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떻게 그런 일이!
“앞으로는 그런 일로 좋아할 일 없다. 그러니 입 함부로 놀리지 마라.”
네……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한 리자는 저한테까지 이리 다르게 나오시는 마마가 서
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하나.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다. 폐하가 그런 일을 벌이셨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어째서 애꿎은 사람이 죽었다 생각하느냐? 황제 폐하께서 하신 일을 감히 네가 판단을
해? 네 주제를 망각했구나!”
바로 리자의 눈에서 서럽고 억울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화내시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지만, 약삭빠르게 아부를 잘 떨어 그 대상은 단 한 번도 자신이 된 적이 없었다. 그동안
은 화를 내신다기보다 패악질에 더 가까웠는데 지금처럼 무겁고 단단하게, 위엄까지 갖춘
채 호통치는 모습은 처음 본다. 게다가 그 대상이 자신이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마마…….”
꺽꺽 울음소리까지 내며 싹싹 비는 리자의 속은 문드러졌다. 말로는 잘못했다고는 했으나
속으로는 마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앞으로 일주일간 자중하거라. 이 방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며 방을 나서자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시녀들까지 리자를
외면했다. 무척 고소해하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마마가 저 못된 리자만 편애했는데 사실 시녀들 사이에서는 그녀의 평판이 가히
좋지 않았다. 거짓말과 모함을 일삼으며 저 혼자 사랑받으려고 간사한 꾀를 내는 리자였
다. 시녀들 중 여럿 모함을 당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마마께 맞은 시녀도 있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표정이 변한 리자는 자신을 외면하는 시녀들을 오히려 저가 무시하고는
밖으로 팽하니 나가 버렸다.
“마마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먼저 속삭였다. 문은 닫혀 있으나 황후가 들을까 몸을 사리는 행동이었
다.
“솔직히 속이 시원합니다.”
더 작게 속삭이는 말이 그다음을 이었다. 다들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봇물이 터진 듯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바빴다. 그들은 아주 우아하게 리자를 씹어 댔다. 그동안 미운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힌 리자가 이제야 마땅한 대우를 받는 듯해 그들의 얼굴이 한껏 편안해졌다.
***
유모는 마마와 의논할 일이 있어 바삐 들어오다 잠시 멈추어 섰다. 마마가 이젠 다들 좀 쉬
라고 시녀들을 내보내는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유모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성의 없이 마지못해 행동했던 시녀들이었다. 물론 마마의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
을 선에서 눈치껏 그랬다는 말이다.
그동안 마마는 시녀들을 거의 물건 다루듯이 했다. 조금 지나면 또 갈아 치울 대상일 뿐.
조금이라도 흠이 잡히면 빈번하게 바뀌어 나가곤 했다.
그런데 시녀들의 태도가 조금 더 공손해지고 깍듯해졌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유모에게는
긍정적으로 해석되어 얼굴이 조금 더 밝아졌다. 물론 마마가 먼저 달라지셔서 이들도 변한
거지만.
그들이 나가자 유모는 서둘러 마마에게 다가갔다.
“마마. 소식을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내일 점심, 폐하와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한 약속을 좀
미루시는 게 어떨까요?”
하긴. 아무래도 분위기가 살벌할 것이다. 황제의 검이 기사의 목을 쳤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또다시 제 목이 서늘해졌다. 손을 올려 목을 감싼 벨리타는 가늘게 몸을 떨
었다.
황제가 여전히 두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약속을 한
이상 지켜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무섭고 떨리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도망치는 짓은 비겁하
다.
“아니에요. 그대로 할 겁니다.”
더 단단해지셨다. 이번 같은 일은 몸이 아프다거나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약속을 미뤄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부딪치려 하신다.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 유모는 마마에
게 좀 더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마마. 기억이 없으셔서 많이 불편하진 않으세요?”
“유모가 있어서 다행으로 여겨요.”
불편하긴 하다는 소리를 이렇게 돌려 말씀하신다. 언제나 투덜거리고 칭얼거리던 마마가
너무나 의젓하게 성장하고 계시는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뭐 하나라도 불편하면 황후궁을 다 뒤집어 놓는 마마였는데, 기억까지 잃어버린 상황인데
도 이러시다니.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하신 마마가 더 드높이 보였다. 말투도 부드럽게 변
하시고. 어린아이 같던 마마가 하루에 열 살씩 더 성숙해지는 것 같았다.
유모는 마마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 아이’의 일을 지금 말해도 될
지……. 아니다. 좀 더 있다가.
“마마. 시원한 홍차 드시겠어요?”
뭘 부탁하려는 듯한 표정을 짓기에 뭔지 궁금했던 벨리타는 의아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는데. 하지만 유모가 때가 되면 어련히 말해 줄까 싶어 재촉하진 않았다.
벨리타는 홍차를 가지러 방을 나가는 유모를 눈으로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
“다들 몸 사리라 하십시오.”
쿠로는 산티노 공작이 없는 자리에서 두 공작에게 명령했다. 그들이 항상 모이는 옌슨 공
작 소유인 저택에서 이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나고 있었다.
황도 안에 있고 말이 새 나갈 염려 없는 안전한 곳이라 그들은 맘 놓고 이곳에서 모였다.
이제 황제 교체가 반년 후에 일어날 거라 믿는 그들은 최근 들어 더 자주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달이 났다. 그러니 이런 조치는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이 여기저기 심
어 놓은 첩자들이 위험하다. 그들에게 보고받는 정보들이 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
었다.
“우리만 믿으십시오.”
아직은 이들을 포함해 많은 첩자들이 쿠로에게는 쓸모가 있었다.
“산티노 공작은 어떠하던가요?”
“왼쪽 귀가 반쯤 잘려 지금 상태가 말도 못 합니다.”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충격이 컸던 거지요.”
죽을 수도 있었으니 이해는 간다만 이 정도도 감당 못 하는 인물인 줄 지금 처음 알았다.
쿠로의 회색 눈빛이 못마땅하다는 듯 비 오는 어두운 하늘처럼 칙칙하게 점점 탁해졌다.
“병약하기는. 쯧.”
“허허허. 산티노 공작이 좀 그렇죠. 하지만 우린 그런 걱정 마십시오.”
산티노 공작이 없는 틈을 타 자신들의 공을 더 추켜올리려는 이들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좀 묵직하고 강건한 자가 필요했다. 데인과 안톤처럼.
원수 같은 데인이지만 진중한 무게감은 브누아 가문에서도 인정했다. 항상 비교되었던 쿠
로로서는 데인이 어서 빨리 죽어 없어지길 바랐다.
그건 그거고. 데인 같은, 특히 우직한 안톤 같은 사람을 제 편으로 둔 황제가 부러웠다. 표
내진 않았지만. 일당백 하는 사람을 둘이나 가진 황제에게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
낌 정말 더럽게 싫었다. 제 주변은 아무리 둘러봐도 이런 것들만 있다는 것이, 그것도 제일
충신인 사람들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열받았다.
쿠로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이러는 것이 저한테 좋을 건 없다. 오합지졸이긴
하나 쪽수는 이쪽이 많다. 이들의 세력이 있어야 황제가 되고 힘을 얻는다. 역사상 신수를
가지고 황위에 올랐어도 자기 세력이 없어 꼭두각시가 된 사례도 한두 건이 아니다. 그런
황제는 될 마음이 없다. 맘대로 다 휘젓는 황제가 될 생각이었다.
“제가 아주 든든합니다. 두 분이 계셔서.”
적당히 받아 주고 치켜 주고. 쿠로의 칭찬에 두 공작의 눈빛이 더욱더 의기양양하게 변해
갔다.
***
황제는 말을 더 빠르게 달렸다. 날아가듯이 빠르게.
몸에서 열이 다 났다. 심하진 않아도 종종 이럴 때가 있었다. 너무 열이 받아 그런가 싶어
지금도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열받은 그의 머리와 몸을 기분 좋게
식혀 주고 있었다. 힘껏 달리는 쾌감과 몸에 와 닿는 서늘함이 그를 안정되게 만들었다.
근사한 흑마와 한 몸이 되어 내달리는 황제의 모습은 안톤에게 군신 관계를 떠나서 보더
라도 존경심이 우러나올 정도로 최고였다.
황제는 안톤만이 제 옆에서 같이 달릴 수 있게 허락했다. 말 한마디 주고받진 않지만 같이
달리는 이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은 신뢰와 충성을 다지고 있었다.
속 시원히 질주하고 온 황제는 시종의 도움도 받지 않고 흑마에서 능숙하게 내려섰다.
어린 시절부터 말을 너무나 좋아한 황제여서 다들 황제의 신수는 거대한 말일 거라고 점
쳤었다. 하지만 엉뚱한 인물한테 말이 발현되어 황제의 측근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같이 말을 타고 온 안톤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와 다급하게 말을 주고받는 걸 대수
롭지 않게 보며 황제는 빠르게 걸어갔다.
잠시 후, 제 곁으로 안톤이 가까이 오자 가볍게 물었다.
“오늘은 왜 백마가 아니라 흑마로 준비했느냐?”
갑자기 안톤이 침묵했다. 이상함을 느낀 황제는 안톤에게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눈빛을 던
졌다. 안톤의 얼굴빛이 매우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안톤은 방금 시종에게 전해 들은 일에 대해 모든 것을 자신이 떠안기로 결심했다.
“폐하. 백마가 없어졌습니다.”
“뭐라?”
뭐 이런 해괴한 소리가 다 있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자네가 마구간지기도 아닌데 무슨 죄? 자세히 말해 보아라.”
“감쪽같이 없어졌습니다. 아직 못 찾았다고 보고받았습니다.”
황제의 마구간을 철통같이 지켰는데 그 안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런 일은 처음
이라 다들 어리둥절해 온 황궁을 찾았는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다들 죽은 목
숨이라 떨고 있다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죽을죄는 죽을죄다. 황제의 말을 잃어버린 죄. 하지만 말이 지나간 말발굽 자국도 없고 그
큰 백마가 어디 숨어 있을 곳도 없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려 다들 정신을 차릴 수 없
다고 한다.
황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그 백마가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서야…….
그 순간, 황제의 눈동자에 경련이 일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