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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21화 (21/130)

21화 정말로 누우라는 말?

어떻게 보면 조용히 혼자 햇살을 음미하는 듯도 보였다. 그래서인가 점점 나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아~. 황제가 느닷없이 하품을 했다. 이런 모습 처음이다.

“좀 졸립군.”

황제는 제 침실로 돌아가 잠깐 눈이라도 붙일까 싶었다. 이런저런 고민으로 간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좀 주무시겠어요?”

얼른 각자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일찍 헤어지는 좋은 방법이

라 벨리타는 얼른 제안했다.

“무릎베개라도 해 줄 셈이요?”

벨리타의 속을 모를 황제가 아니었다. 내가 왜 방으로 가? 누구 편하라고.

역시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게 보였다. 이러니 분명 거부하고 나올 테고. 사실 어떻

게 나오나 보려고 한 것이지 진짜 할 것이라 생각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벨리타는 자신이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제 꾀에 넘어갔다. 황제의 얼굴을 보니 저를

테스트해 보는 심보라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목숨줄을 움켜쥐고 있다고 별의별 것들을 다

요구해 온다.

후… 인내심 많은 내가 참아 준다.

팡팡.

황제의 두 눈이 눈에 띄게 휘둥그레졌다. 또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 황제 눈에 들어왔다. 그

녀가 제 무릎을 손으로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

정말로 누우라는 말?

설마.

이놈의 설마는 어제부터 밤새, 지금까지도 계속 자신에게서 튀어나온다.

“어서 누우세요.”

옅은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앉아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토파즈 눈동자가 더 선

명하고 맑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발그레한 두 뺨과 촉촉한 입술, 평상시와는 달리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신 같은 벨리타. 그녀의 두 눈이 살며시 접히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부드러운 미소에 녹듯 황제의 경직된 눈동자도 서서히 풀려 가기 시작했다.

정말 나한테 무릎베개를 해 주겠다는 뜻이다.

황제가 움직이자 갑자기 주변이 미묘하게 부산스럽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벨리타의 무릎을 베고 누워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이 평화로운 순간을 만끽했다. 아마도 이

모습에 놀라 주변 시종들이 동요했으리라. 이해한다. 자신도 놀라고 있으니까.

아마도 이 이후로 소문이 빠르게 황궁 안에 퍼질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벨리타에 대

한 소문 중 이번 일이 가장 좋은 것일 테니까. 안 믿는 사람도 있을 거고. 하지만 상관없다.

음…….

이러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편했다. 솔솔 잠이 들려 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천하의 벨리타 무릎을 다 베고 누워 보다니. 게다가 편안하게 낮잠까

지 들려고 한다.

황제의 입술이 근사한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자면서 미소 짓네.

처음엔 얼굴을 찡그렸었는데.

이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리타는 제 무릎을 베고 편안하게 잠이 든 황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보기는 처음이다. 짙은 눈썹이며 사납게 오

뚝 선 콧날, 편안하게 풀어진 남자다운 입술. 게다가 의외로 긴 속눈썹. 손으로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긴 속눈썹이 근사했다.

이렇게 보니 참 잘생겼네.

선이 굵직굵직하고 뭐든지 큼지막하니 시원시원하게 생겼다. 이렇게 내려다보며 요리조리

황제의 얼굴을 관찰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이 얼굴로 화내고 있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

계속 이러면 더 잘생겨 보일 텐데, 아깝다.

여기 와서 처음 겪는 일이 많이 생겨난다. 그중에 지금 이런 순간은 나쁘지 않았다. 처음으

로 맞는 휴식 시간처럼 평화로운 지금이 고마웠다. 지금까지 전쟁 통을 지나온 느낌이라.

황제가 무섭게 굴지 않으니 모든 게 평화로웠다. 벨리타는 신선한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셨

다.

아! 싱그런 내음. 평온하게 주변을 감싸고 흐르는 맑은 공기, 살랑살랑 불어와 기분 좋게

스치고 지나가는 수줍은 바람, 나른하게 온몸이 풀어지게 만드는 포근한 햇살.

앞으로 무슨 격변이 일어날지라도 이렇게 잠시 쉬어 가는 것이 그녀에게 절실히 필요했나

보다. 그때 황제가 살짝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갑자기 귀엽게 느껴졌다.

아. 똑같은 사람이구나.

어마어마하고 엄청나게 무서운 폭군으로만 알았는데 그도 다른 이들과 같구나.

저도 모르게 벨리타는 손을 올려 그의 검은 머리를 살며시 만져 보았다. 깊게 낮잠에 빠졌

는지 황제의 고른 숨소리에 힘입어 가만가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이 남자의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잘 자도록 그의 머

리를 쓰다듬어 주는 일.

황제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어릴 때 꿈을 꾼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

만 이런 기분이 뭔지는 안다. 어린 황태자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 무릎에 누워 도란도란 이

야기를 나누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저도 단잠에 빠지던 그 평온하고 행복한 기분. 지금

이 그렇다.

지금 머리를 기분 좋게 만져 주는 어머니의 손길……일 리 없다. 이미 돌아가셨다. 황제는

바로 눈을 뜨지 않고 지금 사태를 인지했다.

벨리타.

그녀의 무릎을 베고 정말로 잠에 빠지다니.

그녀 때문에 잠 못 들었고 그녀 덕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벨리타라면

제 다리를 주무르게 시키면 시켰지, 남자들에게 뭘 해 주기는커녕 이것저것 제 맘에 들게

주문만 할 여자다. 자신이 그런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황

제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 보았다.

아!

자신을 염려하는 듯한 맑은 푸른색 눈동자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천사와 여신을 합쳐 놓

은 아름다운 벨리타의 얼굴이 그다음 들어왔고.

“잘 잤어요?”

세 번째로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귀를 즐겁게 두드렸다.

이거 이거.

위험하다.

이렇게 되면 벨리타에게 말려드는 것 같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분위기 깨는 덴 선수인 황제 칼리크.

그녀의 푸른 눈이 살짝 탁하게 흐려졌다.

“당신. 왜 이렇게 달라졌지?”

황제는 직접 묻기로 했다. 이런 일로 고민하는 게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싫으세요?”

싫을 리가. 황후가 이리 달라졌다는데 황궁 안 누가 싫어하겠나.

언제까지 이럴 것인지 그게 문제지.

“사실… 제가…….”

기억을 잃어버렸어요, 기억이 안 나요, 뭐라 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그녀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유모나 믿어 주지 누가 믿어 주겠어.

“당신의 말대로 황후로서 자격이 있게 노력하고자…….”

반은 맞는 말이라 전형적인 답을 하려 했다. 그러나 말이 입 안에서 꼬여 매끄럽게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다 한다?”

황후궁의 남자들을 다 몰아냈을 뿐 아니라 새 남자들을 찾고 있지도 않다. 정숙한 여인이

라도 된 것처럼. 정말로 벨리타 주변에 남자라곤 자신 하나 남았다.

“뭘 시켜도?”

뭘 시키느냐가 문제이긴 한데 지금 제 처지에서는 뭘 가리고 자시고 할 수 없는 입장이라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벨리타는 그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모습이 황제의 눈에는 부끄러워하는 듯이 보였다.

“꼭 지켜야 할 것이오. 내가 뭘 시키건.”

네. 제가 뭐 거부할 주제인가요?

다른 건 몰라도 주제 파악은 확실히 하는 그녀였다.

“직접 내 눈앞에서.”

너무 못 믿는다. 하긴 그동안 벨리타의 모습에 비추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약속한 건 꼭 지킬게요.”

이런 눈빛 마음에 든다. 그저 모면만 하려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못 할 건 없지.

은근 이런 도전을 재미있어하는 황제였다.

“아야야…….”

이만 돌아가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벨리타가 내지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걷

지도 못하며 절름거리기까지 하는 벨리타를 보고 왜 저러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다리에 쥐

가 났다. 그렇게 오래 잤나 싶었다. 황제는 다가가 팔을 내밀었다.

벨리타는 감사의 눈빛을 던지며 처음으로 그의 팔짱을 끼고 걷게 되었다. 아니 절뚝거렸

다. 다리 한쪽이 마비되어 자근자근 저미듯 전기가 통하는 통증에 전혀 힘을 줄 수가 없었

다. 그녀의 휘청이는 힘에 황제까지 움찔했다.

흠…….

황제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

황후를 따라가지 않고 방에 편히 앉아 기다리고 있는 시녀들은 처음엔 가시방석이었다. 마

마가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그래도 이런 적이 없어서.

오래 서 있어야 하고 힘들다고, 어차피 거긴 황제 호위군이 있으니 그냥 편히 쉬라고 하면

서 중정으로 홀로 나가셨다. 물론 유모인 카넬 부인은 대동했지만. 부인도 고개를 끄덕여

주며 허락했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슬슬 마중이라도 나가 볼까요?”

“그럴까요? 아직 익숙지 않아 그리 편하지만은 않네요.”

모두가 의기투합하여 마마를 맞이하러 황후궁 입구로 향했다. 마마가 오시는 소리가 들리

는 것 같아 서둘러 잰걸음으로 다가가던 시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 멈추어 섰다.

지금.

마마가…… 걸어오시는 게 아니라 안겨 오셨다. 황제 폐하에게.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나 놀라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시녀들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한쪽 벽으

로 물러났다.

***

잠이 안 온다. 온천탕에 다녀와서 그런가 몸이 여전히 뜨겁다. 그냥 뜨거운 것이 아니라 후

끈후끈 달아오른다.

손끝도 저릿하고. 지병 외에는 다른 병치레 한번 안 해 본 자신이라 몸이 아픈 것 같진 않

은데 그냥 여기저기가 불편하고 열이 오른다. 또 잠을 이루지 못하니 신경까지 예민해졌

다. 그는 이렇게 시간을 허송으로 낭비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 자든가 일하든가.

하아…….

지루했다. 칼리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두 손으로 창문까지 활짝 열

어젖히고는 시원한 바람을 쐬었다. 조금 식나 싶었던 자신의 몸이 다시 뜨거워졌다.

왜 이러나.

밤이라 어두워 창밖으로 보이는 게 없으니 더 지루해졌다.

갑자기 황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낮에 다리에 쥐가 나서 절뚝거리던 벨리타의 모습

이 생각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안아서 방까지 데려다줄 때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얼굴을

붉히던 벨리타가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이런 시간에 벨리타를 떠올리다니. 지금 아주 쿨쿨 잘 자고 있을 거다. 이럴 때 옆에 있었

으면 노래나 시켜 볼 텐데.

갑자기 그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왜 지금 하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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