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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23화 (23/130)

23화 같이 자다니

벨리타는 할 수 없이 한숨을 폭 내쉬고는 황제의 몸을 제대로 눕혀 주었다.

웬 땀을 이렇게나 많이.

그녀는 그의 얼굴에 땀이 잔뜩 흘러내린 것을 보고 가만가만 닦아 주었다. 숨소리도 안정

적이고 얼굴도 편안해 보이는 황제가 살짝 밉기도 했다. 자신은 이리 편치 않게 만들어 놓

고 자기만 잠이 들다니.

자기는 나보고 기절하지 말라고 해 놓고. 다음번엔 내가 잠들지 말라 요구해야 하나?

잠이 들어도 아주 깊게 잠이 든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흐트러진 잠옷을 제대

로 입었다. 이런 느낌이 처음이라 아직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녀는 그의 옆에서 모로 누워 그의 얼굴을 또다시 세심히 쳐다보았다. 지난번에도 느꼈지

만 참 잘생기긴 했다. 입술은 더 잘생겼고.

이건 방금 지나칠 정도로 황홀하게 키스를 나눴다고 좋게 봐 주는 것은 아니다, 라고 주장

하고 싶었지만 맞다. 영향받았다.

잠든 그를 보고 있자니 그렇게 심하게 뛰던 가슴도 점점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손끝에 그의 섹시함과 강렬함이

묻어나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이런 사람이 죽는다니…….

그놈의 전쟁이 문제다.

유클로 왕국을 정복하러 안 가면 안 될까? 100만 대군을 데리고 가 겨우 몇만의 군사만 살

아 돌아오는데.

그렇게 대패하고 돌아와 황도에 군사가 얼마 남지 않게 되고 사기도 바닥을 기게 된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로카 왕국이 펠론 왕국과 손을 잡고 쳐들어와 이 남자는 얼마 버티지 못

하고 죽는다.

후우…….

그렇게 죽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생긴 외모도 그렇지만 그의 뜻대로 통일 제국을

이뤄 태평성대 한 나라의 제왕으로 등극하면 이 남자도 잘 살 텐데. 하필 원작의 조연일 게

뭐야. 명색이 황제인데. 본인이 그걸 알면 얼마나 펄펄 날뛸까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이 남자가 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 이 남자가 원작의 주인공이었다면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갔을지도 모르겠다. 조금의 여유가 생겨 그녀는 원작을 떠올려 보았다. 이 황제가 폭

군 소리를 듣는 건 적에게 행한 행위 때문이었고 제 사람에게는 특별히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통일을 이루고 신수만 나왔다면 괜찮은 황제가 됐을 텐데.

그런데 가만.

아까!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던 그건.

신수가 확실하다.

황제의 신수가 뭔지는 원작에 나와 있지 않았다. 끝까지 발현되지 않고 죽었다고만 쓰여

있었다. 하지만 보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뭐가 바뀌나? 아니 바뀔 수 있나?

그랬으면 좋겠다. 이 남자가 죽지 않아야 나도 사니까.

로카 왕국이 쳐들어와 황제를 죽인다면 황후인 자신도 살려 둘 리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녀도 점점 졸음이 밀려와 곤하게 자고 있는 그의 어깨에 살며시

고개를 기대었다. 하품까지 하던 그녀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한 침대에서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

유모는 그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누가 보면 방정맞다고 하겠지만 지금 이 방에는 아

무도 없다.

시녀들은 다 제 숙소로 돌려보내고 유모 혼자 마마의 옆방에서 밤새 대기했다. 물론 졸다

깨기를 반복하며, 밤새 열리지 않는 방문을 바라보며 좋아하다, 웃다, 또 졸다 혼자 바빴다.

이른 아침, 벌컥 열리는 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도 못 뜨고 벌떡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

였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힘차게 걸어가는 폐하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유지했

다. 다시 고개를 드는 유모의 입은 찢어져라 귀에 걸리고 있었다.

늦은 밤에 느닷없이 평상복 차림의 폐하가 나타나셔서 모두가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시던 폐하의 모습이 아닌, 들뜨고 다급해 보이는 모습이었기에 더

더욱 놀랐다.

문을 쾅 닫고 들어가시자 남아 있던 시녀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예전 같으면 뭔가 잘

못될까 봐, 무슨 일이 터질까 봐 노심초사했겠지만, 지금은 반응이 달랐다. 지금 저 방 안

에서 자신들이 걱정할 만한 일은 터질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벌어지

겠는가. 얼굴 붉어질 일밖에는 없다.

유모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늘 내가 마마와 붙어 있었는데 언제 저리 가까워지셨지? 딱히 별일 없었는데 저렇게 폐하

가 달려올 정도로 뭐가 있었지?

이런 중요한 일을 자기가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좀 서운했지만 일이 일인 만큼 그

서운함이 기대와 설렘으로 싹 덮어졌다.

마마. 힘내세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황제 폐하와 가까워지기만 한다면. 아무 남자여도 마마

가 좋다고만 하면 붙여 줬었는데 남편이면서 이 나라의 주인인 폐하라면 더할 나위가 없

다.

그래서 다들 돌려보내고 유모만 이 방에 남았다. 생각보다 더 길게 머무시는 폐하 때문에

이번에는 유모의 얼굴도 붉어지고 있었다. 주무시고 가시려나. 싱글벙글 웃고 있는 유모는

그래도 이렇게 빠른 전개가 의아하기만 했다.

몇 번 식사하고 얘기 몇 마디 나누더니 침대…….

하긴, 우리 마마님의 미모에 폐하가 버틸 재간이 없으셨겠지.

오호호호.

지금까지 키워 낸 보람이 여기서 보상을 받는 듯싶었다. 한고집 하는 마마라 말도 전혀 안

듣고 엉뚱한 남자들만 밝히셔서 ? 사실 얼굴만 괜찮았지 대부분 다 쭉정이 같은 것들이었

지만 ? 마마의 행복을 위해 다 도와드렸다.

다른 남자도 좋다고만 하면 다 밀어드릴 판인데 이번에는 남편인 폐하에게 관심을 가지셨

다. 이왕 남자를 만난다면 남편이 최고 아니겠는가. 이번에야말로 괜찮은 남자에게 꽂히셨

다.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살포시 덮어 주는 유모의 눈에 아기처럼 해맑게 잠이 든 마마의 얼

굴이 너무 사랑스러워 눈물이 다 나려고 했다. 큰일을 치르신 마마를 위해 유모는 문을 소

리 나지 않게 살짝 닫고 나왔다.

***

황제는 데인에게 황도 변두리에 있는 가옥 한 채가 화재로 전소하고 그 안에 살던 미망인

도 불에 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데인의 정보망을 통해 그 집에 쿠로가 드나들

었다는 것도 알아냈다. 화재 사건은 쿠로가 꾸민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물증은 없다. 분명

다른 부랑아를 시키고 자신은 안전한 장소에 있었을 테니까.

“자네한테 신수가 나타났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 인간 덜 된 쿠로한테 신성한 신수가 왜 발현된 것인지 이건 하늘이 뒤집힐 일이었다. 원

래 장자에게 발현될 가능성이 가장 큰데 차남인 쿠로가 그 혜택을 입었다.

“신이 몸이 약한 탓에…….”

신은 데인에게 뛰어난 머리를 주는 대신 약한 육체를 주셨다. 남들보다 키도 작고. 검술도

쿠로가 더 뛰어났다. 그러니 신수도 동생에게 나타난 것이다.

“쿠로가 아니라 자네였다면 이 황제 자리도 아깝지 않은데.”

“그런 말씀 하지도 마십시오. 하늘이 노하십니다. 그 자리는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물며 쿠로 같은 놈이 감히. 걱정 마십시오. 곧 신수가 발현되실 겁니다. 폐하.”

황제는 진심이었다. 하나 데인의 충성 또한 모르지 않는다. 묵직한 시선을 그에게 던지며

황제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보고를 마치고 나가고 나자 황제는 아침부터 빠져 있던 생각에 다시 몰두했다.

벨리타와 같이 자다니.

그것도 한 침대에서!

뭐에 홀렸거나 내가 미친 거겠지.

황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벨리타와 잔 것이 후회스러운 건지, 그

냥…… 잠만 잔 것이 후회스러운 건지 혼란스러워 머리가 아파 왔다.

제국 통일에만 집중하느라 여인과 그런 키스를 한 것이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얼마나 뜨거

웠는지 그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더 아파 왔다. 황홀하기는 또 얼마나……. 아직도 자신의 혀

끝에 그녀의 감촉이 남아 있는 듯 아릿했다.

미치겠다. 그 생각만으로도 제 몸이 뻐근해졌다. 황제는 어이없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내

려 반응을 보이고 있는 제 몸을 응시했다. 벨리타한테 그런 키스를 하고 이제는 이런 반응

까지 보이다니. 그녀가 옆에 없는데도 생각만으로 이러다니.

하!

미친 게 틀림없다.

그런데 오늘은 언제 오려나.

아니다.

이제는 안 올 것이다. 죽이지 않는다고 확실히 말해 줬으니 이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

도 대역죄를 진 건 안다 이거다.

왜 계속 죽일까 봐 벌벌 떠나 했더니 그 정도의 큰일을 벌인 적이 없어 겁을 먹은 것이었

다. 천하의 벨리타도 대역죄 앞에서는 무서워했던 거고. 정세 파악도 못 하는 멍청이도 맞

았다. 덕분에 얼마간 즐거웠던 건 사실이다. 그런 키스까지 다 해 보고.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 그러면 되는 거지.

음… 그래도 정말 안 오는 건가? 죽이지 않는다고 확답을 받았으니?

어쩌면 예전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 올 것이다. 그래도 만약 오늘 온다면 정

말로 이번 대상이 나인 거다. 벨리타는 남자를 한번 찍으면 반드시 제 것으로 만들어야 직

성이 풀리는 성향이라고 들었다. 그러니 혹시 오면…….

똑똑똑.

흠칫 놀란 황제의 두 눈이 커졌다. 이런 반응조차 못마땅했다.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던 황제

는 사나운 눈빛으로 열리는 문을 노려보았다.

***

조금 전, 벨리타는 햇살 가득 비치는 창가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해 댔다. 유모가 뒤에서

자신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지만,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피곤하세요?”

“하암…… 잠을 얼마 못 자서…….”

벨리타는 연거푸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너무 일찍 일어났다.

입술이 옆으로 자꾸 벌어지려고 하는 유모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폐하께서 밤새 재우질 않으셨나 보죠?”

쿡쿡. 뒤에서 소리 나지 않게 웃고 있는 유모는 마마의 대답을 은근 기다렸다. 뭐라 하시려

나……. 잠에서 깨어난 마마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대하는 것이 조금은 이상했지

만 쑥스러워 오히려 일부러 평상시처럼 행동하시는 거라 여겼다.

많은 남자들과 바람직하지 않게 노셨던 마마지만 유흥이 끝나면 모두 돌려보냈다. 절대로,

단 한 번도, 거사를 마치고 제 침대에서 잠까지 재운 적은 없으셨다. 그런 분이 폐하와 같

이 잠을 주무셨다. 이게 뭐를 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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