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 손 좀 치워 주세요
“어떻게 증명할 건데?”
이렇게 떨고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벨리타는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그… 제가 개과천선하겠습니다.”
다시 공손한 말투를 사용하는 벨리타를 보며 황제의 눈썹이 슬쩍 위로 치솟았다.
그녀는 황제가 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는 줄로만 알고 서둘러 덧붙였다.
“남자들도 싹 다 정리하겠습니다.”
“네가?”
그 한마디에 비웃음과 불신을 한껏 얹어 날렸지만 벨리타는 여전히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한 번만 믿어 주세요. 꼭 지키겠습니다. 절대 다른 남자와 단둘이 있지 않겠습니다.”
천하의 불륜 황후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진지하게 나오는 벨리타의 모습이 너무나 아
름답고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다른 놈들이 다 속을 위.대.한. 모습이었다. 건방
진 에무르의 말이 떠오르자 황제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그런 황제의 표정에 벨리타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아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는구나.
“울지 마! 딱 질색이니까.”
벨리타는 바로 눈에 힘을 주어 눈물이 마르게 했다. 울면 당장 죽일 것만 같은 호통이었다.
“일주일 주지.”
아!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겠지?
벨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저 황제만 쳐다보았다. 이제야 희망이 보였다.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얼굴에 핏기가 도는 벨리타와는 반대로 황제의 얼굴은 점점 안 좋아졌다.
“지루해.”
네?
제 생각에 묻혀 황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좀 즐겁게 해 봐.”
조금 진정이 될락 말락 하던 차에 황제의 갑작스러운 이런 요구가 벨리타를 다시 불안하
게 흔들어 놓았다. 뭘 어…떻게…… 그녀는 그저 자신 없는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
다.
여전히 아무 짓도 안 하고 있는 벨리타에게 흥미를 잃은 듯 황제는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
섰다. 말이나 탈 걸 괜히 왔다.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에 그는 이 답답한 방에서 빨리 나갈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아니, 남자라면 누구나 쳐다만 봐도 가슴이 막 뛰고 몸이 달아올라야
정상이지. 황제,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느닷없이 머릿속을 비집고 튀어나온 목소리. 그 버러지 같은 놈의 목소리.
가만.
황제는 천천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네가 그렇단 말이지? 남자면 쳐다보고만 있어도?
황제는 뻣뻣한 자세로 긴장한 채 앉아 있는 벨리타를 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시험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미동도 없이 저만 쳐다보고 있는 황제 때문에 벨리타는 안절부절못하고 아주 죽을 맛이었
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겠고, 너무 떨려 심장이 쿵쿵 널을 뛰고,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몰라 벌게진 얼굴로 눈동자는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남자와 같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턱!
황제의 느닷없는 돌발 행동에 벨리타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뒤로 넘어가게 생겼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가 손을!
그녀의 가슴에, 봉긋 솟은 그 가슴에.
다 덮어 버리듯 척, 올려놓았다.
“왜 이렇게 빨리 뛰지?”
내가 뛰어야지 왜 네가 뛰어?
“이, 이 손… 좀… 치, 치워… 주, 주세…요.”
말은 원래도 더듬었지만 더 심하고.
얼굴은 뭐가 저리 벌겋게 달아오른 거지?
벨리타는 여전히 제 가슴에 머물고 있는 황제의 손 때문에 눈동자까지 마구 떨렸다.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마구마구 헤매고 있는 토파즈 색 눈동자가 봐도 봐도 재미있
어서 황제는 잠시 관찰하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주 보면 더 재미있겠군.
황제의 입술이 멋진 호선을 그리며 양옆으로 올라갔다.
“내일부터 하루에 한 번 날 보러 온다. 그래야 황후 자리에 걸맞게 행동하는지 알 수 있지.”
황제의 손이 드디어 제 가슴에서 떨어져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청천벽력 같은
명이 떨어졌다.
딸꾹.
얼마나 놀랐으면 안 하던 딸꾹질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멈추지도 않는다.
딸꾹. 하…루에 한 번? 딸꾹.
이건 매일 그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주?
날 아주 죽일 셈이다.
“대답은 해야지?”
딸꾹질을 해 대는 벨리타가 아주 잠시 불쌍하게 보였다. 건방지게도 말을 하는 대신 고개
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벨리타가 우스꽝스러웠다.
다시 재미가 없어진다. 계속되는 그녀의 딸꾹질 소리가 듣기 싫어 황제는 이내 몸을 일으
켰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바로 그 방을 나와 버렸다.
***
“유모. 나 어떡해요……. 매일 만나러 오래요.”
너무나 암담해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뭘 그렇게 자주 보려고 하는지.
“폐하가요?”
그럼 누구겠어요.
얼마 되지 않았어도 의지가 많이 되었는지 벨리타는 유모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가 엄마
의 손을 잡듯이 꼭.
“만나서 뭐 하게요?”
내 말이요.
“4년 만에 처음 식사 초대해 놓고 예산을 쌍둥 반토막 내 놓질 않나, 주무시지도 못하게 쳐
들어와서 사람을 들들 볶질 않나, 뭘 어쨌길래 딸꾹질을 다 하시게 만들고 그치지 않아 얼
마나 걱정했는지.”
“미…안해요.”
유모가 화가 나도 단단히 났다. 황제에게 한 소리 들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공주님이 왜 미안해요? 다 폐하 잘못이죠. 그래 놓고 매일? 매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
시하세요. 뭐가 이뻐서 만나 줘요? 언제부터 두 분이 얼굴 보는 사이였다고.”
정말로 그러고 싶다. 화끈한 유모 말대로. 그럴 수만 있다면. 그래도 옆에서 뭐라고 한마디,
아니 여러 마디 해 주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공주님 기분 전환하러 온실에 가요.”
“온실이요?”
참. 기억이 안 난다 하셨지,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공주님이 제일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곳
이에요, 꽃들이 공주님만 못하지만……. 버릇인지 메들리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유모의 말
을 들으며 벨리타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은 다 깨 버렸고 황제가 이 방을 다녀가서 그런지 여기서 잠시 벗어나 보고 싶어졌다. 유
모가 옷매무새를 만져 주고 난 뒤 그녀를 밖으로 안내했다.
이렇게 황후궁을 벗어나 보기는 처음이었다. 뒤로 시녀들과 하녀들까지 따라오고 있는 것
이 어색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 시녀 무리 맨 끝에 리자도 있었다. 그녀는 산속에서 돌아오신 뒤로 저한테 한 번도 말을
건네지 않으신 황후마마에게 무척 삐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벨리타는 으리으리한 궁을 조금 벗어나 잘 다듬어진 황실 정원을 지나갔
다. 그러자 거대한 온실이 저 앞에 보였다.
세상에나. 얼마나 큰지 입이 떡 벌어졌다. 들어가 보기도 전에 벌써부터 감탄사가 절로 터
져 나왔다.
그런 벨리타의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지켜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감탄을 했다. 자주 있
는 일이지만. 특히 유모에게는 영원한 공주님이었다. 아무리 황후마마가 되셨어도 유모에
게는 언제나 예쁜 천사 같은 공주님이었다.
공주님이 황후마마가 되신 그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감축드리옵니다. 황후마마. 지금부터는 만인에게 존경받는 황후마마가…….”
“집어치워. 유모.”
“네?”
이 경사스러운 날에 벨리타는 기분이 매우 언짢아 보였다.
“여기는 펠론국도 아니고 위치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바른 언행과…….”
“집어치우라고!!”
얼굴이 계속 어두웠던 벨리타가 드디어 폭발했다. 예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다 가진 벨리타.
“그게 문제야. 여기가 펠론국이 아니라는 게! 거기 다 있는데, 내가 원하는 게. 여기서 다시
만들어야 하잖아.”
그녀의 나이 21살이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원하는 건 다 가져야 하는 벨리타였다. 여기서
다시 마음에 드는 남자들을 제 주변에 뿌려 놓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그게 너무 원통했다.
“황후마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긴 카르탄국이고…….”
아악!
실성한 사람처럼 악을 쓰는 벨리타의 모습에 겁이 난 유모는 바로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고정하세요. 공주님.”
이제야 마음에 들었는지 씩씩거리던 벨리타가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유모는 절대. 황후라 부르지 마. 황제만 보고 살라는 말로 들리잖아. 잔소리도 하지 말고.
또 이래라저래라 하면 펠론국으로 보내 버릴 거니까.”
유모에게 가장 무서운 벌. 공주님과 떨어지는 것.
바로 그 말을 따랐다. 주변에서 뭐라 하든가 말든가 공주님 옆에서 공주님이 원하는 대로
뭐든 다 해 주었다. 불안증을 보이는 공주님의 안정이 최우선이었다.
그런 공주님이 이렇게 환한 얼굴로 행복해하시니 유모 또한 너무나 행복했다.
주변 사람들을 다 감탄하게 만든 벨리타는 탁 트인 궁정이 마음에 들었다. 속이 시원해진
그녀의 눈에 온실 옆으로 줄을 지어 걸어가는 기사들이 보였다. 앞만 보고 절도 있게 걸어
가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유독 한 기사가 저를 자꾸 쳐다보았다. 묘한 표정으로. 그 좋았
던 기분이 다시 불쾌해지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모? 저기 저… 기사분도 혹시……?”
“아. 저 기사요? 이름은 모르겠고. 며칠 전 밤에 공주님 침실에 불렀던 기사예요.”
도와준다 약속해서 그런지 유모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벨리타는 민망
하고 창피하고 치욕스러웠다. 이 몸이 한 짓이지만 지금 이 몸의 주인은 그녀다.
“왜요? 마음이 동하세요? 밤에 다시 침실에 넣어 드려요?”
“아뇨!!!”
너무 충성해도 문제다.
무슨 사식 넣어 주는 것도 아니고. 뭘 넣어 줘요!
벨리타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유모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다. 벨리타는 단호하게
거절한 뒤 기사 쪽으로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서둘러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황제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황궁에 빼어난 시설을
자랑하는 온천탕. 넓은 지하에 위치해 있으며 기둥마다 벽화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보
고 있기만 해도 심신이 풀리는 곳. 황제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그러나 그의 눈은 그
아무것도 감상하고 있지 않았다.
벨리타.
벌써 두 번째다. 홀로 즐기는 평화로운 시간에 그 여자를 떠올리는 것이.
젠장맞을 벨리타.
왜 갑자기 신경 쓰이게 만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