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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7화 (17/130)

17화 안으십시오, 여인을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덜 지루해질까요?”

황제의 두 눈이 좀 전보다 더 커졌다.

나가지 않고 저런 제의를 먼저 한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뭐 좋은 사이라고.

자신을 위해 뭔가 해 주려는 의도로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이젠 겁내지 않고 맞서는 것처

럼도 보였다. 해석하기 나름인데 후자로 기울던 황제는 눈을 점점 가늘게 떴다.

저 미소를 지워야 할 텐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길게 한다. 사실 벨리타에게

이런 미소, 이런 행동이 어울리지 않았다.

“노래해 봐.”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요구에 그녀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노래는…….”

누구 앞에서 노래를 해 본 적이 있던가, 자신이 없었다. 황후 자리 증명이랍시고 별걸 다

시킨다.

“그럼 춤을 추든가.”

“노래할게요.”

춤보다는 노래가 덜 민망할 것 같아 얼른 대답했다.

이래저래 떨리게 하는 건 이 황제의 특기인 것 같았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도 벨리타는

벌써부터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노래 정말 못하는데. 아는 노래도 별로 없고.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벌겋게 달아올랐다.

황제는 둘 다 하지 않고 내뺄 거라 예상했는데 역시 또 뒤집어 버린 벨리타가 도대체 무슨

노래를 할지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황후의 노래를 처음 듣는 사람이 될 거라는 것에 대한 기대가. 그 많은 소문 중에 황후가

노래를 했다는 건 들은 적이 없었다. 남자들에게 노래를 시켰으면 시켰지. 그래도 하나만

은 가상했다. 지금 이런 상태인 자신에게서 흥미를 이끌어 냈다는 건.

벨리타는 대답은 했지만 무슨 노래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프다고 하는데, 그래. 이왕 병문안까지 온 거 눈 딱 감고 뭐라도 하자.

화끈거리는 얼굴로 벨리타는 겨우 입을 떼 노래를 시작했다. 살아남자고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구나~~”

가장 먼저 떠오른 노래, 어렸을 때 불렀던 동요다.

“호박 같은 네 얼굴~ 둥글기도 하구나~~”

차마 황제한테 우습기도 하구나, 라고는 할 수 없어 살짝 가사를 바꿨다. 어쨌건 끝까지 다

불렀다. 부르고 나니 생각보다 길었다. 차라리 산토끼 같은 걸 부를 걸 그랬나 싶었다. 그

건 짧은데. 왜 먼저 생각 못 했나 싶어 후회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민망

해 보기도 처음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벨리타는 손으로 손부채질을 하며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황제가 듣기 싫었는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녀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했다. 그냥 나갈 걸 그랬다.

벨리타의 생각과는 달리 황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노래라는 것보

다 정말로 벨리타가 노래를 했다는 것에.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조금은 알고 싶어졌다.

역시 아직도 예산을 포기 못 했나?

그럼 그렇지.

처음 듣는 노래지만 꼭 저 같은 걸 부른다. 자기가 예쁘다고.

“하나 더 해 봐.”

이래도 내 말을 또 들은 건가? 이쯤 되면 나갈 거라 확신했다. 하녀에게도 시키지 않았던

걸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벨리타도 모를 리 없고.

벨리타는 저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황제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그의 앞에 서서

난감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짧게 끝냈다. 이왕 망가진 거, 하나를 하나 두 개를 하

나 달라질 건 없다. 벨리타는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이야~ 벨리타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이름만 바꿔 불렀다. 이번에는 뻣뻣하게 서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누가 봐도 어색한 율동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벨롱벨롱벨롱벨롱 벨로롱.”

하는 내내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다. 왜 하필 이런 노래가 생각이 난 건지.

휴……. 어쨌든 드디어 끝났다.

뽀통령, 개사해서 미안해.

100m 달리기 한 선수처럼 벨리타는 노래를 끝내고 숨을 헐떡거렸다. 얼마나 쑥스러우면

이렇게 숨이 찰까. 그런데 황제의 표정이 판독 불가였다. 어이없음? 황당? 멀뚱? 모르겠다.

노래를 얼마나 못했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싶어 벨리타는 얼른 뒤돌아 나오려 했다.

푸하하하.

느닷없이 터진 황제의 웃음소리에 벨리타는 펄쩍 뛰며 놀라고 말았다. 이건 비웃음인가 싶

어 그녀의 기분은 저 아래로 뚝 떨어졌다.

하나만 하고 말걸, 아니 그 하나도 하지 말걸.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벨리타는 그냥

웃는 것이 아니라 이 넓은 방이 울리도록 아주 큰 소리로 웃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보며

살짝 입이 툭, 튀어나왔다. 그래도 성의를 보였는데 돌아오는 거라곤 그의 비웃음이었다.

저렇게 웃다 눈물까지 흘리겠다.

황제는 예측할 수 없는 벨리타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도저히 참

을 수가 없었다.

펠론국 노래인가? 엄청 웃겼다. 그것도 율동이라고 어색하게 고개까지 움직이며 노래하던

벨리타의 모습에 눈을 떼질 못했다. 결코, 잘하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그런데 그

런 노래를 너무나 열심히 불렀다. 어제 땀까지 흘리며 자신의 다리를 주물러 줄 때처럼.

분명 산속에서부터 이상해졌다. 달라졌다. 변했다. 최근에는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다. 예

산을 더 받아 내는 것이 이렇게까지 간절한 일인가? 이렇게 흥미롭게 구는 벨리타가 예전

으로 다시 돌아가면 무슨 재미로 사나, 은근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래도 그 노력이 가상했

다. 그러니 시무룩하게 서 있는 벨리타에게 한마디 정도는 해 줘야겠다.

“노는 게 제일 좋겠지. 그대라면.”

이럴 줄 알았다. 중요한 건 다 제쳐 두고 그런 사소한 걸 트집 잡아 괴롭힐 줄 알고 있었는

데도 막상 들으니 힘이 다 빠졌다. 지금 뭐 한 건지 모르겠다. 벨리타는 후회와 자책 사이

에서 오락가락하는 중이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데인은 살면서 이렇게 놀라는 것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예전

에 폐하가 가슴에 큰 상처를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그런데 이

번 건 차원이 다르다.

폐하의 웃음소리를 듣게 되다니. 그것도 저렇게 방이 울릴 정도로 큰 웃음소리를.

지금까지 이 황궁에서 들은 적이 없다. 당장 사서에 기록해야 할 정도로 획기적인 일이었

다. 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옳은 건지, 골몰히 생각하는 데인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은 폐하였기에 더욱더 믿기지 않았다. 밖에서 대기한 이유는 혹시

라도 폐하가 고함이라도 지를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아닌 폐하가 손꼽도록 만

나기 싫어하는 황후를 들여보냈으니 그리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웃음소리라니. 황후가 뭘 어쨌길래. 뭘 하긴 한 모양인데 중요한 건, 폐하에게 황후

가 뭘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왜 바뀌었을까? 이것에 대한 답이 안 나왔다. 황후가

왜? 무슨 이득을 본다고? 폐하와 다정한 부부 놀이를 하고 싶었나? 그게 뭐가 재미있다고.

폐하는 절대 재미있는 분은 아니었다. 무거우면 무거웠지.

황후가 달라진 건 알겠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데인은 계속 심각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만 놓고 보면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건 인

정했다.

폐하가 황후를 맞이하던 그때, 그가 속으로 잠깐 염원해 보았던 상황, 도저히 불가능해 이

내 접었던 그 상황이 지금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데인의 표정은 심각하면서도 어둡

지는 않았다.

***

“원래 뜨거운 홍차만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시무룩한 얼굴로 황후가 나가고 난 뒤, 데인은 조용한 발걸음으로 황제에게 다가갔다. 붕

대를 감은 손으로 찻잔을 들고 차가운 홍차를 마시는 황제의 모습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가 뜨거운 홍차만 마신다는 건 사실이었다. 벨리타를 괴롭히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먹을 만해. 자네도 한 잔 마시게나.”

황제의 입가에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황후가 병문안은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벨롱 벨롱…….”

“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중독성 있는 그 대목을 흥얼거렸다. 희한하게 그 부분이 귀에서 맴돌

았다. 되묻는 데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으로는 그 부분을 떠

올리고 있었다.

“즐거우셨습니까?”

데인의 물음에 황제는 그저 피식,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입니다.”

글쎄. 다행인가?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이제 벨리타가 무슨 일을 벌일지, 어떻게

나올지 가늠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 존재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단순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어서 무슨 소리가 들릴 때마다 늘 예측 가능한 선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무겁게 바닥을 긁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는 것.

그것도 불륜 황후인 벨리타 덕분에.

죽음을 앞둔 사람이 저렇게 변한다는 말을 들어 본 것도 같은데 아직도 죽을까 겁내고 있

는 건가? 설마.

봐도 봐도 신기할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즐거웠다는 건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도 제 앞에

서서 순진한 모습으로 열심히 노래를 하던 벨리타의 모습이 환영처럼 남아 있었다. 다음엔

또 어떤 모습을 보여 주려나.

벨롱벨롱 벨로롱

속으로 중얼거리는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큰 소리

로 웃어 보았다.

“폐하. 신수가 걱정되십니까?”

황제의 입가에 희미하게 걸린 미소를 단숨에 지워 버리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런 말은 데인만이 할 수 있었다.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는 뜻이다.

“선황께서는 거대한 늑대가 25세에 발현되셨습니다.”

그거야 하도 되뇌는 바람에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결혼은 23세 때 하셨고요.”

여기서 왜 결혼 얘기가 나오는지 의아해진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데인과 눈을 마주

쳤다.

“두 분께서는 사이가 아주 좋으셨습니다.”

그건 아들인 자신이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남녀의 합이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너무 멀리하셨습니다.”

“그래서?”

데인답지 않게 서두가 길다. 깔끔한 대화법이 아니었다.

“안으십시오. 여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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