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애간장 녹이려는 작전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 절대 첫날밤은 무리다. 4년 동안 원래 벨리타하고는 만나지도 않
아 놓고 지금은 왜 이리 서두르는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이 몸이 탐이 나나? 갑자기 무지
기분이 나빠졌다. 어쨌건 시간을 벌자. 도망칠 시간을.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역시. 유혹하다가 이렇게 슬쩍 한발 물러나고.
사람 애간장 녹이려는 작전을 구사하고 있나 본데.
황제는 벨리타가 이 방면으로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
을 애가 타게 만들고 있으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 하지 않았나?”
내가 내 발등 찍었다. 그건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지. 그 말을 붙들고 의기양
양 흔드는 황제가 점점 얄미워졌다.
그래도 이건 무리다. 아무리 시키는 대로 한다고 말했어도. 절대 안 된다.
“그래도 좀 더 정을 쌓은 다음에… 첫…날밤을…….”
듣기만 해도 겁나는 그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눈빛을 보면
지금 당장 덤벼들 기세다.
“무슨 정? 이만하면 됐지. 우린 결혼한 지 4년 되었다는 걸 또 말해야 알아듣나?”
첫날밤에 목숨 건 사람처럼 왜 이렇게 구는지 벨리타는 황제 앞에서 붉어진 얼굴로 난감
해했다.
“제가 아직 몸이….”
이러는 게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것처럼 보였지만, 할 수 없다. 아무 핑계를 다 대서라
도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다.
“그럼 완전히 다 나으면 하도록 하지.”
미치겠다. 돌겠다.
황제가 꽤나 생각해 주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무슨 물건 흥정
하는 것도 아니고 뭘 이런 식으로 날을 잡나. 게다가 원래 벨리타와는 달리 숙맥인 자신은
키스 하나도 벅차 버벅거리고 있는데 그 어마어마하고 겁나는 첫날밤까지 강요받다니.
아무리 시킨 대로 다 한다 했어도 어디까지 시킬 작정인 거예요!
“아무리 4년이라 해도 그동안은 전혀 교류가 없었잖아요.”
그래. 이제 말이 제대로 나온다.
용기를 얻은 벨리타는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모면할 생각이었다.
“최근부터 우리가 만나기 시작했으니 조금 더 가까워진 다음에 거사를 치르는 것이 맞다
고 생각해요.”
조금 더? 그건 앞으로 더 유혹한다는 말인데.
이 정도만 되어도 황제는 첫날밤을 치를 수 있다 여겼지만 벨리타가 또 저렇게 나오니 좀
더 즐기며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든 저러든 그 끝은 첫날밤
일 테니.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꼭 자신이 안달이 나서 그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벨리
타에게 그런 인상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럼. 어떻게 가까워질 건지 지켜보지.”
벨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자신의 말대로 한다는 소리다.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
와 절대 굽히지 않을 것 같더니 제 말을 들어주어 의아하면서도 다행스러웠다. 안도의 한
숨이 절로 내쉬어졌다.
“내일까지 좀 더 쉬시오. 그다음 날 보도록 하지.”
그래도 아팠다고 좀 더 쉬라고 하네. 이왕 그럴 거 며칠 더 주지.
벨리타는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어 황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돌아가고 난 뒤 그녀는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내일까지는 푹 쉴 생각이었다. 그러
면서 가까워지는 방법으로 뭐가 좋을지 궁리해 볼 작정이었다. 아주아주 시간이 오래 걸리
는 것으로.
그러나 아직 나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살살 졸음이 밀려왔다. 황제도 열병에 걸렸다면
그 키스로 옮았다고 뭐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황제가 멀쩡하니 그런 타박도 할 수 없고…
여기까지 생각하다 벨리타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
씨X.
개새끼.
X 같은 새끼.
쿠로는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알고 있는 욕은 다 뱉으며, 펄펄 뛰며 분노했다.
큰일 났다.
황제에게 큰일이 났다며 염장을 질렀는데 정말 큰일이 난 건 자신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소문으로 들었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황제 자리가 위태로우니 거
짓으로 퍼트린 거라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을 것이다. 자신 아래로 더 찍어 누를 수 있는 기
회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확인했다. 그 순간 얼마나 놀랐으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비틀거리려
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겨우겨우 버텼다.
보아하니 저 황제는 눈을 껌뻑거리느라 모르는 것 같은데 자신이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하
면 바로 알아차릴 것 같아 기를 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얼른 가면을 썼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표정은 제어가 되었지만, 몸이 뻣뻣하게 굳는 건 어찌해
볼 방법이 없었다.
말 신수도 공포로 짓눌려 부리나케 자신 등 뒤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정신없이 인사도 하
는 둥 마는 둥 그 자리에서 자신도 도망쳤다.
얼마나 몸이 굳었는지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이 다 무너지게 생
겼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상태로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제 인생은 이제 끝났다. 신이 자신한테 이럴 수는 없다. 줬다 뺏는 것도 아니고.
“왜 저 칼리크 놈에게 신수가 발현된 건데!!!”
쿠로는 마차 안에서 악을 썼다. 분하고 원통함에 눈이 다 돌아갔다.
황제가 소리 질렀을 때 순간적으로 등 뒤에 신수가 확 나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황제의 신수라고 소문난 그 호랑이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호랑이.
얼마나 사납게 입을 크게 벌리던지, 자신은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제 말 신수는 그 호랑이의 콧바람에도 쓰러질 정도로 하잘것없었다. 황제의 신수가
발현되기만 한다면 자신의 신수는 보잘것없는 것이 된다. 비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그것도
성체도 아닌 망아지니 더.
그놈의 신수는 완전 성체였다. 그 크기가 압도당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컸고. 더 환장하
는 건 초기에는 신수 한번 발현시키려면 그렇게 용을 써야 하는데 그놈은 아무 힘도 들이
지 않고 그 신수가 쑤욱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신수가 스스로.
이건 초기 단계가 아니라는 소리다. 무슨 이유로 그놈이 아직도 신수를 발현시키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다. 제대로 그놈이 발현만 시키면 끝이다. 황제
자리가 날아간다.
으아악!!!
승승장구한다 생각해 구름 위를 걷고 있었는데 그놈이 아주 간단하게 땅바닥으로 처박았
다. 지금 온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듯 고통스러웠다. 머리통이 박살이 난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세 공작이 이 사실을 아는 날에는 그 기회주의자들이 바로 돌아서서 황제에게 이제라도
찰싹 붙을 것이다. 발밑을 기어서라도 그쪽으로 달려갈 것이다.
어쩌지?
쿠로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짝 소리 나게 치며 정신을 차리게 했다.
하루라도 빨리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본인
조차도. 절대 아무도 몰라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쿠로는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머리통을 부여잡고 방법을 찾느라 눈알이
바삐 움직였다.
만약에 말이다. 저놈의 신수가 발현된다면 말이다. 아직 마음대로 발현시키지 못하는 미완
성일 때 놈이 죽으면 된다.
정확히는 죽이면 된다. 완성이 되고 나면 죽이기 힘들어진다. 어떻게 하든 방법은 있다. 저
놈이 죽으면 황제 자리는 제 손에 떨어진다.
아직 길은 있다. 그렇다면 저놈을 어떻게 죽여야 하나? 마음 같아선 직접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하면 귀족들 반발이 거세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죽
여야 한다. 자신이 연루되지 않게. 사실 암살도 독살도 황궁에서는 어렵다. 철통같이 저놈
을 지키고 있을 테니 그건 무리다.
자연스럽게 죽일 수 있는 상황.
하나밖에 없다.
전쟁!
쿠로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를 도울 놈이 하나 있다.
그래. 그거다.
지랄발광을 하던 쿠로의 얼굴이 점점 비장하게 변하고 있었다.
***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말을 타자고 한 거요?”
통이 넓은 승마용 바지를 입고 서 있는 벨리타를 보며 황제는 재미있어했다. 뭘 입어도 어
울리긴 했다. 황실 승마복이 안 예뻐 말을 안 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언제나 예상을 뒤엎
는 그녀였다. 설마 말을 같이 타자고 할 줄이야.
이것도 작전인가? 말 타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잘 보이려는?
어쨌건 오늘도 벨리타는 흥미롭게 굴고 있었다. 아파 누워 있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멀리서 안톤과 시종장이 말을 끌고 오고 있었다. 검은 말과 갈색 말을. 갈색 말은 황후의
말이었다. 조금 성격이 급하고 까다로운 말, 마구간지기가 힘들어하는, 제 주인을 닮았다
고 숙덕거린 것까지는 황제가 모른다. 황후가 잘 타질 않아 줄을 묶어 마구간 공터에서 매
일 달리기를 시켜 줘야 했었는데 오늘은 안 해도 되니 다행이라는 말을 시종장이 듣고 왔
다.
벨리타는 막상 자신이 제안해 놓고는 거대한 말이 가까이 오자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유모가 권해 좋은 생각이라 생각하고 덜컥 일은 저질러 놓았는데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았
다.
조금 전.
“매일 만나시면 두 분이서 뭐 하세요?”
음흉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로 유모가 물었지만, 벨리타는 별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대답해
주었다.
“맨날 식사하고 걷고 그래요.”
역시 두 분은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그것만 하면 심심하죠.”
“그럼 뭘 해요?”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두 분이서 말을 같이 타면 어떨까요? 폐하께서 말 타시는 거 엄청
좋아하시거든요.”
바로 그녀도 흥미가 생겼다. 원래 말을 한번 타 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언젠가 제주도
갔을 때 남들은 다 타 보는 말도 타질 못했었다. 그날 하필이면 생리를 해서 타기가 불편했
었다. 그래서 원을 풀어 본다 생각하고 청을 넣었는데. 막상 눈앞에 닥치니 타지도 못하는
말을 혼자 타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시종장이 줄을 잡고 경보 정도 하면 되지 않을까? 뭐 어떻게 되겠지.
그녀는 말을 타고 둘이서 가볍게 걸어 다니는 걸 생각했다.
시종장의 도움으로 그 커다란 말에 올라타는 것까진 좋았는데 이 말이 가만있질 않았다.
푸드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뒷발로 땅을 계속 걷어차기도 하
고. 주위에서 다들 이상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