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6화 (6/130)

6화 나 좀 도와줘요

황제는 속으로 웃음만 나왔다. 식사를 하면서도 벨리타가 여전히 자신은 쳐다보지도 못하

고 손까지 달달 떠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달그락달그락, 얼마나 소리가 자주 났는지. 우아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도도하게 앉아 소

리 하나 내지 않고 식사를 하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결혼식 피로연 때 본 것이 다지만. 황제인 자신이 달그락 소리 한번 냈다고 무슨 무뢰

한을 보듯, 아래로 보는 시선으로 힐끗 째려보던 걸 다 기억하는데 지금은 이상한 것까지

찍어 먹다니. 그 모습이 다시 떠올라 황제의 입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왕자로부터 도망친 것이 맞다면, 무슨 심사가 틀어져 도망친 것인지 모르겠

지만 그게 맞다면 어디에 부딪혀 머리를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뭐가 어찌 되었건 아직은 재미있었다. 저렇게 떠는 걸 좀 더 볼 수 있다는 것이 은근 그를

즐겁게 했다.

유모와 뭐라 속닥거리는 것 같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마음대로 해요’였다. 그것도 더듬으

면서. 그리고는 팽 뒤돌아 부리나케 도망치는 벨리타. 여기에서 헛웃음이 또 한 번 튀어나

왔다.

벨리타에게 가장 큰 유흥 거리인 ‘미스터 카르탄 선발 대회’ 예산을 왕창 삭감했는데도 펄

펄 뛰기는커녕 도망을 택했다.

온갖 트집을 잡아 화내는 것이 주특기인 벨리타였는데 말이다. 만나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행태를 부리고 있는지 황제의 귀에 다 들어오고 있었다. 듣는 족족 무시했지만.

언제까지 이리 웃음을 주려나.

하루 이틀은 이럴지도.

금방 이런 소소한 재미가 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아쉬울 건 없는 황제였다.

***

“데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통로는 철통같이 지켜 낼 것이 뻔해. 우리 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라.”

오후 정무 회의를 끝낸 데인 브누아 대공은 황제에게 고개를 깍듯이 숙여 대답을 대신했

다.

지금 카르탄 제국은 대륙 통일을 코앞에 두고 있다. 유클로 왕국 하나만 점령하면 4년 넘

게 이어 온 이 대장정도 끝이 난다.

문제는 쉽지 않은 상대란 거다. 사방팔방 사막으로 둘러싸인 유클로 왕국을 공격하려면 서

쪽 끝, 사막이 가장 좁게 형성된 곳, 그곳을 횡단하는 유일한 협곡을 거쳐야만 한다.

다른 사막들은 넓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 들어가기만 하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

다. 그러니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는 법. 사막을 통과하는 가장 짧은

길은 분명 철통같이 지켜 낼 것이고. 유클로 왕국은 그 사막 덕분에 어느 나라의 침공도 받

지 않고 중앙에 안주하며 오랜 세월 왕국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이곳만 점령하면 되는데. 다른 방법이 없다. 아무리 젊은 현자(賢者)로 신임을 받고 있는

데인이라 할지라도 이번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머리를 쥐어짜도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

지 않는 데인의 얼굴은 정무실을 나오면서도 그리 밝지 않았다.

“얼굴 좀 펴시죠”

언제나 반가운 안톤이었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데인에게 안 그래도 큰 안톤은 더 거인

처럼 여겨졌지만, 안톤은 언제나 깍듯했다. 다들 데인을 ‘작은 거인’이라 칭하며 이 나라에

두 명밖에 없는 대공으로서 항상 존경심으로 대했다.

“폐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여느 때와 같으셨네.”

지난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는 데인은 안톤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하지만 미

묘하게 집중을 못 하는 황제의 상태를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우일 수도 있으니.

“신수(神獸) 문제로 한창 날카로워 계실 텐데 그런 일까지 벌어져서 걱정이 안 될 수 없습

니다.”

“항상 날카로우셨는데 뭘 그리 걱정하나.”

너무 강직한 안톤과 해탈한 현자 데인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지만 이 둘의 친분은 누구

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두터웠다.

“황제 폐하께서는 절대 속지 않으실 테니 걱정 말게.”

“당연합니다. 폐하가 어떤 분이신데요.”

그 가증스러운 모사꾼 황후에게 속을 분이 절대 아니시다. 다만, 언제 죽일 계획인지 궁금

할 뿐.

“이참에 황후 자리가 비어서 다른 좋은 분과 다시 맺어지길 은근 바랐는데. 아쉽게 됐어.”

“아직 모릅니다.”

그런가? 뭐. 그럴 수도.

데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미소만 지어 보였다.

***

“아니. 그 대단한 성질 다 어쩌고 그게 뭐예요?”

제 방에 돌아온 벨리타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는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유모가 몰라서 그래요… 칼끝이 목에…….”

지금도 그 느낌이 올라와 목이 꽉 잠긴 벨리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소리를 지르며 유모는 공주님을 자신의 품에 꼭 안았다. 폐하께서 무슨 짓을 한 거

냐, 안고 돌아오시길래 별일 없었는 줄 알았더니 이런 배신도 없다,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

는데 누구 맘대로 공주님 목에 칼을 겨눴냐, 그러니 미친 황제 소리 듣지, 그 뒤로도 엄청

나게 유모의 욕은 이어졌다.

듣기만 해도 속이 다 시원해지는 말을 퍼붓고 있는데도 벨리타는 여전히 불안정한 모습으

로 몸을 가늘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꼭 지키고 있을 테니 이젠 걱정 마세요. 또 어떤 게 불안하세요?”

정말 든든한 말이다.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유모…… 나…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펄쩍 뛰듯이 깜짝 놀란 유모는 벨리타를 제 품에서 떼어 낸 뒤,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고 머

리를 손으로 가만가만 만져 보기 시작했다. 어디 혹이라도 있나 긴장하며 살폈지만, 다행

히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를 다치신 것 같진 않은데…….

“그래서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셨던 거군요. 어디부터 기억이 안 나세요?”

기억이 안 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억조차 없는 것이었지만 설명을 한들 믿어 줄 리 만무

하다. 이렇게라도 제 상태를 알리는 것이 낫다고 여긴 벨리타는 힘없는 인형처럼 축 처진

몸으로 고개만 저었다.

이 몸에게 무한한 충성을 보이는 유모에게 이 얼마나 많은 민폐를 끼치는 건지.

“전부 다…… 나 좀 도…와 줘요.”

도와 달라는 말을 하는 공주님을 처음 본 유모는 아주 난리가 났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인 것처럼 유모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이를 어째, 그것도 모르고 난 뭐 한 거야, 미친

건 나였네, 나 같은 건 죽어야 해, 또 한참을 심하게 자책하며 중얼거리던 유모는 곧 굳은

결심을 하는 듯 보였다.

“제가 다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벨리타는 너무나 씩씩하고 강건해 보이는 유모의 눈동자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 했다.

스윽.

“공…주님? 뭐 하시는 거예요?”

뭉클 잡히는 말랑한 촉감에 벨리타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유모의 가슴에 가져다 댄 자

신의 손을 슬며시 떼어 냈다. 그 여장 시녀 때문에 확실하게 하고 가야만 했다. 이제는 유

모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부 가르쳐 드릴게요. 제가 다 기억하니까. 저만 믿으세요.”

너무 고마웠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든든한 지원군 한 명은 얻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

다. 유모가 가져다준, 잠이 잘 오는 차 한 잔을 마시고 침대에 드디어 누운 벨리타는 온몸

이 녹초가 되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이제야 겨우 쉬게 되었다. 아직 대낮이라 커튼을 쳐 방 안을 어둑하게 만들어 준 유모가 너

무나 고마웠다. 혼자가 된 벨리타는 하품을 하면서 드디어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

다.

너무나 많은 일, 아니 버거운 일이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특히, 죽음을 넘나드는 스펙터클

한 사건들.

이 몸은 몰라도 갓 빙의한 그녀의 정신은 감당하기 힘들어 지쳐 나가떨어졌다. 원작대로라

면 오늘 이렇게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어제 산속에서 처참하게 죽었어야 할 몸. 황궁

이고 황후고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무슨 이런 소설 속으로 빙의를 하냐고!

아니, 소설은 그렇다 쳐. 하필 왜 벨리타냐고!

연애 숙맥인 자신과 희대의 불륜 황후 벨리타와는 너무 갭이 컸다.

최고의 자리면 뭐 하나. 이 몸은 벨리타인데.

적응은 도저히 무리다. 적응도 적응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머리가 다 지끈거렸

다.

어제 거기서 벨리타와 에무르가 참수당한 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잃은 펠론 왕국과

둘째 왕자를 잃은 섬나라 로카 왕국이 손잡고 이 나라로 쳐들어오는 걸로 알고 있다. 그 이

후 원작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고 폭군에서 광군이 된 황제도 그들과의 전쟁과 내란

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자신도 에무르도 살아 있으니 원작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건가?

아. 그 에무르… 살아는 있나? 아님 죽었나?

만약 살아 있다면 황제 앞에서도 천하태평이던 에무르였으니 벨리타와의 관계를 술술 다

불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죄는 벨리타가 지었는데 자신이 그 죗값을 치러야 하는 이 상황이 억울하고 싫었다. 하지

만 그보다 다짜고짜 칼부터 들이대는 폭군 황제에게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그러려면 황

제가 요구한 황궁의 안주인 자격이 있다는 증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유모가 준 잠이 잘 오는 차 때문인지 그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

다.

***

급한 용무를 끝마친 황제는 안톤과 함께 지하 방 앞에 도착했다. 죄를 지은 황족이나 고위

귀족들을 감금하는 서쪽 탑 지하에.

“어이~. 황제.”

곧 죽어도 왕자다 이거다. 여전히 저 몰골을 하고도 같잖게 구는 에무르 왕자가 황제의 눈

엔 버러지처럼 보였다.

“벨리타는 잘 있겠지?”

어디까지 허세를 부릴지 궁금하지도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황제에게는 아무런 흥밋거리

도 선사하지 못하고 있는 저 초라한 에무르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벨리타가 아직은 내 아내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

“허수아비 말고 진짜 아내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내 나라로 데리고 가서.”

“잡히면 사형인 건 알고 있었을 텐데?”

“관심도 없어서 그리 빨리 쫓아올 줄은 몰랐지.”

퉁퉁 부은 입술로 말은 잘도 떠들어 대는 에무르를 황제는 지겨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내라면서 사랑하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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