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0화 (10/130)

10화 허벅지 안쪽은 그만 만지지?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싹 다 내보내세요.”

“그럼 다시 뽑으시게요? 대회를 열지 않으면 후보자들이 이젠 없는데…….”

“아니에요. 대회도 없앨 거예요.”

“너무 다 없애고 계세요.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하세요.”

늘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는 공주님이라 그 뒷수습은 언제나 유모 몫이었다.

“제 말대로 해 주세요. 오늘부터 이 황후궁에는 남자들 금지예요. 공적인 방문 외에는 아무

도 들이지 마세요. 명령이에요.”

이 몸으로 빙의해서 원망만 하고 도망만 치려 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 황제와 약속

한 대로 황후 자리에 어울리게 해야 한다. 모르는 건 배우면 된다. 최소한 제정신 차린 황

후라는 소리만이라도 들어야겠다. 다들 이상하게 여겨도 이젠 할 수 없다. 일단은 내가 살

고 봐야 한다.

“알았어요. 명령대로 할게요.”

유모는 공주님이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 몰라 황후궁에 있던 시종들을 잠시 휴가라도 줘

여기에서 나가 있으라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럼 요리사만 빼고 다 내보낼게요.”

“요리사는 왜 빼요?”

지난번 입으로 먹여 주려고 하던 그 요리사가 자연 떠올랐다. 바로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

졌다.

“공주님이 절대로 그 요리사만은 내보내지 않는다 하셨어요.”

“그렇게 뛰어나요?”

요리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면 그런 말까지 다 했나 싶어 유모에게 물었다. 너무 긴장한 탓

에 지난번 황제와의 식사 때 먹은 음식 맛이 어땠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요. 뛰어나죠. 그러니 공주님이 매일 불렀고요.”

매일 그 요리사의 음식을 먹었다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 이쯤은 알아듣는다.

“요리사도 내보내요.”

“공주님? 그 요리사는 얼굴이 맛있어서 절대 안 내보낸다고…….”

“그만.”

더 이상 벨리타의 남자들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다.

“유모. 이제 내가 말하면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대로 해 줘요.”

유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공주님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좀처럼 볼 수 없었

던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늘 응석만 부리고 떼쓰던 어린아이 같던 모습이 아니었다.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공주

님을 보는 것 같아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유모가 바라고 바라던 모습이었다.

비록 며칠 못 가고 다시 변덕을 부리더라도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

도 뿌듯했다. 지금만큼은 어린 공주님이 아니라 황후마마처럼 보였다.

“받들겠습니다. 공ㅈ… 마마.”

유모는 뒷걸음질로 황후의 방을 빠져나오며 미소를 지었다. 공주님이라 부르지 않으면 불

벼락이 떨어지던 분이 지금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까지 지으셨다. 성장하신 건가.

그렇다고 믿고 싶어진 유모는 조금 더 이 상태가 유지되기를 간절히 빌어 보았다.

***

“언제까지 이렇게 걸어야 하지?”

끝이 가늠되지 않는 넓디넓은 황궁 정원을 황제와 나란히 걷던 벨리타는 흠칫 놀라 멈추

어 섰다. 하루에 한 번 만나러 오라 해서 유모가 보좌관에게 청을 넣어 황제를 만난 것이

이 궁정 안 호숫가였다. 딱히 할 말도 없고 어색하기만 한 벨리타는 산책하듯 궁정을 말없

이 걸었다.

물론 황제도 그녀를 따라. 날씨가 너무 좋기에 산책을 결정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후의 자격을 증명하려 하는 중이라 해도 이 황제 앞에서는

여전히 떨리기만 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보이던 황제가 이내 흥미가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이 산책을 거부하고

나섰다. 하긴, 벨리타 역시 이런 산책이 재미없었다. 같이 있는 사람이 불편하니 뭐 하나

만끽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따사로운 햇살도, 지저귀는 새소리도, 신선한 나무 내음도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사막을 걷나 여길 걷나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럼 여기서 이만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가시겠어요?”

황제는 아주 잠시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 요즘 들어 처음으로 제 앞에서 말을 더듬지 않

는 벨리타를. 눈에 띄게 떨지도 않고 어제보다 차분해진 벨리타를. 제 앞에서 떨지 않고 있

으니 재미가 떨어져야 맞는데 이상하게 이것 또한 흥미로웠다.

새로 재미있는 걸 발견했는데 뭐 하러 일찍 헤어지나. 황제는 손을 들어 저 멀리 뒤에서 따

라오던 시종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빠르게 달려온 시종이 내내 들고 있던 걸 잔디 위

에 곱게 펼쳐 깔았다. 금사로 만든 원형 러그 카펫이었다.

그러나 벨리타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이런 준비성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칭찬도 해 줄 수

없었다. 이러면 더 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먼저 편안하게 자리 잡고 앉은 황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뻘쭘하게 서 있는 벨

리타에게 툭, 한마디 던졌다.

“내 다리를 혹사시켰으니 어디 한번 풀어 보시오.”

수수께끼를 풀어 보라는 건 절대 아닐 거고, 다리를 주물러 보라는 소리라는 걸 바로 알아

차렸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나 너무나 재미있어하는 황제의 표정을 보며 마음을 굳게 먹었

다. 그래 하자. 못 할 건 없다. 지금 그에게 목숨을 잡히고 있는데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해

줄 거다. 그리고 또 하나.

원작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어 이 몸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 눈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는 이 황제도 얼마 안 있어 죽는다.

이 땅에서 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원작 본 스토리가 시작되니까. 어떤 식으로든 원작대로

흘러갈 것이다. 시기만 잠시 늦춰졌을 뿐. 혹 자신이 죽지 않고 산다면 펠론국으로 도망치

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벨리타가 살아 있으니 평화주의자 펠론 국왕이 로카 왕국하고 손을 잡지 않

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땅에 전쟁은 반드시 터질 것이다. 그 야욕스러운 로카 왕국이 어느

나라하고라도 손을 잡고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원작 남주와 여주가 전쟁 속에

서 만나게 되니까.

벨리타는 살 수 있는 길이 없진 않다. 황제 손에 죽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이 황제는 빼도

박도 못한다. 제국 통일에 실패하고 신수마저 발현되지 않아 미쳐 돌아 버린 황제는 폭군

에서 광군(狂君)이 되어 서른이 되기 직전, 일주일을 앞두고 그 전쟁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물론 전쟁에서 죽지 않아도 서른이 지나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날 운명이었다. 그

러니 어쩌면 이 소설 속에서 자신보다 더 불쌍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오호.

황제는 속으로 작은 감탄을 하고 말았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그녀가 신기할뿐더러 얌전

히 제 옆에 앉아 조물조물 다리를 주무르는 솜씨가 일류급이었다. 전혀 다리가 아프지 않

았는데도 그녀의 손길에 점점 시원해지고 있었다.

근육으로 단단한 황제의 다리는 길기도 길었다. 곧게 뻗은 다리는 튼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이런 다리가 고작 그걸 걸었다고 아플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벨리타는 군

말 없이 열심히 그의 다리를 주물렀다.

손가락이 아플 때까지. 아니 두 팔이 뻐근해질 때까지.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황제가 저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더 오래 시킬 거라는 것도 안다. 그냥 묵묵히 일하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

황제의 고개가 옆으로 슬쩍 기울어졌다.

이것 봐라.

팔이 저릴 만도 한데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계속 제 다리를 주무르는 벨리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은빛 도는 머리카락에 햇살이 부서지듯 내려앉아 아름답게 반짝거

렸다. 마치 보석 루비처럼. 제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그녀의 가늘고 하얀 손과 살짝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황제는 감상할 맛은 있다 여겼다. 그녀의 외모까지 부정하

진 않는다.

어라?

이마에 반짝이는 저것은.

땀?

곱게 뒤로 땋아 내린 그녀의 머리끝이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는 걸 즐기듯 바라보

다 머리카락을 따라 시선을 이마까지 올렸더니 그 끝이 물기로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잘하면 흘러내릴 정도였다.

천하의 벨리타가, 그것도 그렇게 지랄 맞던 벨리타가 궁정 한가운데서 제 다리를 주무르느

라 땀을 흘린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슬슬 그만두게 해야겠다.

“허벅지 안쪽은 그만 만지지? 더 들어가면 위험할 텐데?”

그의 말에 흠칫 놀란 벨리타는 얼른 손을 뗐다. 아무 생각 없이 주무르다 보니 그의 허벅지

안쪽을 열심히 만져 대고 있던 꼴이 돼 버렸다. 그 안쪽은… 손가락 하나 차이로 그의 중요

한 부분이 있는 부위였다. 큰일 날 뻔했다.

후….

벨리타는 숨도 차고 땀도 나서 한숨 돌리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시키는 대로 아주 잘하네. 짜증도 안 부리고.”

자꾸 그녀를 도발하기 위해 황제가 비꼬고 있다는 것도 안다. 넘어가지 않을 거다.

“이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어요.”

일단 당신 눈 밖에 나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왜?”

황제의 질문이 느닷없어 뭐라 답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부부니까요.”

사실 죽기 싫어 일단 잘 보이려는 거지만, 부부니까 서로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여겼

다. 벨리타는 그래도 무난하게 대화를 해 나가고 있는 자신이 기특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

졌다.

황제의 눈에는 자신을 향해 벨리타가 환하게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보는 미소 띤 벨리타의 얼굴.

이렇게 순수하게 웃을 줄도 아는 여자였던가.

갑자기 심장이 쿵, 뛰었다. 천사 같은 외모라 칭송하더니 그의 눈에도 순간적으로 햇살을

타고 내려앉은 천사처럼 보였다.

어?

벨리타는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그의 손이 다가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이러나 싶어

긴장한 채 있었더니 그의 손이. 글쎄. 저의 이마를 쓰윽 문지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왜… 이런 행동을?

전혀 예측 못 한 그의 행동에 벨리타는 펄쩍 놀라며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무 황

제 앞에서 빌빌거린 것 같아 의연하게 대처하려 마음먹었는데 그가 순식간에 손가락 하나

로 흩트려 놓았다. 아주 간단하게.

황제 칼리크는 제 손가락에 묻어 있는 물기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벨리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스윽 거두고 있었다.

사람을 홀린다고 하더니 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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