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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3화 (13/130)

13화 그 입 다물어라

“어떻게?”

황제의 그 한마디 질문에 그 귀족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건 계속 연구를 해 봐야…….”

“다음!”

황제가 바로 말을 끊어 버렸다. 방법도 없는 제안은 아니 함만 못하다. 말로는 누가 못 하

나. 그러고도 여러 제안이 나왔지만 별로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폐하. 한 번도 정복되지 않은 유클로 왕국과의 전쟁을 꼭 하셔야겠습니까?”

왼쪽 줄 테이블에서 심히 거슬리는, 시답지 않은 소리가 나왔다. 입이나 닥치고 있으면 얼

마나 좋을까마는. 그 소리에 왼쪽에 앉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모습이

감히 황제를 질타하는 모양새였다.

가소롭군.

그래도 오른쪽에 앉은 귀족들은 머리라도 썼지, 저쪽은 아예 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백성들에게서 걷은 세금만 축내는 것들. 어딜 가나 저런 것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눈앞에

두고 보려니 황제는 속이 뒤틀렸다.

왼쪽 제일 앞에 앉아 있는 쿠로의 생각은 달랐다. 왼쪽 귀족들은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이

었고 오른쪽은 황제 편이었다. 맞은편을 바라보며, 벌써 줄을 서려 한다고 들었으니 머릿

속으로 몇 명이나 더 이쪽으로 넘어올 건지 계산 중이었다. 비록 지금은 이 자리에 앉아 있

어도 이미 황제가 된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제 폐하. 이제는 통일보다는 신수에 더 집중하시는 편이 옳다고 여깁니다.”

기어코 위험한 폭탄을 왼쪽에서 터트렸다.

아예 작정을 한 발언이었지만 쿠로는 놀랄 이유가 없었다. 바로 산티노 공작의 입에서 나

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 준 산티노 공작이 어여삐 보일 뿐이

었다.

“이제 반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전쟁보다는 신수가 더 중요합니다. 황제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맞습니다. 저희는 지금 조마조마합니다.”

“혹시 신수가 발현될 기미 같은 건 없습니까? 그런 게 있다고 하던데요.”

산티노 공작이 먼저 선공을 때리자 뒤이어 다른 귀족들까지 가세해 점점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건방이 하늘을 찌른다.

이때, 처음 시작한 산티노 공작이 마지막 한 방을 크게 때렸다.

“폐하. 아무리 대륙 통일을 한다 한들 황제 자리를 빼앗기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음 황제에게 제국을 넘기시는 그 쓰라림을 어찌 견뎌 내시려고…….”

쉬익.

순식간에 회의장이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얼어붙어 버렸다. 다소 부산스러웠던

각자의 움직임조차 일절 없었다. 얼마나 심하게 굳어 버렸는지 다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그 무시무시함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심한 건 방금 말을 하다 강제로 멈춰 버린 산티노 공작이었다. 눈도 깜빡거리지 못하

게 만든 황제 때문에 벌어진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황제가 날린 신검이 무시무시하게 날아와 날카로운 검 끝이 산티노 공작 오른쪽 눈알과

종이 한 장 차이도 안 나게 거의 붙은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니 검 끝이

손톱만큼만 움직여도 공작의 눈알이 무참히 찢어질 위기였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다. 그

대로 통과하는 순간, 산티노 공작은 머리통이 터지고 쪼개져 참혹하게 즉사할 것이다.

“폐하… 이 무슨…….”

“닥쳐라!”

간땡이 부은 놈은 어쩔 수 없다. 이 순간에 감히 입을 열다니. 제 일등 공신이 죽을 것 같으

니 부리나케 나선 쿠로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내가 누군지 다들 잊은 것 같군.”

음산한 황제의 목소리가 그들을 끔찍한 공포 속으로 욱여넣었다.

“방금 죽여 달라는 소리로 들렸는데. 아닌가? 산티노 공작?”

산티노 공작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답은커녕 눈도 깜빡거릴 수 없어, 아니 깜빡이

면 바로 검 끝에 찔려 죽을 것 같아 눈에 힘을 주었다. 공작의 허연 흰자에 뻘건 실핏줄이

툭툭 터져 나오고 있었다.

공기마저 다 빠져나간 듯 다른 귀족들조차 숨쉬기가 괴로웠다. 마치 제 눈알에 검 끝이 와

닿아 있는 것처럼 두려웠다.

이마에 맺힌 땀이 목을 타고 줄줄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는 산티노 공작은 검 끝이 파고들

지 않아도 그대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시야가 하얗게 덮어지고 피가 온몸에서 빠져나가

는 듯 얼굴이 백지장으로 변해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비켜라. 너 대신 죽을 놈 있다!”

황제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떨어짐과 동시에 산티노 공작은 마지막 힘을 모아 머리를 옆

으로 비켰다.

휘이익!

산티노 공작의 귀를 스치듯 곧바로 뒤로 날아간 검이 시퍼런 불꽃을 뿜어내며 굳게 닫혀

있는 문으로 돌진했다.

콰쾅.

황제의 신검은 거대한 문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반파시키고도 멈추지 않고 밖으로 날아갔

다.

으악!!!!!

회의장 밖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끔찍하게 울려 퍼지더니 곧이어 쿵 소리가 들려왔다. 숨죽

이고 있는 회의장 안으로 피비린내가 훅 몰려와 여기저기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산티노 공작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는 그대로 실신해 버렸다.

쉬이익.

신검이 다시 돌아오는 소리에 다들 몸서리를 치며 손발을 바들바들 떨었다.

허공에 떠서 황제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신검 끝에서는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웅웅

소리를 내며 황제 앞에 멈춘 신검은 조용히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충신처럼 보였다. 느릿

하게 손을 내밀어 검을 손에 쥔 황제의 두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황궁에 심어 놓은 쥐새끼들. 하나하나 찾아 없애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군.”

황제의 붉은 눈동자는 정확히 쿠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쿠로에게는 이런 상황에서 부릴 배짱 같은 건 없었다. 황제의 눈을 피해 떨떠름하게 고개

를 숙이는 하수만 있을 뿐.

만족스럽게 바뀐 회의장을 둘러보며 황제는 천천히 신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함

부로 입을 놀릴 자 없을 것이다. 다들 왜 미친 황제, 피에 굶주린 황제라 부르는지 망각한

듯해 저것들이 심어 놓은 첩자 하나를 죽여 버렸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어디 감히 황궁에 첩자를 심어 놔! 돼먹지 않은 것들 같으니라고!

비록 아직 신수가 발현되지 않았으나 엄연히 현재 황제는 그, 칼리크였다.

칼리크는 초토화되어 버린 회의장을 뒤로하고 맑은 공기를 쐬기 위해 궁정으로 향했다.

저 멀리 피를 토하고 죽은 기사 한 명을 치우느라 분주한 모습에 황제를 뒤따르던 데인은

잠시 시선을 주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저런 놈은 이 황궁 내에 여전히 많다. 게다가

저놈은 군사 기밀에 손을 대려 했다. 죽을 짓을 저질렀다. 이제 이번 사건으로 쥐새끼들이

활개 치지 못할 것이다.

데인은 안톤이 눈치 빠르게 서둘러 준비한 흑마에 황제가 오르는 걸 지켜보았다. 한바탕

달리고 오실 모양이다. 속 시원하게. 그렇게 모든 일이 시원하게 잘 풀리길 기원하며 데인

은 고개 숙여 황제를 배웅했다.

***

나는 황후다.

황제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몸이다.

이 몸으로 피해 입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이 황궁의 안주인다운 일을.

벨리타는 제 방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자기 암시 중이었다. 황후답게… 황후답게…….

“황후마마, 황후마마. 소식 들으셨어요?”

시녀 하나가 호들갑스럽게 방으로 들어오며 명상 중이던 벨리타를 방해했다. 바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저리 시끄럽게 외치는 소식은 십중팔구 좋은 것이 아니다.

“황제 폐하께서 또 기사 한 명의 모가지를 댕강 치셨습니다. 지금 황궁에 피비린내가 진동

한다 합니다. 오늘 그쪽으로는 가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앗.

모…가지를 댕강?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벨리타는 떨리는 두 손을 무릎 위에서 꼭 쥐었다. 시녀 앞에서 동요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황후로서 자격 상실이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심호흡을 했다.

조금 진정이 되자 앞에서 떠들어 댄 시녀의 표정이 너무 신이 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리자, 입이 가볍고 항상 부산스러웠던 시녀였다.

그런데 살살거리는 표정이 무척 거슬렸다. 아부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표정이다. 이런 끔

찍한 일이 벌어졌다는데 뭐가 저리 신난 건지. 그런 태도를 한눈에 알아본 벨리타는 다소

경계하는 눈빛을 던지며 자신이 황후임을 다시 되새겼다.

리자는 제 말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마마가 이상스러웠다. 황제가 이런 일을 벌일 때

마다 좋아 죽는 마마였는데, 미친 황제답게 군다고 비웃으며 엄청 기분 좋아했는데, 지금

은 가만히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차갑게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마마가 더 좋아할

만한 말을 해야겠다.

“이번에도 검으로 목을 콱 꿰뚫어 죽이셨다 합니다. 피가 얼마나 낭자했는지. 그냥 바닥에

철철… 애꿎은 기사 한 명만 죽어 나갔다 합니다. 왜 그렇게 살생을 밥 먹듯이…….”

“그만해라!”

“네?”

리자는 생각지도 못한 마마의 말에 경솔하게도 되묻고 말았다. 늘 하던 대로 신랄하게 말

한 것뿐인데 마마님이 왜 이러시는지 몰라 순간 굳어 버렸다. 들어 보지도 못한 살벌한 호

통에 잠시 마마님이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만하라 했다. 누구 말에 다시 묻는 것이냐!”

찍소리도 못하고 리자는 입을 바로 닫아 버렸다. 폐하의 안 좋은 소식을 속 시원하게 잘 전

해 준다며 저를 유독 예뻐해 주기만 하셨는데 이렇게 살벌한 호통은 처음이었다. 마치 처

참하게 내쳐지는 기분이었다. 마마께서 저한테 왜 이리 야박하게 하시는지 몰라 리자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마마… 저는 그냥… 마마님 기분 좋으시라고…….”

“그 입 다물어라.”

이제는 매서운 눈빛까지 던지는 마마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파란 토파즈 눈동자에서 서

늘하고 시퍼런 빛이 리자에게 내리꽂혔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그게 왜 기분 좋은 소식이냐?”

“그게… 황제 폐하께서 누굴 죽이신 걸… 제가 자세히 말씀드리면 마마님은 좋아하셔서…….

그동안 그랬겠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이 몸이 달라졌다는 걸 확실히 알려야 한다.

“앞으로는 그런 일로 좋아할 일 없다. 그러니 입 함부로 놀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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