이 스피드를 즐기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렇게 혼자 달린다면 얼마나 짜릿하고 통쾌할까, 생각만으로도 속이 뻥 뚫린다. 혼자서 말
을 멋지게 타면서 바람을 가르며 느끼는 그 쾌감.
해 보고 싶다.
다시 돌아와 말에서 내리면서 벨리타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칼리크.”
즐거웠냐고 물어보려던 황제는 벨리타가 먼저 말을 꺼내자 가만히 있었다. 저렇게 자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건 처음이다.
“말 타는 걸 배우고 싶어요.”
원래 잘 타지 않소?
그래도 그리 묻지 않고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야겠다.
“그렇게 하시오.”
그럼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할 텐데. 믿을 만한 사람이 좋겠다.
칼리크는 주변을 둘러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안톤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살짝
고개를 젓는다. 황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안톤이 저렇게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충성 하나만 아는 안톤이다. 얼마나
벨리타가 싫으면 황제한테 감히 고개를 저을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준다. 안톤이니까.
그동안 보여 준 충성심 하나만으로도 이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다.
다시 벨리타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뭔가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입을 쫑긋 오므리고
눈동자를 이쪽저쪽 움직이며 뭔가를 고민했다. 저렇게 생각하면 뭐가 나오나 싶었지만 황
제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벨리타는 칼리크가 그렇게 하라고 말했으니 그가 직접 가르쳐 준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그
래서 마음먹은 김에 오늘부터 당장 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는 바쁜 몸이라 오늘은 무리
라는 생각을 했다.
“칼리크. 그럼 내일부터 가르쳐 줄 수 있나요? 혹 내일도 바쁜가요?”
하하하.
벨리타가 제 웃음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궁금해했다. 자신이 왜 웃었는지 모르는 모양
이었다.
벨리타.
내가 웃은 이유는.
방금 한 내 생각이 맞아서 그런 거다.
예측한 대로 움직여 줘서, 이제야 손바닥 보듯이 벨리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예전
처럼 수월하게 읽혀서 웃은 거다. 지금까지는 벨리타의 머릿속이 읽히지 않아 은근 갑갑했
는데 이젠 다시 돌아갔다.
그래야지. 어디 내 손바닥에서 벗어나.
“약속한 대로 하고 있지만 매일 만나서 당신한테 말 타는 걸 배우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매일 오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한 약속 때문에 이렇게 만나고는 있지만 늘상 하는 것이 똑
같아 지루했던 건 사실이다. 이렇게 뭔가 새로운 걸 배운다면 자신에게 더 알찬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칼리크는 들떠 있는 벨리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약속이라 했다. 다른 남자와 단둘이 있지 않겠다는 그 약속을 말하나 본데.
벨리타는 다른 사람에게, 즉 다른 남자에게 배운다는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남자란 자신뿐인 것이다.
“그래서 나한테 배우겠다?”
그렇게 그 약속을 지키겠다?
하긴 지금 관심 대상은 자신이니 지킬 수도 있겠다. 지금까진 몰랐는데 이제 보니 벨리타
는 관심 대상이 생기면 한 사람한테만 몰두하는 모양이다. 그게 오래가지 않았겠지만. 금
방 싫증 내는 성향이라 들었는데.
낯선 남자, 새로운 남자를 더 선호한 벨리타다. 그러니 수시로 상대들을 바꿔 가며 놀아났
고 스스로 황후 위치를 떨어뜨렸다.
그런 벨리타가 정말로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작정을 한 게 틀림없다. 자기가 한 말을 지키
는 사람을 황제가 신임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언제 직접 가르쳐 준다 말했
나, 그만한 시간이 날 리가 없는데 벨리타가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 또한 왜 그러는지 다 읽
혔다.
“그럼 누구한테 배워요?”
벨리타는 칼리크가 저리 물으니 당황스러웠다. 그가 직접 해 준다는 말이 아니었나, 자신
이 뭘 착각했나 싶어 두 눈만 깜빡거렸다.
그럼 내일부터 당장 말 연습을 할 수 없는 건가?
지금 그녀에게는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걸 원한다면 그러지. 점심 식사 후 가르쳐 주겠소.”
또 저런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을 반짝이며 좋아한다. 제 뜻대로 자신이 움직여
줬으니 좋아하고 있는 거다. 말 타는 걸 배울 수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잘 탈 수 있는
말을 갑자기 못 탄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이러는 건 단 하나.
나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 거겠지.
칼리크는 그녀의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칼리크는 황실 온천탕에서 굳은 몸을 풀고 있었다.
며칠 동안 벨리타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며 제일 많이 안아 보았다. 정확히는 안겨 온
거지만. 이럴 줄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응해 줬다.
누가 보면 정말로 처음 말을 타는 것처럼 연기도 일품이었다. 벨리타를 말에 올려 주고 고
삐를 지상에서 그가 잡고는 걷는 연습부터 시켰다.
그러나 몇 발짝 움직일 때마다 균형을 못 잡고 떨어지려 해서 미끄러지려는 그녀를 얼른
안아 줘야 했다. 가만히만 앉아 있으면 되는데 그거 하나 못 하다니, 더더군다나 결혼식 때
펠론국 사람들과 우아하게 말을 타고 황궁으로 들어온 그녀다. 이렇게 해서라도 안기고 싶
다면야 얼마든지 맞춰 줄 수 있다.노력이 가상하다.
이제는 겨우 떨어질 염려 없이 한 바퀴 정도 경보로 말을 탈 수는 있게 되었다. 이렇게 더
디게 배우는 사람도 처음이다. 물론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고 있지만. 빨리 배우면 그만큼
자신과의 만남이 금방 끝나니까 연장하려고 이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