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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6화 (16/130)

16화 누가 왔다고?

반드시 너부터 죽인다. 내가 황제가 되는 날. 바로.

그때, 쿠로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데인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휘이익~ 휘익~ 휙~.

그 휘파람 소리가 정확히 말이 되어 쿠로 귀에 쑤셔 박혔다. 어디 잘해 봐라~.

으악!

여기저기 보이는 시종들만 아니면 악이라도 쓰고 싶었다.

황제나 저놈이나 아주 똑같다. 저를 이렇게 만드는 건.

그러니 붙어 있는 거겠지.

이를 악문 쿠로는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며 주변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시종들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가면을 쓴 채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 몇 걸음 가던 데인은 씨익 한 번 웃고는 다시 돌아가 슬쩍 고개만 내밀어

쿠로가 있는 복도를 힐끗 보았다.

큭큭큭.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여전히 재미있다. 저놈을 골려 먹는 건.

잘 걸어가다 주변 눈치를 보더니 커다란 기둥을 돌아 은근슬쩍 반대로 빠져나가는 쿠로의

뒷모습이 데인을 즐겁게 했다. 폐하가 무서워 다시 황궁을 나가고 있는 쿠로, 역시 소인배

임을 스스로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었다. 계속 제 갈 길을 걸어가는 데인의 입에서 끊겼던

휘파람 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기셨나요?”

벨리타는 자신을 보러 온 데인 브누아 대공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침부터 찾아온 대공 때문에 유모가 또 난리가 났었다. 황후궁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던

대공님이 오셨다고, 황제 폐하에 이어 대공님까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고 난리를 치며 벨리타에게 옷을 갖춰 입혀 주었다.

벨리타 또한 대공이 왜 여길 공식적으로 방문했는지 궁금했는데, 오늘 폐하와 한 점심 약

속을 내일로 미루시길 원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이런 전언은 시종에게 시켜도 될 듯한

데 왜 직접 대공이 찾아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 몸이 안 좋으십니다.”

정말일까?

쇠붙이도 씹어 먹게 생겼는데 정말 어디가 아픈 걸까?

오늘 만나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벨리타로서도 대환영이다. 자신이 아닌 황제가 미뤘으니

까 맘 편히 지내면 그만이다. 그런데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황제가, 무쇠가 울

고 갈 정도로 단단하게 생겨 먹은 황제가 아프다고 하니 조금 걸리긴 했다.

황후 자리에 걸맞게 행동하라 했으니 황제가 아프다는데 얼굴은 비쳐야 하지 않을까.

“저…제가 병문안이라도…….”

데인은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지금 폐하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 식사까지 미룬 상황

에서 병문안이라니. 그것도 황후의 병문안? 말도 안 된다.

다치신 손도 손이지만 폐하의 울적한 마음 상태가 더 걱정되는 지금, 황후를 만나면 어떻

게 될지 상상하기도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거절해야 맞다. 그런데 이상하게

데인의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일이 눈앞에 등장했다. 바로 황후가.

황궁의 모든 소문과 사건들은 데인의 귀에 들어온다. 최근 가장 많이 들린 것은 황후가 이

상해졌다는 소문이었다. 데인은 황후를 그동안 손꼽을 정도로 만났지만 늘 경계 대상이었

다. 사람 하나는 정확히 보는 능력을 가진 데인 눈에 황후는 쿠로와 쌍벽을 이루는 인간 말

종으로 보였다. 이런 사람에게 이 정도의 외모를 주신 걸 보면 신이 실수할 때도 있나 보다

고 여겼다.

그래서 일부러 오늘 자신이 직접 말을 전하러 왔다. 소문의 사실 여부를 두 눈으로 직접 확

인하기 위해서.

결론은.

달라졌다. 황후가.

제일 먼저 눈빛이 달라졌다. 사악한 기운이 사라졌다. 그다음 표정이다. 온화해졌다고 할

까, 부드러워졌다고 할까. 이전보다 훨씬 맑게 보였다. 많은 대화를 주고받진 않았지만 황

후의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희한한 일이다. 황후와 제일 어울리지 않는 말

이 있다면 ‘진심’이다.

안톤은 황후가 아예 폐위되고 더 나은 새 황후를 맞이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데인은 그렇

지는 않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지금의 황후와는 다른 사람을 원한다. 그것이 새로운

사람이건 같은 사람이 개과천선해 달라지건.

황후궁에 남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다.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 황후궁

에 외모가 출중한 시종, 기사, 뭐라 이름을 붙여서라도 고용된 남자들로 득실거린다는 걸.

그러나 오늘 들어오면서 그의 눈에 단 한 명의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저 혼자였다.

이렇게 황후가 구는 것이, 잠깐의 새로운 유희로 끝나는 걸까 아니면 지속되는 걸까……. 그

건 모른다. 어쩌면 황후 자신도 모를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정숙한 여인 흉내를 낼지.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 황후의 말과 행

동은 진짜라는 거다. 무슨 심정 변화를 느껴서 이렇게 확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만

두고 보면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물론 신중하게 좀 더 지켜볼 필요는 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십니다.”

주사위를 던졌다. 뭐가 나올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의 대답에 황후의 표정이 심각해

졌다.

벨리타는 병문안 가 볼 마음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대공이 반대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

다.

하…….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보고 오자.

어디가 아프다고 하니 기운이 없어서라도 자신한테 뭐라 하지 못할 거라고 다독이며 갈

준비를 시작했다.

***

“누가 왔다고?”

시종장이 아닌 데인이 직접 황제 방에 들어와 고했다.

“만나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폐하.”

데인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황제는 가차 없이 돌려보냈을 것이다. 지금 손이 문제가 아니라

온몸이 쑤실 듯 아파 팔을 들 힘조차도 없었다. 실컷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뻐근하고

저려 신경도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어젯밤 안톤을 고생시킨 것이 신경이 쓰였다.

또 발작했다는 걸 아침에 눈을 뜨고 알아차렸다. 안톤이 제 옆에 밤새 서 있던 걸 보고는.

충신에게 이런 일이나 감당하게 한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니 지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절대 아무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충신 데인이 적극적으로 권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지.

황제는 빌로드로 된 가운을 입고 소파에 앉았다. 물론 붕대를 감은 손은 가운 주머니에 꽂

은 채. 벨리타에게 이 꼴을 보일 수는 없다. 이럴 때 오다니 귀찮기만 했다. 그의 지금 심정

이 표정에 나타나도 할 수 없다. 이런 기분일 때 가장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벨리타다.

“이게 뭐지?”

데인이 나가더니 벨리타를 들여보냈다. 먼저 공손히 인사부터 한 것까지는 인내심을 가지

고 참아 볼 만했다. 그런데 그녀가 직접 들고 온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황제는 거친 목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인사만 받고 바로 돌려보내려던 황제는 앞에 차려진 것들

을 사납게 쳐다보았다.

“시원한 홍차입니다.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티타임을 갖자는 건가? 지금 이 상황에? 이걸 마시려면 손을 보여야 하는데?

여러 가지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였다.

“이거 마시고 죽으라고?”

황제는 독이라도 들었는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마치 적을 쳐다보듯 벨리타를 노려보았

다.

황제인 내가 아무나 주는 걸 마신다고? 하물며 네가 준 걸? 널 어떻게 믿고!

언제부터 이런 걸 신경 쓰고 지냈다고. 그냥 하던 대로 가만히 황후궁에나 박혀 있을 일이

지 왜 이리 나돌아다니고 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었다.

꿀꺽꿀꺽.

황제는 어이없는 눈으로 벨리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유리병에서 찻잔에 홍차를 하나

가득 따르고는 그가 보는 앞에서 거침없이 마시는 벨리타를.

탁.

벨리타는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자. 이제 됐죠?”

하! 당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만만하게 쳐다보는

벨리타의 모습이 의외였다. 악한 기운 하나 없이 순수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파란색 눈은

처음 본다.

“독은 마시자마자 바로 안 죽어. 퍼질 시간이 필요하지.”

바로 벨리타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몸은 아파도 입은 살아 있다. 불신 가득한 황제의

눈에 상처 입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지은 죄가 많은 몸이라 하는 수 없었다.

또각또각.

황제의 두 눈이 슬쩍 커졌다. 지금 뭐 하는 건지, 최근 들어 벨리타가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때로는 흥미로웠지만 때로는 놀라기도 했다.

벨리타는 사뿐사뿐 걸어 넓은 황제의 방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황제 앞에 섰다. 물론 적당히

떨어져서, 황제가 팔을 뻗어도 잡히지 않을 거리에 멈춰 섰다.

“멀쩡하죠? 이제 드세요.”

황제는 그녀의 미소가 싫었다. 무슨 장한 일을 했다고 미소까지 짓는지, 그 미소가 환한 햇

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 심히 거슬렸다.

“난 뜨거운 홍차밖에 안 마셔.”

증명해 보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래도 자신은 나름대로 노력 중인데 황제의 목소리는 너

무나 차가웠다.

“전 시원한 홍차 좋아하는데…….”

실망한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인 벨리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말이 정말인지,

저를 면박 주기 위해 하는 말인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고 밀어 내는 것만은 확실했다. 환영받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에게 홀대만, 질타만 받는 것이 속상했다.

그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야 안심하

고 여기서 살아갈 수 있기도 하고. 그래도 한 가지는 발전했다.황제 앞에서 조금 덜 떨고

제대로 쳐다볼 수 있다는 것이.

“지루해.”

저 말은 황제의 버릇인가 보다. 처음 듣는 말이 아니다.

이쯤에서 그만 나가 보라는 소리로 들려 벨리타는 몸을 돌리려다 멈추었다. 자꾸 도망치는

느낌이 싫었다. 은근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원래 이렇게 피하고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

었다. 여기 와서 목숨이 위태로워 그랬지. 게다가 이 세계에서 황제는 가장 무섭고 두렵지

만 가장 불쌍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황제에게 자신은 증명을 해 보여야 하는 사

람이고.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덜 지루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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