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번 관심 대상이 나?
“안으십시오. 여인을.”
황제는 깊은숨을 느릿하게 내쉬었다. 이 말을 하려고 이리 빙빙 돌려 말했나 싶었다. 이렇
게 조심스러워한 이유가 이해되었다.
“몸 상태를 최적화하심이 어떨는지요. 지금은 응축된 에너지가 막혀 있어서…….”
이쯤에서 데인의 짐을 덜어 줘야 하겠다. 더 이상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되도록.
“고상하게도 말하는군. 그냥 정욕도 풀면서 살라고 하면 될 것을.”
데인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새겨듣겠네.”
공손하게 밖으로 나가는 데인을 눈으로 배웅한 황제는 아까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충
신인 데인의 말은 언제나 귀담아듣고 존중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
다. 지금 통일, 신수, 잃어버린 백마 문제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차 터질 지경이었다. 여인이
들어올 자리 같은 건 없다.
사이좋으신 두 분 밑에 자라며 금욕적인 생활이 몸에 밴 황제로서는 마음이 동하지도 않
았다.
그게 신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저 욕정을 푸는 거지.
홀로 남게 되자 다시 무거워지는 황제였다.
***
신기했다. 이 고바 기름이. 처음 산속에서 돌아왔을 때 보았던 그 많은 상처들이 벌써 희미
해졌다. 가벼운 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심했던 상처까지도 많이 옅어졌다. 이 약만큼은
자신이 살던 현대의 것들보다 더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조그만 병에 있던 마지막 한 방울
까지 털어 내 그녀의 다리에 발라 주고 있는 유모가 새삼 더 고마웠다.
“다 썼네요. 다시 만들어야겠어요.”
사 오거나 어디서 받아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든다는 유모의 말에 벨리타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만들어요? 누가요?”
유모는 입술을 쫑 다물며 조금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마마의 상태를 고려해
입술을 풀었다. 정말이지 마마께서 이름 석 자 외의 기억을 모두 다 잃으신 것 같았다.
“제가 만들죠.”
네? 유모가 이걸?
“와. 대단하네요.”
유모가 못 하는 게 없구나. 이런 귀한 것까지 만들 수 있고. 벨리타는 새삼 유모가 더 유능
하게 보였다.
“마마 드시는 약도 전부 제가 만들어요.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잔
병치레를 많이 하셔서.”
벨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모를 쳐다보았다.
“그럼 유모는 약제사 일도 하는 거예요?”
이 세계에서 약제사면 엄청난 재능을 가진 귀족으로 높게 우대받는다. 그런데 저 유모한테
고생이란 고생을 다 시켰으니.
벨리타는 유모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유모 없었으면 어떻게 여기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은인으로 여겨지는 유모 때문에 울컥했다. 저렇게 이 몸을 애지중지 키워 주고 지금도 든
든하게 받쳐 주는 유모에게 더 잘하고 살리라.
“유모. 나 더 잘할게요.”
유모는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제가 더 성심성의껏 모실게요.”
두 사람은 훈훈한 시선을 서로 교환하고 있었다.
***
하루 미뤄졌던 황제와의 점심 식사를 거행하던 벨리타는 처음보다는 음식 맛을 음미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뭐 먹을 땐 건드리지 않는 게 원칙인지 황제가 유유히 식사에만 집중하는 것도 한몫했다.
이런 건 아주 바람직하다.
그래서인가 맛있었다. 스테이크도 맛이 있었고 우아하게 차려진 다른 음식들도 하나같이
맛이 있었다.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아주 맛있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붕대를 푼 황제는 그래도 손바닥 쪽이 지끈 아팠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장
에서는 이보다 더한 상처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까. 다행히 온몸의 통증도 거의
풀려 있었다.
“맛있군. 요리사에게 상을 내려야겠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멀리 떨어져 서 있던 유모만은 알아들었다.
알아보신다. 요리사가 바뀌었다는 것을.
마마가 얼굴이 맛있어서 뽑았던 요리사의 음식은 솔직히 맛이 별로였다. 모양만 근사하게
꾸몄지. 뭔 꽃을 그리 좋아해 그릇마다 꽃으로 장식하는지, 요리 맛을 꽃으로 덮으려는 속
셈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음식인지 꽃밭인지 모르겠던데, 이번엔 아주 마음에 드는군.”
역시 황제 폐하는 예리하시다.
유모인 저가 아무리 요리사를 바꾸자고 해도 우기던 마마셨다. 음식이 맛없어 꽃으로 배
채울 일 있냐고 해도 마다하셨는데 이제는 속이 다 시원해졌다.
사실 황제는 그동안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런 음식을 먹어 주었다. 황궁에서 식사할 일이 별
로 없었고 이런 일은 황후 소관이라 벨리타와 아무것도 엮이지 않으려 한 것도 있었다. 또
한, 전쟁터에서는 이보다 더 못한 음식도 먹는다. 너그러워서 넘어간 것이 아니라 귀찮아
서 그랬다. 그때도 지금도 제국 통일 외엔 모든 것이 하찮았다.
“칼리크. 그 선발 대회…….”
시원한 셔벗을 디저트로 먹으며 황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역시나 벨리타에게는 중요한
주제겠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일이다. 아니, 좀 더 빨리 말할 줄 알았는데 그녀답지 않
게 시간을 끌었다.
“단 1골드도 올려 줄 수 없소.”
아무리 자신을 구슬리려고 해도 절대 어림없다.
이러려고 말을 꺼낸 줄 내 모를 줄 알고. 그동안 다 이걸 목적으로 내 비위를 맞춘 거고.
매년 낭비하던 그 돈이면 병사들에게 빵 한 덩이씩은 더 나눠 줄 수 있었을 것이오.
“그게 아니라 취소하겠습니다.”
뭐?
취소?
이걸 취소하겠다고?
갑자기 말을 바꿨다고 생각한 황제의 두 눈이 조금씩 가늘어졌다.
예산 때문에 시키는 대로 다 했으면서. 그게 통하지 않으니 또 다른 수를 쓰는 건가.
“그럼 50만 골드는 어떻게 할까?”
모자라겠지. 성에 안 차겠지. 아니면 그거라도 다른 유흥에 쓰려고 달라 하겠지.
“필요 없습니다.”
또 의외였다.
“그 돈이면 황도에 저택 몇 채를 소유하고도 남을 돈인데 정말 필요 없소?”
설마.
이런다고 내가 올려 줄 것 같은가. 하!
황제는 여전히 그녀의 낮은 수를 비웃었다.
벨리타는 이것도 저것도 그 대회와 관계된 건 모조리 다 싫었다. 이제 남자와 연관된 일은
생각만으로도 지친다. 대회고 돈이고 다 필요 없다.
“맘대로 쓰세요.”
황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는 벨리타의 토파즈 눈동자를 유
심히 바라보았다.
흠…….
이상하다.
어떤 모사를 꾀하는 눈빛이 아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럼 올해는 넘어가고 내년에 할 생각이오?”
“아뇨. 이젠 계속 안 할 겁니다.”
잠시라도 생각해 보지 않고 확고하게 바로 대답하는 벨리타의 모습이 점점 더 의외였다.
1년 내내 기다리던 최대 유흥 거리를 안 해?
“그건 내년에 가 봐야 알겠지.”
그때 가서 예산 확보한 뒤 거창하고 낯부끄럽게 그 대회를 열 것이 뻔했다.
“그때까지 산다면요.”
이 부분에서 다시 조심스러워진 벨리타를 보며 황제의 두 눈이 잠시 그녀에게서 멈추었다.
아직도 모른다?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는 걸?
그 정도로 멍청이였나 싶어 눈이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영악하고 계산적인 벨리타가 왜
이러나 싶어 황제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 대회는 앞으로 계속 폐지할 겁니다.”
이런.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은 진심이다. 예산을 더 타 내려고 토라진 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도 못 알아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좀 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진 황제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흔들림 없는
묵직한 시선을 계속 고정시키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되면 말이 안 된다. 그동안 왜 자신이 시키는 대로 다 했단 말인가. 예산 때문 아니
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왜? 다리를 주물러 주고 노래를 다 하고, 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왜? 왜? 왜? 그럼 남은 답은 하나다. 하지만 그건 더 말이 안 되는 이유다.
설마…….
그래서 달라졌다고?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저 예쁜 머릿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다.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
린 벨리타의 눈부신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던 황제의 시선이 갑자기 살짝 흔들렸다.
“이만 일어나시지요.”
디저트까지 모두 끝낸 벨리타가 먼저 공손히 청하는 모습에 황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무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홍차 한 잔 더 마실까?”
황제는 벨리타와 바로 헤어지지 않고 왜 다시 붙들었는지 자신도 의아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말을 해 버렸다. 게다가 시종이 뜨거운 홍차를 가지고 오자 이런 말까지 자신이 하
고 있었다.
“황후는 시원한 홍차로 다시 준비해 와라.”
우와. 황제가 기억해 줬어.
그 작게 중얼거리던 말을.
벨리타는 병문안 때 일이 떠올라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처음 그에게 뭔가를 받은
느낌이었다. 간절히 그의 관심을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 건 아닌데도 말이다.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만은 않은 것 같아 이렇게 좋은 것이리라. 황후 자격이 있다는 증명을 제대
로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놓였다.
조금 떨어져 있던 유모는 눈을 잠시 끔뻑거리며 제 눈을 의심했다. 마마의 탐스러운 볼에
폭 파인 보조개가 나타났다.
마마는 특이해서 진심으로 웃을 때만 저 보조개가 나타난다. 마음에 드는 남자들에 둘러싸
여 있을 때만 저 보조개가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 보았다. 폐하 앞에서 저렇게 웃는
것은. 이게 무슨 조화인지. 유모의 고개가 갸웃, 좌우로 여러 번 움직였다.
황제 역시 제 눈을 의심했다.
잘난 홍차 하나 신경 써 줬다고 저 정도로 좋아해?
네가 뭐가 아쉬워서? 남자 꽃밭에 뒹굴던 네가.
아니지.
황후궁에서 남자란 남자는 다 내보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래도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늉은 좀 한다 싶었다. 그래도 과하게 움직였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하
면서 흘려들은 소식이었다. 그것도 지금 다시 떠올려 보았다.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벨리타가 왜 그런 일을 강행했을까? 인생 사는 목적이 그거일 텐
데, 주변 남자들을 다 치워 버리면 누가 남는다고.
아!
설마가 아닌가.
황제의 황금빛 눈동자가 벨리타 앞에서 처음으로 눈에 띄게 흔들렸다.
혹시…… 이번 관심 대상이.
나?
어색한 기분에 홍차를 한 모금 삼키던 황제는 얼굴을 표 나게 찌푸렸다.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