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이제는 슬슬 내 차례다 이건가?
설마.
아니야. 맞을지도.
그래도 설마. 지금에 와서야 왜 나한테?
아니다. 이제는 슬슬 내 차례다 이건가?
그렇다면? 한번 즐겨 본다고 뭐가 나쁜가, 어차피 공식적으로 부부인데.
흠… 그래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러자니 뭔가 찜찜하고…….
황제의 입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 나라의 조공은 협상 중이니 이보다 더 높아질 것입니다.”
이런.
눈치 빠르기로 유명한 데인도 이렇게 헛다리를 짚을 때가 있다니.
조공이 적어서 한숨을 쉰 게 아니었는데.
그러나 황제는 정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그 고민을 계속하고 있었다.
***
데인은 정무실을 나오면서 손으로 턱을 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심각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집중을 못 하신다. 폐하가. 오늘같이 중요한 회의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후가 달라지
더니 폐하마저? 이 무슨 조화람. 이 모든 것이 좋은 쪽인지 아닌지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흠…….
폐하의 웃음소리, 황후의 성의, 매일 보시는데도 별일이 없으시고.
황후 앞에서 폐하께서 자주 미소 짓는다는 것도, 황후가 다리를 주물러 주고 얌전히 말 잘
듣는다는 것도 이미 다 알고 있다.
이번 식사 시간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고 시종장이 보고하던데 두 분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건가?
황후는 걱정이 되지 않는데 폐하는 걱정이 되었다. 통일밖에 모르는 폐하는 은근 이쪽으로
무지하다고 할까.
그런 폐하를 홀리려고…… 아니다. 예전 황후였으면 자신부터 결사반대하고 막았을 것이다.
아니 그랬다면 폐하가 먼저 거부하고 밀쳐 냈을 것이다. 문제는 황후가 달라졌다는 데 있
다. 그러니 폐하도 계속해서 만나시는 거겠지.
갑자기 바뀐 두 분 때문에 데인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서도 펜을 들 수가 없었다. 각 나라
에 보낼 서신을 써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 고민을 오래 끌지는 않았다. 지금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니니. 다 하늘의 깊은 뜻이 있겠지 싶어 데인은 드디어 펜을 들었다.
* * *
“마마. 너무 예쁘세요.”
시녀들이 벨리타의 치장을 도운 뒤 너도나도 칭찬을 했다.
“자 보세요. 내일 이렇게 하고 폐하께 가시면 좋겠어요.”
커다란 거울을 끌고 와 벨리타 앞에 세워 준 시녀에게 고맙다 소리를 해야 하는데 하지 못
했다. 일부러 거울을 안 보려 구석에 얌전히 박아 두었는데 그걸 끌고 오다니. 자신을 보필
하는 시녀들이라 뭐라 할 수도 없어 억지로 거울 속에 비치는 제 모습에 시선을 두었다.
아! 이럴 줄 알았다.
천사가 따로 없었다.
아니 아프로디테가 와도 울고 갈 정도로 잘났다.
게다가 시녀들이 얼마나 잘 어울리게 화장을 해 놓았는지 푸른 눈동자는 더욱 빛이 났으
며 불그스름한 양 볼은 싱그럽게 보였다. 핑크빛으로 그린 듯 어여쁜 입술은 마치 이슬을
머금은 꽃봉오리처럼 매력적이었고 틀어 올리는 대신 가볍게 묶어 아래로 내려뜨린 붉은
머리카락은 윤기 있게 반짝거렸다. 이렇게 정확하게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
이게 자신의 얼굴이라니.
이래서 안 보려고 했다. 적응이 더 안 될 것 같아서.
너무나 큰 이질감에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거울 속 벨리타도 똑같이 눈을 깜빡깜빡 움
직이자 그녀는 픽 실소를 터트렸다. 제 모습이니 똑같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데도 이 얼
굴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가 낯선 타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외모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이 모습이 이젠 나다.
속은 다 썩어 있는…… 아니다. 이제 그 속도 나다.
이젠 정신 차린 벨리타가 되면 된다. 그러니 너무 이 상황에 괴로워 말자. 점점 황제한테도
인정받아 잘 살아남으면 된다.
예쁜 벨리타의 입술이 더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듯 빠져들 수밖에 없는 미소를 지은 벨리타를 유모도 넋 나간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요즘 마마의 미모가 더욱 물이 오른 것 같
았다.
뭔가 다른 깊이가 느껴지는 미모였다. 유모는 마마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요즘 계속 이
러고 있다. 이렇게 미모가 더 빛이 나는 건 대부분 사랑을 하면 그렇다는데……. 심증은 있
다.
하지만 이젠 더 신중하게 움직일 생각이다. 지난번 마마가 뭘 원하는지 잘못 맞췄을 때 얼
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다신 그런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런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마마. 고바 기름을 더 가져오겠습니다.”
고바 기름은 며칠 밀봉해 두어야 약효가 높아진다. 지금쯤 충분히 숙성되었을 터라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유모는 제 작업실로 향했다. 특별히 마마가 마련해 준 작업실, 사실 거의 약
제실이나 다름없었다.
호호호호.
며칠 새 달라진 것 또 하나. 황후궁을 걷던 유모는 심심찮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하녀들
의 웃음소리를 즐겼다.
마마가 변하는 만큼 이 황후궁 분위기도 변해 간다. 언제나 살얼음판 걷듯 모두가 긴장하
고 몸 사리던 분위기가 점점 부드러워진다.
처음으로 웃음소리도 들리고. 그동안 모두가 마마 눈에 띄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기 일쑤였
는데. 또 눈에 아무도 안 띄면 눈에 아무도 안 띈다고 마마는 한바탕 뒤집어 놓으셨다.
왜 저런대? 이게 믿어져?
사람 된 건가?
지금 며칠째 이어지잖아.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는 건 처음 봐.
좀 오래 가면 좋을 텐데. 지금 너무 분위기 좋잖아…….
다들 삼삼오오 모이면 쑥덕거리는 마마의 이야기.
예전 같으면 해괴망측한 소문…… 말은 똑바로 하자. 소문이 아니라 사실을 쑥덕거리며 욕
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바람직하게 돌아간다. 긍정적이고 좋은 소리가 퍼지고
있다. 유모는 잰걸음으로 걸어가면서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이런 씨X.
[지금 달거리 중이라 오늘은 안 됩니다.]
자신이 구워삶아 놓은 여자 중 하나인 미망인의 문전 박대에 쿠로는 욕을 한 바가지 쏟아
냈다.
건방진 년. 씩씩거리며 다시 마차에 올라탄 그는 행선지를 바꾸었다. 너 아니어도 또 있다.
하지만 일순위로 여기던 여자에게 이렇게 거절당하고 차선책으로 향하는 지금 그의 입 안
이 씁쓸했다.
신수가 나올 조짐이 갑자기 보였다. 지난번 발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
얼마나 뜻깊은 징조인가.
이런 식으로 점점 커지고 완성되는구나 싶어 얼른 이 여자 집으로 달려왔건만. 뜻을 못 이
루고 다른 여자한테 가고 있는 이 상황이 쿠로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물론 아무 여자나 안고 해 버려도 그만이다. 하지만 저 여자를 안고 나면 더 강해지고 성장
한 신수가 발현된다. 하고 난 뒤 희열이 그 누구하고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높아 그런 것
이리라.
쿠로는 마차 안에서 땀이 맺힌 이마를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 냈다.
신수가 나타나기 전 징조.
몸에 열이 난다.
아파서 나는 열과의 차이점은 그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가 어느 한 곳 터져 나갈 것처럼
손끝 발끝이 찌릿찌릿하다는 것이다. 그때 여자에게 그 터져 나갈 것 같은 느낌을 풀어 버
려야 한다. 대부분 관계가 끝나면 기운이 빠지는데 이때는 더한 에너지가 제 안에 모이고
등 쪽으로 그 에너지가 쑤욱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든다. 그게 신수다.
그래서 지금 그 징조가 일어났을 때 저 여자를 안아야 했는데 퇴짜 맞고 방향을 돌렸으니
속이 쓰렸다. 지금 황제가 되는 대업을 치러야 하는 이 몸을 몰라보고.
그래도 이번에는 밤에 징조가 나타나서 여자를 안는 것이 더 수월하다. 여자의 집에 방문
하는 것도 들킬 리 없고. 지난번엔 낮에 징조가 나타나 급히 집사를 통해 방금 퇴짜 맞은
여자를 마차로 불렀다.
아무도 모르게 황궁 근처 인적 없는 곳에 세워 둔 마차에. 일이 끝나면 두둑하게 쥐여 주는
돈주머니 때문에 장소가 어디건 마다하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신수가 발현되
어 의기양양하게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보란 듯이 신수를 날렸다.
그 쾌감이 잊히지 않는데 이렇게 찬물을 끼얹다니. 새로 갈아 치우든가 해야지, 너무 저 여
자만 찾았더니 콧대가 높아졌다. 그다음 수순으로 돈을 더 받아 내려 하겠지. 흥!
콧방귀를 뀌며 마차에서 내린 쿠로는 환대해 주는 두 번째 여자의 손을 잡고 사랑에 빠진
가면을 쓴 채 그 집으로 들어갔다.
***
이런 씨X.
연거푸 욕이 터져 나왔다.
한바탕 거하게 거사를 치르고 그 집을 나온 쿠로는 서둘러 넓은 공터로 향했다. 폭주되는
에너지를 뿜어내기 위해 공터 한가운데 선 쿠로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자신 있게 신수를
발현시켰다. 그러나…….
변함이 없었다. 그것도 열받는데 상태가 이상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말 신수가 이상하게
잘 달리지도 못하고 계속 공중에서 캑캑거린다. 뭘 잘못 먹었나 싶을 정도로. 살아 있는 것
도 아니니 그럴 리는 없고. 환장해서 돌아 버리겠다.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저러다 잘못되어 겨우 여기까지 키운 망아지 신수
가 소멸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바로 자신은 더러운 시궁창에 처박힌다. 누가 저를 따르고
추대하겠는가.
으악!
저 미친 신수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제 눈앞에서 연신 캑캑거리며 머리를 제 다리 사이로 처박는 꼴이 사람 속을 히딱 뒤집어
놓는다. 이 꼴을 보여 주려고 튀어나온 거야!
으악!!!
처음 그년하고 잤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보단 나았을 텐데.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발악을 하듯 내지른 그의 고함 소리가 텅 빈 공터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
또 다리라도 주물러 달라 할 건가 싶어 사각 러그 카펫에 앉은 벨리타는 조용히 황제의 명
을 기다렸다.
“날씨가 참 좋군.”
계속 날씨 얘기만 하고 헤어져도 전 좋습니다.
적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벨리타는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피로하게도 보인다. 황제
자리라 일도 많고 고민할 것도 많겠지. 좀 안쓰럽게도 보였다.
지난번 앉았던 호숫가 근처에 다시 러그를 깔고 앉은 두 사람은 그렇게 멀뚱멀뚱 시간을
흘려보내고만 있었다. 황제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아무 말이 없어 벨리타는 조금 이상
하게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