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저랑 잤나요?
3인 중 가장 젊은 산티노 공작이 너무나 위험한 발언을 하자 주변을 살피며 베를루스 공작
이 주의를 주었다. 이건 쿠로를 ‘폐하’라고 부르는 것보다도 훨씬 위험천만한 말이다.
“뭐 어떻습니까. 얼마 안 남았는데요.”
“그래도 이러면 안 되지요. 그러다 목이 달아날 겁니다.”
“전 재산도 다 뺏길 거고요.”
산티노 공작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두 공작에게 말을 뱉었다.
“그 전에 황제 자리를 뺏길 겁니다.”
어허. 이러면 쓰나, 뭐 이러면서도 그들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며 은근 이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쿠로 역시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 지금처럼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가끔씩 이렇게
재미있을 때가 있었다.
“전(前) 황후마마가 그렇게 정숙한 여인이지 않았으면 그런 의심은 누구나 하겠지요.”
옌슨 공작이 정확히 짚어 냈다. 그 점이 그들에게는 매우 씁쓸할 따름이었다.
“아깝습니다. 현 황후 같은 분이었다면 핏줄을 의심하고도 남았을…….”
“쉿!”
산티노 공작의 싼 입을 베를루스 공작이 또다시 막았다.
“아름다우신 황후마마.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너무나 영광이옵니다.”
중정을 가로지르던 황후마마 일행이 눈에 띄자 잰걸음으로 다가간 그들이 거하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나 싶어 바로 못 알아본 점 용서를 구합니다. 황후마마.”
벨리타는 괜히 이 길로 들어섰다고 마구 후회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동안 유모가 마통단 3
인이라 가르쳐 주었다. 아! 그 마통단?
원작에 나와 있던 인물들이라 더 이상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쿠로의 신
수 하나만 믿고 깝죽거리다 전쟁 중, 원작 남주가 이끄는 ‘자칼단’에 끌려가 광대로 전락하
는 인물들이었다.
이 공작 세 명은. 하지만 조금 떨어져 있는 저 쿠로 브누아는 어떻게 되는지 잘 기억이 나
지 않았다. 아무튼 한마디로 이 나라에 암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니 자연 표정이 굳어질 판
인데 그들의 과한 인사와 아부에 속이 다 니글거렸다.
새초롬하게 표정 짓는 벨리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공작들은 계속해서 찬사를 뽑아냈다.
누에는 비단실이나 뽑아내지, 이들은 썩은 내 나는 단어들을 잘도 뽑아냈다.
“참… 황후마마. 잠깐 귀 좀…….”
갑자기 제일 나이 많은 옌슨 공작이 그들에게서 한 발 나서며 벨리타에게 가까이 다가오
려 했다.
“멈추세요.”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에 놀란 옌슨 공작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할 말 있으면 거기서 하세요.”
처음 들어 보는 냉정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에 말없이 보고 있던 쿠로까지도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유모도. 벌써 이런 모습을 두 번째 보고 있다. 가슴이 뿌듯해 절로 어깨가 으쓱 올라
갔다.
“저기… 중요한 말이라…….”
휙!
벨리타는 가차 없이 돌아섰다.
길이 여기뿐이랴. 내가 돌아가면 된다. 똥은 피하는 게 현명한 법.
“마마. 황후마마. 여…기서 하겠습니다.”
저렇게 애원하는데 들어 주기는 해야겠다. 존경까지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지만 지금부
터라도 최소한 욕먹는 황후가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해 보세요.”
쿠로 눈에는 백합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저렇게 말하고 있는 벨리타가 제법 황후처럼 보였
다. 천박한 불륜 황후인데 말이다.
“제 후계자인 발츠 옌슨이 황후마마께서 불러 주시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벨리타는 바로 유모를 쳐다보았다. 이건 어서 알려 달라는 암묵적인 신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유모가 그녀의 귀에 소곤거렸다.
“그렇게 약속하셨어요.”
다시 눈으로 물었다. 이런 약속 깨면 안 돼요? 그러나 벨리타가 눈으로 물은 말에 유모가
고개를 저었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하는 수 없었다.
“조만간 연락이 갈 겁니다. 기다리세요.”
그동안 궁리를 잘하면 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할지.
그 대답만으로도 옌슨 공작이 얼마나 좋아하며 눈을 빛내던지, 뒤에 서 있는 조금 젊어 보
이는 공작의 눈도 느끼하고. 더 이상 이 능구렁이 같은 사람들과 대면하고 있기가 싫어 벨
리타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쿠로 브누아 대공과 눈
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다른 길로 빠르게 걸어가던 벨리타는 살짝 눈가를 찌
푸렸다.
뭐지? 저 눈빛은?
그녀를 싫어하는 눈빛도 아닌,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닌, 묘하게 일렁이는 그 남자의
눈동자가 심히 신경이 쓰였다. 표정도 전혀 읽히지 않았다. 저 남자에 비하면 황제가 차라
리 투명할 정도였다. 난해한 눈빛이 된 벨리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황후궁에서 가급적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정답인 것만 같아 방에 돌아오자마자 유모에게 확인했다.
“제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어요?”
“황후궁에는 오로지 여인들만 있게 했습니다.”
발 빠르게 움직여 주는 유모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이제 그 징글징글한 벨리타의 남자들에
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내일이면 황제 폐하께도 이 사실이 알려질 겁니다.”
벨리타는 그 말에 더 흡족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모는 또 골똘히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를 신경 쓰는 마
마의 모습.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다. 황제 앞에서 다들 벌벌 떨어도 마마는 무서워하기
는커녕 오히려 싫어했다. 황제도 황후 자리도. 그래서 서로 외면하고 살았다. 최근에 불안
정한 모습을 보이긴 했어도 지금까지 죽 그랬다. 그런데 자꾸 이러신다는 건…….
혹시……. 이번엔? 설마.
아니다. 맞는지 아닌지 확신은 없다. 지켜봐야겠다. 더 신중하게.
솔직히 그렇게만 된다면야…….
“유모. 한 가지 더 도와줄 일이 있어요.”
뭐든지요.
“이 몸…… 아니 나와 관계했던 남자들 다 알죠?”
벨리타는 이 몸으로 더 이상 진절머리 나는 일은 접하기 싫었다.
“제일 잘 알죠.”
이젠 빙빙 돌리지도 말고 바로 직구를 때리기로 했다.
“유모. 아까 만난 쿠로 브누아 대공. 저랑 잤나요?”
그 남자의 판독 불가인 눈빛이 의심스러웠다.
“제가 알기론 아니에요. 저 몰래 그랬다면 모를까.”
아직 안심하긴 이르지만, 일단은 다행이다.
“그럼 앞으로 바로바로 알려 줘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에요. 한 사람이라도 그냥 넘
어가지 말고 정확하게.”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직은 확실히 마마가 어떤 방향으로 가려 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안 만날 거예요.”
그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었나 보다. 유모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잠깐
의 변덕으로 이런다 해도 이런 모습 죽어도 못 볼 줄 알았는데 그 소원 하나는 풀었다.
“마마. 공주님이라 부를 때와 전혀 다른 분 같습니다.”
좀 더 이런 모습이 오래 가기를 바라는 유모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래서 이젠 공주님이라 부르지 않는 거예요? 다…른 사람 같아서?”
유모. 난 다른 사람이에요. 예리하게 잘 본 겁니다.
“서운하세요?”
아뇨. 오히려 이 모든 사실을 알면 가장 서운해할 사람은 유모예요. 유모가 애지중지하던
그 벨리타 공주님은 이젠 없어요. 지금은 다른 사람이니 많이 다를 겁니다.
“이제 어리고 철딱서니 없는 공주님에서 벗어나야죠.”
황궁의 안주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겁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마마’를 연거푸 부르며 다가온 유모가 벨리타의 손을 따뜻하게 꼭
쥐었다.
“마마. 저는 항상 마마 편입니다. 믿고 따르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유모를 바라보며 벨리타는 굳게 마음먹었다.
정신 차린 황후의 모습을 보여 주기로.
황제에게 제대로 증명을 해 여기서 살아남기로.
벨리타의 토파즈 눈동자가 더 아름답고 파랗게 반짝이며 유모를 눈 부시게 만들었다.
***
“어서 오시오. 제2 대공.”
회의장에 들어서자마자 쿠로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입술만은 옆으로 벌
려 웃는 표정으로 황제를 대했다. 아.직.은. 황제인 칼리크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오늘 회의에는 제1 대공이 가장 먼저 왔소.”
그만! 쿠로는 고함을 지르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느라 이를 악물었다. 신기하게도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역시 표정 관리의 대가다웠다.
저렇게 강조하듯 부르는 황제의 저의가 뻔했다. 누굴 더 아끼고 인정하는지 적나라하게 알
리고 있다. 황제가 된 이후, 쿠로에게 대공 작위를 내린 것까지는 좋았다.
당연한 수순이었고 마땅한 자리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공이 한 명 더 있다고 했다. 그게
바로 데인. 두 대공의 성이 같기 때문에 브누아 대공이라 하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혼
란스럽다며 저렇게 부르기 시작한 황제. 귀족 회의에서 세 공작과 상위 귀족 일부가 추천
한 쿠로를 마냥 거절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억지로 대공 자리를 주긴 주겠는데 황제 자신
이 정말로 마음에 둔 대공은 데인이라고 아예 선언하고 다니는 셈이었다. 제1 대공이라 칭
하며.
열받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다. 농간을 부리는 황제 저 존재 자체부터가 눈엣가시다. 하지
만 칼자루는 자신이 쥐었다. 신수가 발현되기 전에는 이보다 더 치욕스러워 머리통이 터져
나갈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이 악물고 시간만 벌면 된다.
이까짓 대공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원래 대공은 이 나라에 한 사람이어야 맞
는데 허수아비처럼 세워 둔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황제 자리가
떨어질 판인데 이런 시시한 대공 자리가 뭐가 중하다고. 면전에서, 귀족들 앞에서 황제가
몇 년째 저렇게 부르니 그 순간만큼은 열받는 것뿐이었다.
황제를 중심으로 나란히 길게 놓인 테이블에 각각 10명씩 앉아 있는 귀족들은 저마다 의
견들을 내놓고 있었다. 오늘 회의는 유클로 왕국과의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사막을 통과하려면 식수 확보가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특수한 물주머니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떠할까 제안드립니다.”
오른쪽 줄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귀족 누군가가 제법 쓸 만한 제안을 던졌다.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