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더 이상 소중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구나
그랬던 거야.
그 울음소리.
그럴 리 없다고 가볍게 넘긴 게 자신의 실수였다. 주인인 자신에게 구해 달라고 창문에 부
딪힌 거였다.
쿠로. 이놈!
천인공노한 만행을 저지른 짐승만도 못한 놈.
쿠로의 신수가 분명 자신의 백마를 집어삼켰다. 역대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들어서만
알고 있었지 지금 자신이 이렇게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5대 황제의 신수인 사자가 황궁에서 기르던 살아 있는 사자를 삼킨 뒤 그 힘이 배로 강해
졌다는 설은 들어 알고 있다. 그날, 쿠로의 신수가 전보다 선명해지고 심지어 소리까지 냈
었다. 사라지기까지 시간도 배로 늘었고. 그게 다! 자신의 백마를 삼켜서 그 힘을 얻은 것
이다.
이 사지를 찢어 죽일 놈. 그러나. 증명할 길이 없다. 아무리 확신하는 일이라 해도 아무런
증거가 없다.
신수는 그 주인의 마음을 닮는 법. 쿠로 이놈이 자신을 끔찍이 싫어하니 그 신수도 같은 마
음이 되었을 테고 그러니 백마를 날름 삼켜 버린 것이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놈의 목을 베고 신수에 갇혀 있을 자신의 백마를 꺼내 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힘이 없다.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인 자신이 제 말 하나조차 구해 오지 못한다
는 것에 처음으로 무기력함을 느꼈다.
방법은 단 하나.
자신이 더 강한 신수를 발현시켜 쿠로의 신수를 제압하는 길.
그래야 그 안에 갇힌 백마를 되찾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
이 전혀 없다.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으악!
황제는 괴성을 지르며 주저앉은 채 단단한 땅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주변에서 달려오려는 시종과 기사들을 손으로 제지한 안톤은 참담한 심정으로 황제 곁을
지켰다.
황제는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내가 힘이 없다. 너를 구해 낼 힘이.
그 백마는 태어날 때부터 칼리크와 함께했다. 조그만 망아지부터 애정을 가지고 직접 키워
낸 그의 애마였다.
그런 애마를!
얼마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그의 입 안에서 비릿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몇 번이고 땅
을 내리친 그의 주먹 또한 흙투성이가 된 채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분이 풀리지 않았
다.
자신의 신수는 언제 나오려고 이렇게 사람 피를 말리게 하는지. 신검에 마력을 넣는 힘을
얻었을 때, 그의 뒤로 희미하게 잠깐 보였다던 그 호랑이 신수 말이다.
황제 주변에 있던 안톤과 데인, 그리고 보좌관이 분명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황제 그
자신은 보질 못했다.
자신의 뒤로 아주 스치듯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기에. 혹시 이들이 저를 위해 거짓을 고하
나 의심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다. 하지만 신검을 얻은 이상 믿어 왔다. 믿으려 했다. 곧 발
현될 거라고. 신검이 바로 그 예고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백마를 잡아 삼킨 저놈의 신수만 생각하면 온몸이 터
져 나갈 것만 같았다.
“꼭 죽일 거다. 안톤.”
자신 옆에서 무릎을 꿇고 참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안톤에게 맹세했다.
“네. 폐하. 그 자리에 반드시 저도 있겠습니다.”
비장한 안톤의 목소리가 황제의 마음을 위로했다.
“반드시. 내 백마를 찾아올 것이다.”
말없이 바닥에 엎드리는 안톤의 모습에 조금은 진정된 황제는 입을 열었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일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아무도 잘못한 이 없다 전해라.”
꽉 잠긴 목소리로 모든 이의 죄를 사해 주시는 황제 앞에서 안톤은 더한 충성을 맹세했다.
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바쳐 섬기겠나이다. 황제 폐하.
황제는 그의 말 없는 충성을 뒤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공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
이 너무나 공허했다.
“더 이상 소중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구나.”
황제의 허탈한 목소리가 바닥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으로 황제는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내딛는 땅이 움푹움푹 파일 정
도였다.
***
으…….
폐하가 침대에 누운 채 몸부림치며 끙끙 앓기 시작했다. 폐하 옆을 지키고 있던 안톤은 미
리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바로 폐하 곁으로 달려갔다.
쉬이익.
신검이 날아와 바로 안톤의 목 끝을 날카롭게 겨누었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이것 역시 알고 있다. 신검이 그를 인식하는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을.
웅웅 소리를 내며 위협을 가하던 신검의 넘실거리던 퍼런 불꽃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리
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폐하의 바로 옆으로. 그래도 여전히 세로로 둥둥 떠서 폐하
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검이 통과시킬 자, 이 황궁에서는 안톤과 데인뿐이다.
신검이 떨어지자 안톤은 다시 서둘러 폐하에게 다가갔다. 심한 열병을 앓는 것처럼 폐하의
얼굴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팔다리를 이리저리 마구 움직이며 신음 소리까지 흘리셨다. 갑
갑하다는 듯 몸을 심하게 뒤척이시며 끙끙 앓으셨다.
역시.
오늘 이러실 것 같았다. 그래서 침대 옆을 지키고 있었던 거고.
폐하는 잠이 든 상태다. 하나 이렇게 발작을 할 때면 열이 펄펄 끓고 심하게 몸부림치며 몸
을 떠셨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폐하의 지병이었다. 선황 내외께서 연이어 돌림병에 돌
아가셨을 때도, 쿠로에게서 먼저 신수가 발현된 걸 아셨을 때도 이러셨다. 심적으로 큰 충
격을 받으시면 그날 밤엔 이런 적이 더러 있어 오늘 밤 안톤이 그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
이다.
이럴 땐 절대 억지로 깨우면 안 된다는 보좌관의 말 때문에 안톤은 그저 폐하의 얼굴에 흐
르는 땀을 조심조심 닦아 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괴롭게 끙끙대시는지, 안톤은 폐하 대신 자신이 아팠으면 싶었다. 그렇게 수건이
다 젖을 때까지 폐하의 얼굴을 닦아 냈을 때쯤, 드디어 폐하의 움직임이 약해지기 시작했
다.
몸부림이 잦아들고 거친 숨소리도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자 안톤은 폐하의 몸을 반듯이 눕
혀 드리고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침대 옆에서 신검과 나란히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안톤은 속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꼭 신수가 나타나시기를.
그래서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마시기를.
백마를 다시 찾아오시기를.
그 자리에 묵묵히 선 안톤은 날이 밝도록 움직이지 않고 폐하의 옆을 지켰다.
***
아침부터 데인의 얼굴은 어두웠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톤에게 다 전해 들었다. 안
톤과 데인은 황제를 위한 정보를 항상 공유하며 대책을 마련했다. 믿음과 충성으로 똘똘
뭉친 두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깐 뵌 폐하의 표정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제 앞에서 더 아무렇지 않은 듯 하셨을 수
도 있다. 두 손에 약초를 짓이긴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은 상태라 오늘 하루 정도는 손을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보좌관의 말 때문에 지금 데인이 직접 일을 처리하러 가는 중이
었다. 보좌관이 의원직까지 겸하고 있어 그 어떤 말도 새 나갈 리 없으니 황제께는 여간 다
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그것도 이른 아침부터.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반갑지 않은 인물을 보며 데인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데인은 그냥
아무 말 없이 스쳐 지나갈 생각이었다. 상대방도 같은 생각이길 바랐는데 아닌가 보다.
“황제가 제정신은 아니지? 사생아에게 대공의 자리를 주다니 말야. 내 직접 물어볼까 하는
데.”
“좋은 생각이야. 더 일찍 물어보지 그랬나?”
표정 하나 변함 없이 여유 있는 자세로 바로 말을 받는 데인을 쿠로는 노려보았다. 쿠로 뺨
치는 표정 관리의 대가였다. 저 얼굴을 한 대 쳐 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쿠로의 그런 속마음을 모를 데인이 아니었다. 황제에게 말도 제대로 못 걸면서 신수 하나
발현됐다고 안하무인 격으로 구는 쿠로가 소인배 중의 소인배로 보였다. 같은 가문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데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건방진 데인의 태도는 늘 쿠로 가슴에 불을 질렀다. 열불
이 확 오른 쿠로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얼굴 가득 분노를 드러냈다.
“사생아 주제에.”
데인이 가장 싫어할 말을 비웃음과 함께 시원하게 던졌다.
“내 어머니, 비록 몰락한 가문이지만 엄연히 귀족 영애셨어. 돌아가시고 2년 후 네 어머니
와 재혼하셔서 널 낳은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 사생아라는 말은 이 나라에서 너 하나만
하고 있다. 철딱서니 없게.”
점잖게 미소 짓는 데인의 얼굴에서 방금 쿠로가 던진 비웃음보다 더한 야유가 느껴졌다.
왜 아직도 저놈한테 이런 말을 들으면서 기가 죽는지 쿠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한 번도
말로 이겨 본 적이 없다. 저 건방진 놈에게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다.
“말투가 상당히 건방져. 개나 소나 다 대공이지?”
지나다니는 사람들만 없으면 더한 욕을 날릴 텐데 이 정도밖에 못 하는 것이 원통했다.
“너 개, 나 소?”
데인의 능청스러운 말에 쿠로의 입술이 추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이놈은 어릴 때부터 이랬다. 깐죽의 왕 데인.
“더 해 줘? 나 1 대공, 너 2 대공. 건방지게 구는 건 누굴까나?”
저 입을 확 봉해 버리는 방법이 어디 없나?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쿠로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 넘쳤다. 이놈은 이렇게 간단히 제 가면
을 벗어던지게 만든다. 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아주 사악한 인간이다.
“내가 황제가 되면! 너까짓 거…….”
“잠깐. 네가 황제가 된 후에나 그딴 말 해라. 될 수 있다면 말이지. 내가 지금 아주 바빠. 이
렇게 낭비할 시간 없어서 이만.”
매정하게 돌아서 가는 데인의 멱살이라도 끌고 싶은 쿠로는 보는 이목이 있어 그 자리에
서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네가 그렇게 잘난 척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아참.”
뭔가 잊은 듯 데인이 가다 말고 쿠로를 향해 돌아섰다.
“오늘 황제 폐하 눈에 띄지 마라. 최고로 날카로워 계시니까. 알지? 폐하 성격.”
느물거리는 미소를 끝으로 데인은 뒤돌아서서 경쾌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데인의 뒷모습을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만 보던 쿠로는 미치고 팔딱 돌아 버릴 지경이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