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날 뭘로 보고!
사람을 홀린다고 하더니 나까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하게 풍기는 꽃 내음도 한몫했다. 이러는 자신이 심히 못마땅했
다.
이러면 여느 남자들과 다를 게 뭔가. 늘 어딘가 사악한 기운이 맴돌던 여자였는데. 어쩌다
스쳐 지나갈 때도 자신을 보는 시선에 늘 찬바람이 쌩쌩 불던 그 여자와 동일 인물인데. 하
대하듯이 비웃음만 가득 담고서. 지금은 왜 이렇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건지 의아
해졌다.
그동안 그녀가 남자 문제로 얼마나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렸는가. 그냥 귀를 닫고 사는 게
편해 없는 사람 취급했는데. 그렇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 그만이었다.
최근 아무리 죽인다고 협박처럼 얘기했다 해도 에무르와 마찬가지로 지금 죽이기에는 애
매해졌다. 애초에 죽일 거였으면 현장에서 둘 다 즉시 처형했어야 명분이 선다.
계속 마음에 안 들게 굴면 죽여 버려도 그만이지만, 오히려 이번 일을 눈감아 준 걸 빌미로
펠론국에게서 이권을 더 따내는 것이 낫다.
어차피 펠론국은 복속국이니 괜한 분쟁을 만드는 대신 물자를 더 공급받아 유클로 왕국에
집중하는 것이 이득이다.
아무리 벨리타라도 이 정도 정세는 모르지 않을 터. 지금에 와서 자신이 그녀를 죽이리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슬슬 예전처럼 펠론국을 등에 업고 오만하게 굴 줄 알
았는데…….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구는 거지?
아!
그건가?
미스터 카르탄 선발 대회. 그거밖에 없다. 대역죄를 저질러 놨으니 예산을 줄여도 반발하
지는 못하고 이런 수를 쓰는 건가. 이렇게 자신을 구슬려서 예산을 더 받아 내려는 속셈.
그래서 잠깐 자신도 홀렸는지 모른다. 그동안 다른 남자들에게는 이 방법이 통했는지 모르
겠지만 어림없다.
날 뭘로 보고!
저 조그만 머리통으로 참 가지가지 간계를 꾸민다.
“당신 뜻대로 안 될 거요.”
칼리크의 목소리는 얼음장같이 차디차고 날카로웠다.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당황한 벨리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태도가 싸늘해진 그가 야속했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 하긴, 이 정도
가지고 불륜 황후 벨리타의 업보가 덮어지진 않겠지만 맥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도
사람인지라 우울해졌다.
칼리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녀 역시 엉거주춤 일어났다. 갑자기 어색해진 공기가
그녀를 또다시 숨 막히게 했다.
저 멀리 있던 시종이 쪼르륵 뛰어와 다시 러그를 둥글게 말고 있었다.
“버려라.”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저렇게 고급스럽고 새것 같은 걸 버리라고 하는 황제의 속을 알 것 같았다. 이 몸이 앉은
거라 그런 거다. 벨리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야 할거요.”
벨리타에게는 칼리크의 말이 협박으로 들렸다. 내일도 이런 식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
른다는 협박.
싸늘하게 뒤돌아 멀어져 가는 칼리크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벨리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시녀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무
거운 걸음으로 황후궁으로 돌아갔다.
뒤따르던 시녀와 하녀들은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황후마마의 행동에 서로 눈짓하며 몸을
사렸다. 언제나 시끄럽게 쫑알쫑알 새처럼 말이 많던 황후가 말이 없어졌다. 혹 저러다 또
확 뒤집어 놓는 건 아닌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그들은 긴장한 채 황후의 뒤를 조
용히 따라갔다.
***
히이잉~.
귀족 회의를 위해 옷을 갈아입던 황제의 귀에 말 울음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창밖 중정
에서 나는 소리로 추정된다. 자신의 백마(白馬) 울음소리와 비슷하게 들렸지만 지금 중정
에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더는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3층인 황제의 방 창문을
희뿌연 것이 쿵, 치며 휙 지나갔다.
“잠깐 멈춰라.”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시종들을 제지한 뒤, 황제는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갔다. 이곳이
황제의 공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감히. 미완성 신수를 들이대!
스치고 지나간 것이 뭔지, 누가 그랬는지 이미 다 알고 움직인 황제였다.
궁정 가장 탁 트인 안뜰에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저놈.
아직 선명하지 않는데도 신수인 말을 발현시켜 다들 보라는 듯이 허공을 달리게 하는 저
놈.
아직 망아지 정도밖에 안 되는 말을 일부러 창문을 스치듯 달리게 만든 저놈.
쿠로 브누아.
황제인 그를 겨냥해서 신수를 날린 오만방자한 놈.
무슨 동물 키우기도 아니고, 어미 말이 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얼마나 유세를 떠는지 가관
이었다. 신수가 발현된 황족은 이 나라에서 절대적으로 보호받는다.
황제가 될 유력 인물이기에. 그러니 마음대로 죽일 수도 없다. 신수의 보호 아래, 병에 걸
려 죽는 것 외에는 장수한다.
물론 더 강한 신수를 가진 황족에게는 예외다. 신수를 발현시킨 자가 황제가 되지만 한 사
람이 아닐 경우, 가장 힘 있는 신수를 발현시킨 자가 황제가 된다.
대부분 황태자의 신수가 가장 강했다.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 외
황족에게서 신수가 발현되는 일도 극히 드물었고. 지금까지는 그랬다.
“폐하. 원래 신수가 저렇게 작아도 되는지요?”
옆에서 자신을 오랫동안 보필하던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맞는 말이다. 신수는 보통 동물 크기보다 몇 배가 크다. 선대의 신수, 검은 늑대도 사람 10
명은 태우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였다. 하나, 지금 보좌관의 말은 그를 위해 던진 말이기도
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희미하기도 하고 크기도 작고. 얼마든지 비웃음을 날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저놈은 망아
지라도 발현시켰다. 아무것도 발현시키지 못한 황제가 이러쿵저러쿵 뭐라 하겠는가.
넓은 궁정 하늘을 겅중겅중 달리던 희미한 망아지 신수의 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마지막으
로 신수가 제 주인인 쿠로 등 뒤로 들어가듯 사라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던 황제를
위해, 지상에 있던 쿠로가 염장을 지르기 위해 기사처럼 모자를 벗어 인사를 했다. 마치 무
대 위에서 배우가 관중들을 위해 절을 하듯 허리를 굽혔다.
황제를 향해 정식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황제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고 붉은빛이 도는 눈
동자가 무섭도록 선명해졌다.
***
“보셨지요? 창문에 딱 붙어 있는 황제 말입니다.”
“봤지요. 하하하. 눈을 못 떼고 있던데요.”
“아마 간이 쪼그라들었을 겁니다.”
마통단 3인의 황제 험담은 변함이 없었다.
옆에서 가만히 들으며 걷는 쿠로 역시 듣기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우리 대공님 신수가 나날이 발전합니다.”
“암요. 지난번보다 훨씬 오래 발현되었고요.”
“가장 중요한 건. 말 울음소리까지 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맞아요. 그 우렁찬 소리. 점점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대공님. 축하드리옵니다.”
그들의 지나친 찬사를 은근히 즐기던 쿠로는 입술만 비스듬히 치켜올려 화답했다. 이들에
겐 묵직하게 나가는 것이 이롭다. 제 성격대로 했다가는 이들의 지지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 위험한 일을 저지를 멍청이는 아니다. 제 자리 위험한 줄도 모르고,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황제 노릇을 하는 칼리크가 멍청이다.
사실, 신수가 나올 조짐이 보여 그때마다 치르던 의식을 치른 뒤, 있는 힘껏 발현시켰는데
지난번과 비슷한 상태의 말 모습인 신수가 튀어나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잠깐 어디론가 달려갔다 온 신수가 더 선명해졌
고 울음소리까지 냈다. 그 희열 그대로 황궁 중정으로 뛰어가 황제에게 보란 듯이 무대를
꾸몄다. 이렇게만 계속된다면야. 쿠로는 벌써 황제가 된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때, 그들 앞으로 황제의 최측근 데인 브누아 대공과 근위대장 안톤 세드릭 경이 지나가
다 발을 멈추어 인사를 했다. 지위가 낮은 안톤과 3인의 공작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
지만 쿠로와 데인은 그대로 눈을 마주쳤다. 쨍, 하고 유리 긁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두 사
람의 시선은 살벌하게 부딪혔다.
쿠로 브누아.
데인 브누아.
배다른 형제다. 물론 쿠로 쪽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쿠로 쪽에서는 데인을 사생아라
손가락질했고 똑같이 브누아 성을 쓰는 것조차 이 갈리게 혐오스러워했다.
이 나라의 대공인 두 사람. 한 집안에 두 사람의 대공이 나오는 건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것이 황제의 계략이라는 건 모든 사람이 다 안다.
잠깐의 스침이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두 사람이 지나갔군요.”
“쫓겨날 황제를 받드는 멍청이들 말입니까?”
데인과 안톤의 뒷모습을 잠시 보던 이들이 근질근질한 입을 열어 또다시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우리처럼 진짜를 모셔야죠. 저 두 사람이 그저 안쓰럽습니다.”
“우리 대공님이 황제가 되시는 날, 저 두 사람은 이슬로 사라질 운명이라니. 너무나 불쌍해
눈 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공작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연극배우가 되었을 것이다. 입에 담는
말들이 마치 무대 위에서 읊는 대사처럼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 맛에 취해 있는 중독
자들처럼 자신들이 멋들어지게 말을 잘하고 있다 착각하는 유형이었다.
“저런 것들은 상대하지 말고 우리 대공님 칭송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그럼요. 신수 발현되기는 물 건너간 황제가 불쌍합니다. 황제 자리는 하늘이 정해 주는 거
니까요.”
“이미 결정은 다 난 것 아니겠습니까? 폐하.”
이들의 장단에 맞장구를 쳐 주는 역할은 확실히 하는 쿠로였다.
“어허. 지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부르는 건 아직 이릅니다.”
위엄 있게 한마디는 해 줘야 했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
위험하고도 짜릿한 호칭을 아직은 속으로만 좋아했다.
“조심스럽게 거론해 봅니다. 황제가 정말 전 황제의 자손일까요? 신수가 이리 속을 썩이니
의심이 들 수밖에요. 당연히 나타나도 벌써 나타나야 했는데.”
“큰일 날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