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황제는 가슴에 깊게 파인 흉터가 눈에 보이자 찌푸렸던 표정을 폈다. 전쟁에서 얻은 승리
가 결코 쉽게 얻은 것은 아니었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 그런 기나긴 대장정이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다.
25살에 황위를 물려받자마자 그는 오로지 대륙 통일에 전념했다. 바로 가장 비옥하고 평
화로운 나라 펠론 왕국은 자국의 안전을 요구하며 무혈 복속국이 되었다.
군사 강대국인 카르탄 제국이기에 전쟁을 택하지 않은, 백성들을 단 한 명이라도 희생시키
지 않으려는 펠론국의 왕, 그를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라 간의 군신 관계
를 확고히 하고자 펠론국의 공주를 황후로 맞이하게 되었다.
큰 사고만 안 쳤으면 아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로카 왕국 왕자하고 도망을 치다니! 아주
개망나니를 황궁에 들여놓은 꼴이 되었다.
[첫날밤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신 후에 치르고 싶어요.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천사 같은 외모로 그리 말해 왔다. 어차피 여인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아무래도 좋았고 이
후로도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당시 그는 대륙 통일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소닉 왕국을 점령하고 다시 돌아온 것은 그
후 1년이 지난 뒤였다. 돌아오자마자 들려오는 해괴하고 추잡한 소문들,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러운 황후의 염문들.
온갖 남자들이 다 홀릴 정도로 그녀의 외모가 대단하다는 건 인정. 하지만 단지 그뿐.
쌓은 정 하나 없는 남남인 상태에서 황제는 무시를 택했다. 벨리타에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펠론국과의 관계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벨리타 역시 그를 똑같이
대했다.
황후가 뭘 하든지 말든지 그는 세 개의 동맹국으로 결성된 데상 연합국을 점령하러 다시
원정을 떠났고 1년 후 승리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다음 해에는 렉서 왕국을. 그렇게 하나
하나 목표로 삼은 국가들을 점령하고 이제 유클로 왕국 하나 남았다. 지금은 작전을 짜고
군사를 모으기 위해 황궁에 머물고 있지만.
그의 나이 스물아홉. 몇 달 후 서른 살이 된다.
서른 살!
황제의 눈동자가 점점 붉은 빛으로 변해 갔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신수가 발현되어야 한
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 자리도 빼앗기게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25세에 검은 늑대가 발
현됐고 그 선대도 그 나이쯤 거대한 곰이 발현됐다. 역대 황제들은 모두가 25살을 넘기기
전 당연하다는 듯이 신수가 나타났다.
그런데 왜?
지금 자신은 아직도 발현이 안 되고 있는지.
다행히도 2년 전, 검에 마력을 깃들게 하는 힘이 생겼다. 그것마저도 없었다면 미쳐 돌아
버렸을지도. 그 힘은 신수가 나오기 전, 발현되는 힘이었다.
[서른까지 신수가 발현된 황족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
이 더러운 국법 때문에 황제의 머리는 늘 무겁고 어두웠다. 이제 서른이 코앞으로 다가오
니 더 그랬다. 이른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어도 신수가 발현되지 않으면 서른이 넘어
박탈당하고 신수가 발현된 다른 황족에게 제위가 넘어간다.
아직 시간은 있다.
난 이 나라 황제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특히, 미완성이긴 해도 신수인 백마를 먼저 발현시
킨 쿠로 브누아에게는. 건방지게 쿠로를 중심으로 뭉친 마통단의 손에는 절대 뺏기지 않는
다.
이들은 이 나라를 팔아먹고 말 놈들이다. 특히 섬나라 로카 왕국같이 이 대륙을 호시탐탐
노리는 다른 나라에게.
황제의 붉은 눈동자가 점점 더 시뻘겋게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 당당하게 세
워져 있는 검에서 웅웅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감정 파동을 감지하는 검이 이 순간만큼
은 마치 살아 있는 형제처럼 느껴졌다.
옆에서 울리는 웅웅 소리를 듣고 있자니 심장이 쿵쿵 뛰던 벨리타가 또다시 떠올랐다. 말
도 더듬고 얼굴도 벌겋고 눈도 못 마주치고…….
가만.
[사랑하는 사이라면… 아니, 남자라면 누구나 쳐다만 봐도 가슴이 막 뛰고 몸이 달아올라야
정상이지.]
분명 벨리타를 쳐다보면 에무르가 저렇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왜 벨리타가 에무르처럼 굴었지? 내 앞에서?
뭐지?
황제는 아무리 벨리타를 보고 있어도 심장 한번 두근거리지 않았다. 멀쩡했다. 그것이 마
음에 들어 벨리타의 상태는 주의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음…….
무슨 꿍꿍이인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황제의 검붉어진 눈동자가 서서히 황금빛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
기분 전환은 제대로 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온실 속에서 아예 꽃 속에 파묻혀 있었더니
제법 힐링이 되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신기한 꽃들이 얼마나 많은지. 벨리타는 제 방보다
여기가 더 편안하고 안정이 되었다.
“유모. 여기서 살면 안 될까요?”
넋두리처럼 한숨까지 섞어 조용히 말한 벨리타의 목소리에 유모는 다른 시녀와 하녀들을
다 제자리에 세워 놓고 어디론가로 그녀를 안내했다.
꽃도 꽃이지만 나무들이 무슨 정글인 줄 착각할 정도로 많았다. 공기도 얼마나 상쾌하고
맑은지, 제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조금 앞서 걸어가던 유모가 굵은 나뭇가지 사
이로 허리를 숙여 들어갔고 그녀도 따라 들어갔다.
이런.
이런 게 여기 있다니.
방이었다. 나무와 잎들로 가려져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방. 마치 비밀의 방처럼 생겼다. 빨
간 양탄자가 깔려 있고 그 중앙에 셋이서 뒹굴어도 될 정도로 큰 침대가 떡하니 놓여 있었
다.
이불도 빨간색이라 순간적으로 이 방이 온통 시뻘겋게 보였다. 그녀의 눈에는 이 방이 편
안해 보이는 온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보였다. 한쪽에 놓인 황금빛 욕조가 퇴폐적인 분위
기를 더 부추기는 모양새였다.
그냥 딱 알았다. 아니 누가 봐도 알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방의 용도를.
어휴.
눈 버렸다. 지금까지 힐링한 것이 다 덮어질 정도로. 어딜 가나 이 모양이라니. 이 몸의 남
자 취향이 그저 역겨울 뿐이었다.
***
“호랑이 신수가 나타날 조짐을 보였다며 떠들어 댄 지가 2년이 넘었는데 그 호랑이는 언제
나오려나.”
“호랑이가 다 썩어 문드러졌나 봅니다.”
“호랑이요? 하! 고양이라도 나타날지 의문입니다.”
마통단 3인이 떠들 때 거의 말을 섞지 않았던 쿠로 브누아 대공이 오래간만에 입을 열었
다.
“서른 살이 목전인데 초조할 테지요.”
대공의 목소리에 세 사람은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더 신이 났다.
“아예 똥줄이 탈 겁니다.”
“전쟁터에서나 펄펄 날지 황궁이 아마 불편할 겁니다.”
“신수도 신수지만 후사도 영, 물 건너갔지요.”
“그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 황제 체면이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
“지금까지 황후와 잠자리 한번 못 한 황제라, 어이쿠. 나라면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 것 같
은데.”
“그러니 미친 황제가 됐지요. 황후를 두고 안지도 않으니 그게 어디 정상이겠습니까?”
“황후가 거부하는 거지요. 아무리 남자 밝히는 황후라 해도 황제하고는 싫다는 거 아니겠
습니까?”
“그런데. 왜 황후는 황제를 그렇게 싫어할까요? 미친 짓을 해서 그렇지 황제도 그만하면
쓸 만한데.”
“어허. 황후가 좀 눈이 높은가요.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합시다. 황제가 어디 여인들이 좋아
할 얼굴입니까?”
황제에 대한 험담은 계속 끝없이 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쿠로 브누아 대공은 이 대목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후의 눈이 높
다는 것에 대한 긍정의 의미로. 마르긴 했어도 키도 크고 하루에 두세 번은 할 수 있는 정
력을 가진 쿠로의 얼굴에 미소가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우리 대공님이 작년에 먼저 신수가 발현되신 걸 알고 이쪽으로 줄 서려는 자들이 자꾸 찾
아옵니다.”
“좋은 현상이지요. 대신 우리 아래로 줄을 세워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우리가 대공님의 일등 공신이니 여기엔 아무도 못 끼지요.”
세 공작은 대공 들으라는 듯, 잊지 말라는 듯 압박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얄팍한 것들. 권력을 위해 모든 걸 다 팔 것들. 그래도 쿠로는 충신을 바라보는 신뢰의 표
정으로 그들을 굽어보았다.
이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다. 표정 관리 하면 그를 따라올 자 없다. 황제 칼리크가 몇 달 안
으로 신수가 발현되지 않으면 저 위대하고 고귀한 황제 자리는 자동으로 자신에게 넘어온
다.
남은 그 몇 달이 몇 년, 아니 몇십 년 남은 것처럼 애가 타고 속이 바짝바짝 뒤틀려 갔다.
아무리 아직 자신의 신수가 불안정하다 해도 계속 연습하고 있으니 아예 발현조차 되지
않은 놈은 지금 죽을 맛일 것이다.
저 황제 자리가 너무나 탐이 났다. 그 자리에 오르면 제 세상이다. 어서 빨리 오기나 해라.
쿠로는 이 모든 시간이 지루하기만 했다.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뼈를 깎아 내듯 느리게, 너
무나 느리게 흘러갔다.
***
“네에? 이 방을 다 바꾸라고요?”
공주님이 요구한 대로 정성 들여 완벽하게 꾸며 놓은 이 방을 왜 느닷없이 바꾸라고 하시
는지 유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이 안 난다고 사람 취향까지 바뀌는 건가?
“그럼 핑크로 바꿔 드릴까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색으로 바꾸면 좋아하시려나 싶어 유모는 자신 있게 제안했다.
벨리타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빨간색이고 핑크고 다 싫다. 지금 제 눈에 보이는 이 방이
마치 시뻘건 정육점처럼 보였다.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뻔히 다 보여 속에서 쓴 물이 다
올라왔다.
“초록으로 다 바꿔 줘요.”
들판처럼. 꿈속에서 뛰어다니던 그 들판처럼. 이 아름답고 웅장한 온실과 어울리게요.
유모가 알았다고 끄덕이는 것만 보고는 바로 몸을 돌려 그 방을 빠져나왔다. 조금이라도
더 있다가는 그 더러움이 몸에 묻을 것만 같았다.
“여기도 싹 다 바꾸라고요?”
방에 돌아오자마자 벨리타는 황후궁에 있는 남자 시종들을 싹 다 바꾸라 요구했다. 빙의한
이후, 힘이 있는 황후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저 불륜 딱지를 달고 있는 것에만 신경 썼다.
지금까지야 어떻게 해 왔던 앞으로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계속해서 이 몸이 저질러 놓은 죄의 현장들을 겪고만 있을 수는 없었
다. 개과천선해서 살아남는다고 했으니 바꾼다. 이대로는 도저히 못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