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옳지 않아
뜨겁다.
너무 빨리 마셨다.
그걸 모르는 시종이 얼른 다른 홍차로 부리나케 다시 바꿔 주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홍차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아 찌푸린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거야 원.
“정말 맛있어요.”
환하게 웃으며 꾀꼬리처럼 말하는 벨리타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왔다.
이거 이거.
좋지 않다.
당황하는 건 벨리타여야 한다. 어서 그 모습을 보여야 홍차를 즐길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벨로롱.”
벨리타의 표정이 갑자기 붉어졌다.
세상에, 황제가 지금 뭐라 한 거야? 어휴…….
병문안 때 그 순간이 떠올라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져 갔다.
“다음번엔 또 노래를 듣고 싶은데.”
황제의 속도 모르는 벨리타는 그 말에 입술을 새초롬하게 오므렸다.
무슨 또 노래? 이것도 황후궁 안주인 역할인가? 따지고 싶었지만, 아직 그 정도 용기까진
없었다.
“준비해 보겠습니다.”
당황하지 않는 벨리타의 모습에 심히 실망한 황제의 눈가가 은근히 찌푸려졌다. 이걸 바라
고 놀린 것이 아닌데.
“이번에는 듀엣으로. 당신과 같이 부르는 노래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혼자만 당하고 있기엔 억울해 꾀를 내 보았다. 황제 자신도 해야 한다면 생각이 좀 바뀌겠
지.
황제는 침착하게 홍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어 봤자 자신
한테 좋을 건 없었다. 침착하게 대응하는 벨리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항상 자신이
었는데. 갈팡질팡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그렇다면 춤을 연습해 보는 게 어떻소?”
으윽. 벨리타의 예쁜 눈가에 주름이 졌다. 사양한다. 춤은 완전 젬병이다. 얼마나 더 망가지
는 꼴을 보고 싶어 이러나 싶어 벨리타의 눈매가 새초롬해졌다.
황제는 그런 벨리타의 모습이 조금은 마음에 들어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이러니 좀 낫군.
“즐기고 가시오.”
홀로 벨리타를 남겨 놓고 그곳을 빠져나가는 황제의 눈빛이 다시 강건함을 띠었다. 그래도
기록에 남을 것이다. 벨리타와 이렇게 오래 대화를 주고받아 본 것이. 게다가 꽤 유쾌했다.
살짝 이상한 쪽으로 흐른 것만 뺀다면.
정무실로 향하는 황제의 얼굴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제 생각이 맞을까 봐.
이거 이거.
옳지 않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숱하게 남자를 갈아 치웠는데 다음 상대를 물색하는 중…… 아니다.
한 번쯤 그 상대가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미치자 황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쿠로 브누아 대공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산티노 공작은 잔뜩 우거지상을 한 얼굴을 순식간에 활짝 폈다.
한쪽 귀에는 피가 묻은 붕대를 감고 있어 몰골이 아주 말이 아니었다. 공작 저택도 칙칙한
모래바람이 부는 것처럼 살얼음을 걷는 분위기였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고행은 끝이 나
려나 보다. 공작가 하인들은 처음으로 대공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을 판이었다.
“어이쿠. 이게 다 뭔가…….”
장정 하인 세 명이 어깨에 뭔가를 무겁게 짊어지고 공작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에 산티
노 공작은 입이 찢어졌다. 그러다 찢어진 귀가 당겨 얼굴이 다시 찡그려졌다.
“브누아산 최고급 와인입니다. 여기 대공님의 전언도 있습니다.”
그 귀한 와인을 저렇게 오크통째 세 통이나 보내 주시다니. 이런 감격과 감동이 없다. 벅차
오르는 가슴으로 산티노 공작은 하인이 전해 준 편지를 서둘러 열어 보았다.
[어서 쾌차하시오. 그대가 없으니 외롭구려. 쿠로 브누아 대공.]
크헉! 대공님.
산티노 공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격에 겨워 몸부림쳤다. 역시 나밖에 없다는 걸 아신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이 정도의 살신성인은 오히려 득이 된 셈. 그렇게 쑤시고 아팠던 찢
어진 귀의 통증까지 옅어지는 느낌이었다.
헤시시 바로 얼굴이 펴진 공작의 모습을 보며 하인들은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좋아했다.
한편, 쿠로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게 착각하라고 일부러 거하게 보낸 것이었다. 형식적으
로. 앞장서기 좋아하는 산티노 공작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게다가 정보력 하나는 이 제국
에서도 알아주니 자기 세력을 다지기 위한 영혼 없는 선심이었다.
그것도 모르는 산티노 공작은 이미 다음 대공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인 것처럼 룰루랄라, 찢
어진 귀를 해 가지고도 콧노래를 부르며 좋아라 했다.
***
“그렇게 좋으세요?”
유모는 짚이는 데가 있어 마마에게 넌지시 물었다. 표정을 세밀히 살피며. 매의 눈인 유모
를 피해 갈 순 없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마 볼에 다시 보조개가 보였다. 진심으로
좋아하고 계시다는 증거. 유모의 두 눈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벨리타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만 가면 죽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점점 강
해졌다.
소화도 시킬 겸, 시녀들과 함께 넓은 궁정을 거닐었다.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시
작이 좋은 날이었다.
“조금 후에 발츠 옌슨 공자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구름이 많은가, 갑자기 그 좋았던 햇살이 뚝 끊겼다. 정말 만나기 싫은데 안 가면 안 되나?
역시 유모의 얼굴을 보니 방법이 없다. 벨리타의 입으로 먼저 한 약속이라니 대충이라도
시늉은 해야 한다.
후…….
황궁 안 사람도 모자라 밖의 사람도 만나야 하다니.
생판 모르는 남을 만나는 것도 곤욕이었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제3 중정, 아담하게 꾸며 놓은 테이블에 다가온 남자가 너무나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발츠 옌슨. 생긴 건 허여멀거니 좀 생기긴 했지만 웃는 모습이 왠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백수 같아 보였다. 부모 잘 만난 케이스.
“언제나 아름다우십니다. 제 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호강하고 있습니다. 마마.”
애쓴다.
아부 떠느라.
벨리타의 타고난 미모를 모르진 않는다. 사실 빙의하고는 거울을 거의 멀리했다. 가뜩이나
적응되지 않는 상황인데 얼굴까지 낯설고 이상한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지 않아 그동안 피해 왔다.
거울은 안 봐도 이 몸의 잘남은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남자들이 제 앞에서 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심히 느끼했다. 올리브유 한 병을 원샷한 것처럼. 우웩.
올리브유는 몸에나 좋지, 이건 뭐…… 어디 쓸데가 없다.
“그런데 왜 여기서? 마마 침실로 불러 주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은근히 가슴을 내밀며 자신의 울퉁불퉁한 근육을 어필하는 발츠가 정말이지 발칙하게 보
였다. 머리가 텅텅 빈. 이름은 까먹지 않겠다. 발칙한 발츠.
지금도 사방팔방 뻥 뚫린 중정에서 만나자 한 것이, 조금 떨어진 곳에 시녀들이 죽 대기하
고 있는 것이 심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발츠를 보며 벨리타는 고개를 설레설
레 저었다. 원래 이 몸도 문제였지만 이렇게 달라붙는 남자들이 더 문제였다.
“홍차 다 마셨나요?”
뜨거운 걸 주면 그거 마시느라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일부러 미지근한 홍차를 내주었다. 빨
리 끝내고자.
발츠는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도 남자
답게 보이려 절도 있게 끄덕.
티타임은 서막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려 한다고 여긴 발츠는 황후의 침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그럼 안녕히 돌아가세요.”
발츠의 표정이 볼만했다. 벙찐 것도 모자라 찬물 한 양동이를 뒤집어쓴 얼굴이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가 없네요. 그럼.”
가차 없이 휙 몸을 돌려 벨리타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아무 말 못 하고 서 있던 발츠는 멀어지는 황후의 뒷모습에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이건 말
도 안 된다. 여기까지, 이렇게 단독으로 알현할 때까지 1년이나 걸렸다. 자그마치. 그 비위
를 다 맞춰 주며 온갖 아양을 다 떨어 얻어 낸 약속이었는데 이럴 수가. 고작 홍차 한 잔
후딱 마시고 끝나? 이러면 아버지한테 죽는다.
[남자 좋아하는 황후를 꼬셔라. 넌 쓸 만하니 가능할 거다. 황후 뒤 펠론국의 막강한 힘과
우리가 얻을 권력을 위해 네 한 몸 바쳐라.
황후는 황제가 죽으면 펠론국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여왕이 되겠지.
그러니 황후를 임신시켜라.
우리 말 듣는 복속국이니 내 힘써서 네가 여왕의 부군이 되게 해 주마. 네 인생 피는 거다.
그러니 몸에 좋은 거 다 먹고 힘을 길러 이 대업을 이루기 바란다.]
거의 다 되었다고 자신했다. 얼마 전, 자신의 어필에 반은 넘어온 황후가 곁눈으로 자신의
몸을 은밀하게 훑어 내리더니 다리 사이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었다. 그리고는 제 귀에 뜨거
운 입김과 함께 다음번에 곧 다시 만나자고 황후가 속삭여서 온몸이 뻐근할 정도로 희열
에 찼는데. 대업이 곧 이루어지리라 여기고 저 혼자 펄쩍펄쩍 뛰었는데.
그동안 머리가 안 따라 줘 뭘 해도 더뎌 아버지의 구박을 있는 대로 받았지만, 점점 성장하
면서 얼굴과 몸이 봐 줄 만하게 변하자 다시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의 명을 인생 사명
으로 알고 정진했건만, 이렇게 되면 말이 달라진다.
발츠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갔다가는 쓸모없다고 쫓겨날 것
이 뻔하다. 그럴 바엔 내 발로 나가자. 발츠는 서둘러 어디론가로 바삐 걸어가기 시작했다.
***
“펠론국에서 이번 원정에 군대 식량과 물자를 지난번보다 2배로 보낸다는 서신이 도착했
습니다.”
정무실에 앉은 황제는 데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현명해.
미리 알고 이리 먼저 조공을 하니.
벨리타를 살려 준 것이 바로 귀에 들어갔을 것이고 더 잘 부탁한다는 뜻이렷다. 펠론국 왕
은 뭔 죄인가. 딸 하나 있는 것이 저렇게 굴고 사니……. 아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기도 요즘엔 애매해졌다. 예전처럼 남자들 끼고 희희낙락하는 것 같지 않
으니, 갑자기 황후궁이 수녀원이 되었다는 농담이 황궁에 돌고 있으니 말이다.
“폐하?”
데인의 목소리에 황제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집중했다.
“3배로 보내라 하시오.”
데인의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역시 폐하라는 생각에. 그리고는 다른 나라에서 바치는 군
사들과 물자들을 폐하에게 계속해서 읊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 내용을 귀로 들으면서 계속 다른 걸 고민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