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계속해라
공작과의 회담을 어찌어찌 끝낸 황제는 부푼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바깥 공기를 쐬며 잠
시 거닐고자 황궁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한쪽 벽은 중정으로 탁 트인 우아한 통로를. 군
데군데 멋진 문양이 새겨진 굵고 커다란 대리석 기둥이 균형 있게 잘 세워져 있는 고풍스
러운 통로를.
날씨가 이렇게 좋았나? 황궁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어느 때보다 더.
그러고 보니 중정에 꽃들이 참 많이도 피었다. 생전 관심도 두지 않았던 꽃과 나무까지 그
의 시선에 들어오고 있었다.
황제의 뒤를 따르는 안톤과 보좌관 조프리 이튼 경 역시 그런 기분을 알아차렸다. 폐하의
기분이 좋으시다는 것을.
조프리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유모가 참 현명하다는 생각과 함께.
안톤 역시 폐하의 기분이 빠르게 회복한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단, 황후가 일조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때였다.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황제의 귀에 들어온 것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가 요즘 계속 만나시고.”
“그러게 말야. 지금 다들 그 이야기만 하고 있어.”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안톤이 떠드는 시종들을 제지하려고 기둥 쪽으로 가려 하는 걸
손을 들어 조용히 제지시켰다.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 폐하를 안톤과 조프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황제의 귀는 그들에게 한껏 열려 있었다.
계속 만나는 건 맞다. 다들 궁금한 게 많나 보군.
“한밤중에 폐하가 뛰어가셨다는데. 헐레벌떡.”
[음…… 뛰어간 건 맞는데 헐레벌떡은 아니지.]
기둥 뒤에서 시종들이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자신의 행동을 인지하지 못할 정
도로 그들이 뭐라 하는지 궁금해하는 황제였다. 그들이 속닥거리는 소리에 혼자 속으로 정
정하며.
“옷도 다 풀어 헤친 차림으로 급하게 뛰어가셨대.”
[단추 하나 풀었지. 소문이 좀 과장되었군.]
“아침에 돌아오셨다는데.”
“4년 동안 어떻게 참으셨대?”
“두 분이 드디어 온밤을 불태우신 건가?”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네. 하지만 키스만 했지. 조금 진한 키스.]
원래 이런 소문에 관심도 없던 황제였는데, 우연히라도 이런 말을 들었다면 불호령이 떨어
졌을 텐데 오늘은 신수 때문인지 너그러워진 칼리크였다.
잘못 알고 있는 게 있긴 하지만 이런 소문도 나쁘지 않다. 벨리타가 떨어뜨린 황실 권위를
생각한다면.
황제가 조용히 기둥 뒤에서 몸을 드러내자 기겁을 한 시종들이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죽…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들 손발이 닳도록 빌기 시작했다. 벌벌 떨면서. 지금 잘못하면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
“고개를 들어라.”
거역할 수 없는 엄한 황제의 목소리에 시종들은 힘겹게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분
노하는 황제의 얼굴이 아니어서 그들은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계속해라.”
아닙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말은 못 하면서 입만 뻥긋거리며 더 빌기 시작했다. 이렇
게 웃으며 신검을 휘두르시나 싶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바지에 지릴 것만 같았다.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런 얘기도 할 수 있지.”
싹싹 빌고 있던 그들의 손동작이 조금씩 느려졌다. 지금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제 귀를 의심
스러워하면서.
“하나, 확실히 할 건 있다.”
드디어 엄벌이 내려지나 싶어 시종들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지금 하던 이야기.”
그다음 말이 겁이 나 시종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눈물까지 흘릴 기세였다.
“계속하거라. 다른 이들도 알 수 있게.”
네에에?
시종들이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돌아서서 유유히 걸어가시는 폐하의 뒷모습만 눈에 들
어왔다. 그냥 가신다. 더 하라 하시며.
어리둥절했지만 자신들이 살았다는 생각에 시종들은 앉은 채로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안
도했다. 황궁 안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걸 실감하며. 그들 중 안도하며 우는 시종도 있었
다. 서로를 다독이는 시종들의 얼굴이 다시 환해지고 있었다.
***
황후궁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마님이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저는 너무 좋습니다.”
사실 그동안 할 말이 많아도 워낙 조심스러운 자리라 서로 이렇게 터놓고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그들은 더 돈독하게 서로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황후마마를 모신다고 하면 다들 불쌍하게 여기더군요.”
“저희 가문에서도 제가 마마 시녀가 된 것을 창피하게 여깁니다. 저 때문에 저희 가문이
아주 우습게 취급당하고요.”
그들의 심정은 똑같았다. 황후의 평판이 바닥이라 자신들 평가도 같이 떨어졌다. 영애들이
가장 원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명예롭기는커녕 치욕스러운 자리가 되어 버렸다. 황후
의 행실 때문에.
오래 붙어 있는 시녀도 손을 꼽았다. 심하게 매질을 당해 집으로 쫓겨난 영애도 있었고 감
옥에 갇힌 영애도 비일비재했다.
자신들도 하녀보다 못한 대우를 받을 때도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한 몸처럼 지낸 하녀조
차도 지하로 내쳐 버리기도 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차출되기를 바라지 않아 모
두 몸 사리기 바빴다. 하지만 지금은 황후궁과 황궁 전체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마마님. 제발. 이대로만 가 주세요.”
한 시녀가 두 손까지 모으며 간절히 빌었다. 그러자 다들 손을 모으고 진심을 다해 같은 마
음으로 빌기 시작했다.
***
“그렇게 좋으세요?”
황후궁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발그레한 얼굴, 촉촉한 눈망울로 창밖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 마마에게 유모는 놀리듯 물어보았다.
벨리타는 잠도 잘 못 잔 채 아침 일찍부터 고되게 황제와의 만남을 치렀더니 피곤했다. 햇
살 가득 비치는 창가에 앉아 있으니 몸이 노곤해졌다. 나오려는 하품을 억지로 참았더니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래도 오늘 할 일을 다 끝낸 느낌이었다. 내일 황제를 만나러 갈 때까지는 평화롭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유모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가 좋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여 주자 유모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
다. 얼마나 좋으시면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얼굴이 붉은 채로….
가만.
너무 오래 붉은 상태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유모는 마마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
어 보았다. 어라? 눈을 힘없이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마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본 유
모의 표정에 걱정이 한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
한바탕 난리를 친 유모가 부리나케 가져온 약을 먹고 벨리타는 강제로 침대에 누워 있었
다. 탈이 났나 보다.
이곳에 빙의해서 얼마나 마음 졸이고 살았는지, 이젠 안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자 그 후
폭풍이 몰려온 것 같았다. 칼리크와도 사이가 좋아지고, 목숨을 위협받는 단계는 벗어나
고. 그러니 지금까지 무리해 오던 것이 뻥 터져 버린 것이다.
열이 올라 얼굴이 벌겋게 된 자신 옆을 살뜰히 지켜 주는 유모가 있어 늘 그랬듯 감사함을
느꼈다.
“고마워요. 유모.”
진심을 다해 제 마음을 전한 벨리타는 약 기운이 도는지 스르륵 잠에 빠져 버렸다.
***
“뭐라?”
밤이 되기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바람같이 달려왔건만 황제를 기다리는 건 사랑스러운 벨
리타가 아니라 사람 환장하게 하는 유모였다.
“몸이 안 좋으십니다. 폐하.”
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게 제 품에 안겨 키스까지 해 놓고 그새 아파?
혹시 이제부터 예전처럼 굴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
반갑지 않은 사람 돌려보내는 제일 좋은 방법이 아프다고 핑계 대는 거다.
황제는 괘씸한 생각에 벨리타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젠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권
장하는 분위기였지만 제 생각에 빠진 황제는 알아차릴 리 만무했다. 여전히 의심을 품은
채 침대로 다가간 황제는 가만히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
음…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 사이로 괴로운 듯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앙증맞
은 그녀의 입술이 다소 부어 있었다. 평소보다 더. 키스를 너무 심하게 한 모양이었다. 황
제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가만히 침대 곁에 앉았다.
설마 이런 것까지 꾸미진 않겠지.
황제는 벨리타의 손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손이 참 작았다. 그의 손안에서 작은 벨리타의 손이 유독 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손은 뜨겁군.
황제는 손을 올려 그녀의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물수건도 이미 뜨끈해져
있었다. 자신이 여기 있으니 유모가 들어오지 못한 탓이리라.
황제는 가만히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 보았다. 물기인지 땀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이마가 약간 축축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열이 나는 건 맞는 것 같다. 벨리타가 진짜 아팠다.
황제는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물수건을 다시 벨리타의 이마에 얹어 주려다 물수건이 뜨
끈해져 있는 걸 다시 인지했다.
흠…….
황제는 생전 처음 이런 일도 해 보았다. 큰 그릇에 담겨 있는 차가운 물에 물수건을 다시
담가 짜는 일을. 손수 손에 물을 묻히며 짠 물수건을 다시 벨리타 이마에 얹어 주었다.
할 만했다.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마가 좀 식으니 벨리타의 얼
굴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도 같았다.
얼마나 아프려나?
천하의 벨리타가 이렇게 앓아누워 있으니 어울리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노래 부르고 해야
재미있는데.
황제는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황태자 시절 들은 말이 떠올랐다. 한번 된통 열병을 앓고 난 사람이 아주 싹
바뀌었다는 말. 황제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프고 나서 바뀌진 않겠지?
그럼 재미없는데. 유혹하려고 마음먹었으니 한번 제대로 해 보든가.
키스한 것처럼.
정말이지 그 키스는…….
황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 그 이상임을. 하지만 그 정도에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러니 더 확실하게 유혹을 해야 할 것이다.
황제는 조금 더 그녀를 들여다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루했다. 말이라도 타고 한바탕
달려야겠다. 벨리타가 누워 있으니 여길 찾아와도 재미가 없었다.
자신이 온 줄도 모르는 벨리타를 한 번 더 들여다본 황제는 천천히 그 방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