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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7화 (7/130)

7화 어떻게 증명할 건데?

“아내라면서 사랑하긴 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사랑이나 운운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저런 위대한 벨리타를 방치하다니. 사랑하는 사이라면… 아니, 남자라면 누구나 쳐다만 봐

도 가슴이 막 뛰고 몸이 달아올라야 정상이지. 황제,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그런 사소한 일로 죽었다 깨어날 생각도 없고 벨리타를 위.대.하게 생각하지도 않으니 자

신과는 하등 무관한 개소리들이다. 할 일 없는 것들이 만나서 개판이나 치고 있었으니. 거

기에 맞는 취급을 해 주면 될 것이다.

황제는 돌아서서 나오며 군사에게 명령했다.

“다 벗겨라.”

걸어 나오는 황제 뒤로 에무르의 비명과 애원이 쏟아졌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 왕자는 언제든 탈출할 놈입니다.”

믿음직스러운 안톤의 목소리가 황제의 귀를 정화시켜 주는 듯했다.

“그래서 벗겨 놓았잖은가. 저러고 도망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되겠지.”

현장에서 죽이지 않은 왕자를 이제 와서 죽인다면 로카 왕국의 반발이 커진다. 자칫 전쟁

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기에 황제는 에무르를 방치할 생각이다. 홀딱 벗겨서. 탈출하

든가 말든가 상관없다.

“폐하. 말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기분이 안 좋을 때 말을 타고 실컷 달리다 보면 황제는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릴 때가 있었

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안톤의 배려다. 마음이 동한 황제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아니다. 다음에 하자.”

그것보다 더 재미난 것이 생각났다.

누구 하나는 죽어 나가겠군.

피에 굶주린 것처럼 황제의 눈동자가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어허. 당연히 죽일 줄 알았는데.”

“저 미친 황제가 뭔 바람이 불어서 살려 준 건지.”

“그 음침한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쿠로 브누아 대공은 저를 빼고 서로 떠들어 대는 3인의 마통단(馬統團)을 심드렁하게 보고

만 있었다.

“또 그 미모로 꼬셨겠지요.”

“저 괴물을? 그게 말이 됩니까?”

“괴물도 남자 아니겠습니까?”

40대 후반인 산티노 공작, 50대인 베를루스 공작과 옌슨 공작이 여전히 황후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해 말이 많았다. 왕자와 도망친 걸 황궁 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살려 두다니. 미

친 황제의 꿍꿍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팽개쳐 놓은 주제에.”

“그건 전쟁에 미쳐서 그랬겠죠.”

“그래도 다 승리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유클로 왕국 하나 남았습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한창 떠들던 3명 모두의 얼굴에 약속한 듯이 고소하다는 미소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고요?”

“너무 정곡을 찔렀습니다. 하하.”

이번에는 더 좋아서 소리까지 내며 웃어 젖히는 공작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던 쿠로 브누아 대공은 저 혼자 딴생각 중이었다. 이들

은 어차피 자신을 추대하는 지지 세력에 불과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 모르게

입맛까지 다시며 그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어서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하루라도

속히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쿠로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

“아주 속 편하게 자빠져 잔다?”

황제는 불시에 들이닥치듯 벨리타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유모가 옆에서 잠드는 차를 드시

고 자고 있네 어쩌네, 자신을 막으려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즐기며 직접 양손으로 방문

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이건 또 뭐야?

다소 어두운 방 안. 저 멀리 침대 위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붉은빛이 도는 머리카락만 봐도

바로 벨리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기가 막혔다. 바로 황제의 살벌한 두 눈이 점점 가늘어

졌다.

잔다고? 벌건 대낮부터?

지금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고 있어도 시원치 않은데 어디서 이런 개수작을 부려?

설마.

지금 이것도 다 꾸며 낸 상황일지 모른다. 기분이 마구 잡친 황제는 검을 빼어 들고 마력을

집중시켰다. 곧바로 웅웅 소리가 나며 검 전체에 시퍼런 불꽃이 넘실거리자 황제는 명령했

다.

“찾아 죽여라.”

황제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바르르 떨던 검이 바로 벨리타의 방 여기저기를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쉬익.

쉬이익.

주욱 이어진 옷장들을 훑으며 지나간 검이 침대 아래와 천장까지 꼼꼼히 점검했다. 그러나

푸른 광채를 띠고 날아다니던 검이 맥 빠지게 아무 성과도 없이 황제에게 다시 돌아왔다.

황제의 고개가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재미없다.

하룻밤에 몇 명을 데리고 노는 벨리타이니 분명 남자 하나 정도는 숨어 있어야 맞는데.

마력을 받은 검이 그놈을 찾아내는 즉시 목을 꿰뚫어야 했고.

좋은 구경거리를 기대하고 왔는데 완전 기분 잡쳤다. 그렇다면 또 다른 재밋거리를 만들면

된다. 황제는 침대로 다가가 심히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 이젠 멍청

하게 웃기까지 하는 벨리타가 어이없음을 넘어 분노까지 이끌어 냈다.

벨리타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나비를 따라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헤헤 웃

고 있었다. 그런데 날아다니는 나비가 쉬익, 이상한 소리를 냈고 갑자기 그렇게 맑던 하늘

에 먹구름이 끼는지 시야가 어두워졌다. 점점 더……. 사람 말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대로 죽여 줄까?”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꿈이어서 그런가 벨리타는 별로 무섭지 않았다.

“뭘… 맨날 죽여…. 저리 가…….”

하!

잠꼬대까지?

아주 여유롭다. 하루 종일 달달 떨게 만들려면 어떻게 괴롭혀야 하는지 궁리하느라 황제

이마의 핏대가 섰다.

“눈 떠!”

말 잘 듣는 인형처럼 벨리타의 눈이 껌뻑껌뻑 느리게 움직이며 토파즈 색 눈동자가 드러

났다 사라졌다. 아직은 멍하게 보이는 눈동자가. 이렇게 보니 정말 인형 같긴 했다. 속은

누구보다 더러운.

황제의 살벌한 칼날 같은 시선을 받아서인지 벨리타는 위험을 감지한 동물처럼 잠에서 깨

어나고 있었다. 이상하게 주변 공기가 으스스한 탓에 잠이 다 깨기 전인데도 그녀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불길한 예감 속에 눈을 다시 뜨자마자 바로 딱, 마주쳤다. 벨리타를

위에서 굽어 내려다보는 시뻘건 황제의 눈과.

악! 으악!

이미 온종일 너무 소리를 많이 질러서인가 입만 움직였지 목소리는 터져 나오지 못하고

금붕어처럼 뻐끔대기만 할 뿐이었다.

***

“유모. 이게 무슨 일이래요?”

“내가 왜 네 유모야? 똑바로 안 불러?”

“피이. 알았어요. 카넬 부인. 지금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 방까지 오신 게 믿어지지 않아

서……. 지난밤에는 품에 꼭 안고 오시더니. 이게 무슨 조화람. 이러다 내일 천둥 번개 치는

거 아니에요?”

“시끄러워. 안 들리잖아!”

유모는 굳게 닫힌 황후의 방 문에 귀를 바짝 들이대고 무슨 소리라도 잡아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애가 타 죽겠는데 옆에서 쫑알쫑알 떠드는 시녀 리자

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유모의 표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애지중지 키워

낸 벨리타 공주님이 큰일 냈다고 어젯밤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며 이 방 안에서 통곡을 했다.

말리지 못한 것을 원통해하며. 미리 알아차렸어야 했다고 자책하며. 그런데 상처투성이긴

해도 무사히 돌아온 공주님을 보고 벌인 일을 잘 무마시켰나 보다 안도했다.

아기 때부터 천사 같은 외모인 공주님에게는 그 누구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냥 다 용서

가 되었다. 펠론국 국왕 전하께서도 그러셨다.

하나밖에 없는 공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 국왕도 유모도, 다른 모든 사람도 그냥 달래기

바빠 화를 절대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멋대로라는 말도 듣고 안하무인인 성격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모의 눈에는 아기

천사 벨리타 공주님이었다.

그런 공주님이 도와 달라 애원했다. 지켜 드린다 약속했고. 하지만 이 방 안에 들어갈 수

없음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 방으로 들어가기 전, 황제의 비웃음까지 받

은 터라 아주 속이 뭉그러졌다.

“공주님이 아직 주무셔서 잠시만…….”

“공.주.님?”

그 한마디만 던졌다. 황제가. 그 싸늘한 목소리에는 더한 뜻이 담겨 있었다.

아직도 공주님? 정신이 나갔군.

이러니 벨리타가 저 모양 저 꼴이지.

유모는 바로 입을 다물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니 더더욱 이렇게 문밖에서 동동거릴 수밖

에 없었다.

***

“에무르가 다 자백했다. 널 어떻게 죽여 줄까?”

다시 되풀이. 눈을 뜨자마자 기겁을 하고 침대 반대편으로 기어 도망간 벨리타는 벽에 딱

붙어 서서 겁나는 눈빛을 황제에게 던졌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신비롭게 반짝거렸다.

희한하다.

저렇게 떨고 있으니 자빠져 자던 인형보다는 예뻐 보였다.

아주 마음에 든다.

다시 황금빛 눈동자로 돌아온 황제는 방 한가운데 있는 푹신한 소파에 앉으며 어둠 속에

숨으려 하는 여우처럼 움직이지 않고 벽에 붙어 있는 벨리타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앉아.”

여우라는 말은 정정하자. 강아지로.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다닥 뛰어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소파에 앉는 벨리타 덕분에 처음으로 즐거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역시 재미있어.

왜 이런 재미를 이제야 주시나.

황제는 입술을 삐뚜름히 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워 냈다.

“말해 봐. 네가 원하는 대로 죽여 줄 테니.”

벨리타는 맞잡은 손을 틀어쥐며 떨리는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그게… 그때… 산속에서… 폐하, 아니 당…신이 나한테…….”

증명하라고 해 놓고 이러면 어떡하냐고 말하고 싶었다. 왜 이리 입이 안 떨어지는지 제대

로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한테? 뭘 했다는 거지? 혹, 키스?”

훅 치고 들어오는 황제의 말에 벨리타는 펄쩍 뛰며 기겁을 했다.

“아니요. 아니에요. 그게 아닙니다.”

다신 생각하기 싫은 그 민망한 일을 왜 끄집어내서 사람 돌아 버리게 만드는 건지, 벨리타

는 제발 그 일은 잊어 달라 애원하고 싶었다.

“에무르 왕자의… 말만 듣고…….”

“사실이잖아.”

무슨 말을 못 하게 한다. 하긴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제가… 증명을…….”

아! 황제가 이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생명이 왔다 갔다 하

는 지금, 이렇게 쥐 새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구는 황제가 싫었다. 하지만 절대 표를

내진 않았다. 살고 싶다.

“어떻게 증명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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