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5화 (5/130)

5화 다시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다, 다 내보내요!!!”

절규하듯 소리치는 벨리타에게 놀란 유모는 황실 요리사도 얼른 내보냈다.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인 요리사는 억울했지만, 유모에게 쫓겨 하는 수 없이 서둘러 방을 나

갔다.

유모는 이상함을 느꼈다. 공주님의 뼛속까지 다 꿰뚫어 보는 자신인데 벌써 4명의 남자를

저렇게 소리 지르며 다 거부하고 나오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거슬린다면 오히려 후려치

고 직접 내동댕이쳤을 공주님인데 저렇게 몸까지 떨며 거부하는 모습에 걱정이 훅 올라왔

다.

“공주님… 진정하시고 어서 누우세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질린 벨리타를 서둘러 침대에 눕히고는 그 옆에 다소곳

이 앉았다.

생각이 짧았다. 산속에서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것에 안도했는데 생각보다 더 큰 충격을 받

아 잠시 이상해지신 것이 틀림없다.

“다 싫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으셨기에 이리도 떠시는 건지, 유모는 차가워진 공주님의 손을 두 손

으로 감싸 쥐었다.

“공주님. 좀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예요.”

갑자기 벨리타가 유모의 손을 꼭 쥐었다.

“어디 가지 마요. 그냥 여기 있어요.”

세상에. 이렇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애원까지 하다니.

“저런 거… 다신 안 봤으면 좋겠어요…….”

공주님이 이젠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얼마나 안쓰러운지 유모는 그녀의 손을 토닥토닥거

리며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 그거다. 너무 오래 시중을 들게 했다. 싫증을 잘 내

는 공주님께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제 잘못이었다. 공주님이 태어났을 때부터 오로

지 행복하시기만을 바라며 살고 있는데.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유모의 다정한 목소리에 조금은 안도했지만, 기진맥진 기운이 다 떨어진 그녀는 몸이 침대

속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고 피곤했다.

스르륵 눈을 감으며 얕은 잠에 빠져드는 벨리타를 보며 유모는 다시 다짐을 했다.

공주님. 다시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조금만 쉬고 계세요.

유모는 잠든 벨리타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소리 없이 일어섰다.

***

까무룩 잠이 들었었나 보다. 창밖이 훤한 것이 아침인지 점심인지 잘 모르겠다. 조금은 진

정되긴 했어도 못 볼 꼴 다 봐서 그런지 눈을 떴어도 그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아무리 여기가 웅장한 황궁 안, 천국처럼 가장 화려한 벨리타의 방이라 할지라도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낯설 뿐. 대신 욕이 다 튀어나올 정도로 화가 났

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대가가 허무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 하필이면 이런 여자한테

빙의한 거라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모자라 그 징글징글한 남자들. 도대체 이 벨리타가 무슨 짓을 그리

많이 하고 산 건지 가늠해 보는 것조차 무서웠다. 원작에서는 그저 방탕하고 음란한 여자

라고 몇 줄 있었을 뿐인데 직접 겪어 보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여기로 와서 별의별 꼴을 다 당했다. 그저 모두 다 잊고 싶어 그녀는 다시 두 눈을 질끈 감

아 버렸다.

이러고 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원래 내 방으로 돌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공주님! 일어나셨군요.”

도대체가, 무슨 생각도 못 하게 하려고 작정을 했는지 또 유모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왔다.

억지로 눈을 뜬 그녀의 눈에 유모의 표정이 좋은 소식을 전해 주려는 듯 너무나 의기양양

해 보였다.

그녀를 일으켜 세운 유모는 깃털처럼 포근한 하얀 망토를 걸쳐 주며 침대 밖으로 이끌었

다. 조금 기운을 차린 듯 보였지만 여전히 공주님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하지만 곧 다시

돌아오게 할 자신이 있었다. 다시 소파에 공주님을 앉히고 망토를 잘 여며 준 유모는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들어와.”

늘어지듯 기운 없게 앉아 있던 벨리타는 순간 등을 꼿꼿이 세우며 긴장했다. 눈을 뜨자마

자 또 남자들이, 그것도 한 무더기의 남자들이 제 방으로 우르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하

나같이 키가 크고 잘생겼지만, 그녀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 뭐 하는…….

당황해하는 그녀 앞에 남자들이 주욱 한 줄로 늘어섰다.

“제가 자신 있게 엄선한 자들입니다.”

뭘 엄선한 건지,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지 벨리타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얼른 벗지 않고 뭐 하고들 있어?”

유모가 남자들에게 호통을 쳐댔다.

네?

유모에게 묻기도 전에 가장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무슨 도미노도 아니고 그다음 자동으로 그 옆의 남자가 또 그 옆의…….

“유모!!!”

벨리타의 외마디 외침에 자신만만하던 유모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아니야. 아니야.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도리질까지 하는 공주님 때문에 유모는 손을 들어 남자들의 동

작을 일순 정지시켰다. 공주님 마음에 쏙 들 줄 알았는데 잘못 데려왔나.

“공주님. 다시 데려올까요? 다 마음에 안 드세요? 걱정 마세요. 또 있어요.”

할 말을 잃은 벨리타는 그저 고개만 마구 저어 댔다.

“다 내보내요. 이제 그만해요… 제발…….”

너무나 괴로워하는 공주님 모습에 유모는 얼른 손짓으로 남자들을 내보내 버렸다. 이제는

유모가 더 혼란스러워졌다. 공주님이 왜 이러시는지.

“공주님. 원하시는 게 뭔지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원하시는 대로 다 해 드릴게요.”

한 번도 공주님이 뭘 원하는지 틀려 본 적 없던 유모는 이런 일은 처음이라 속이 타들어

갔다.

“그냥 좀 내버려 둬요. 제발…… 혼자 있고 싶어요.”

“남자도 없이요?”

너무 목소리가 높았다. 공주님 입에서 나오리라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에 유모는 의도

치 않게 목소리가 갈라지며 높아졌다.

“제발…… 유모…….”

“알았어요. 공주님. 제가 잘못했어요.”

일단 공주님을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공주님 취향대로 새로운 얼굴들을 데리고 와 다

시 행복하게 해 드리려 했는데 오히려 괴롭게 만들었다. 이유가 도대체 뭔지……. 유모는 공

주님의 이마에 손을 얹고 가만히 집중했다.

“열은 없는데…… 다른 데 아픈 곳은 없으세요?”

다 아파요. 머리도 몸도, 여기저기 다 아파요. 정말 쉬고 싶어요.

벨리타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유모는 벨리타가 뭔가 말하려고 한 것을 못 보고 그쪽으로 급히 다가

갔다. 똑똑, 두 번은 그냥 일반 손님이고 똑똑똑, 세 번은 급한 상황이라는 신호였다.

시종이 열어 준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은 황제 폐하의 보좌관이었다. 시종도 아니고 보좌

관이 직접 오다니. 그것만으로도 유모의 두 눈은 커졌는데 그가 전해 주는 말에 화들짝 놀

라고 말았다.

“네에?”

보좌관이 나가자마자 유모는 부산하게 벨리타에게 뛰어오더니 걸치고 있던 망토를 휘리

릭 벗겨 냈다.

“공주님. 서둘러야 해요.”

다른 시녀들까지 들어와 갑자기 그녀에게 새 드레스를 입히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왜… 왜 이래요?”

속옷에 페티코트에, 몇 겹의 옷을 입으며 벨리타는 겁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셨어요. 얼른 준비하고 가셔야 해요.”

황제, 이 두 글자가 주는 어마어마한 두려움 때문에 벨리타는 옷시중을 드는 시녀들을 피

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안… 가면 안 될까요? 지금 너무 정신도 없고 머리도 아프고…….”

절대 핑계는 아니었다. 아니 핑계를 대서라도 황제는 지금 가장 만나기 싫은 인물이었다.

“미쳤어요?”

유모의 신랄한 질책에 벨리타는 차라리 미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시고 4년 만에 처음으로 폐하께 식사 초대를 받은 건데 지금 그런 말이 나오세요?”

잘하면 회초리라도 들 기세였다. 엄한 유모의 목소리에 벨리타는 바로 울상이 되었다.

“내가…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해서라도 그 자리는 피하고 싶었다.

“괜찮아요. 제가 따라갈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게 아닌데…… 미치겠다.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착착 옷을 다 갖춰 입고 풍성한 드레스 차림으로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유모 손에 이끌려 어딘지도 모르는 황실 만찬장으로 향하는

벨리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

달그락.

얼마나 어색하게 식사가 진행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

어가는지, 포크를 쥔 벨리타의 손이 계속 가늘게 떨렸다. 접시 위 장식으로 놓인 꽃송이를

찍어 먹고 있었지만, 뒤에 서 있던 유모만 깜짝 놀랐을 뿐 그녀는 깨닫지 못한 채 손과 입

만 열심히 움직였다. 빨리 먹으면 여기서 얼른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일념 아래.

황실 정복을 입은 황제가 얼마나 근사한지 그녀로서는 알 리 없었다. 산속에서의 일이 자

꾸 생각나 황제 쪽은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황제와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것. 가까이 앉았다면 물 한 모금도 마시

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 위로는 거대한 바윗덩이가 누르고 목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와닿은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벨리타는 정신 줄을 놓을 것만 같았다. 깨작깨작 후딱 대충 먹은 벨리타는

식사 예법이고 나발이고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저, 저는 이만…….”

유심히 벨리타를 보며 식사를 하고 있던 황제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뭐가 급한지 벌써 뒤

돌아 몇 걸음 걸어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대가 요구한 예산안은 확인하고 가지?”

서늘하게 날이 선 황제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통수로 예리하게 날아왔다. 그냥 무시하고 도

망치고 싶은 벨리타의 눈에 아군인 줄 알았던 유모가 눈짓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뻣뻣하게 돌아선 그녀는 시종이 달려와 공손히 내민 종이 한 장을 선 채로 받아 들었다. 처

음 보는 문자였는데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그런 감흥을 느낄 여유 같은 건 없

었다.

미스터 카르탄 선발 대회.

읽을 순 있어도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장 아래 100만 골드라고 적혀

있는 곳에 찍, 사선이 그어져 있고 그 아래 50만 골드라고 고쳐 적혀 있는 것을 눈으로 대

강 훑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벨리타는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다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다

시 유모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얼른 알아차린 유모가 서둘러 다가와 종이

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아니? 공주님이 제일 좋아하는 행사인데 예산을 반으로?”

대단히 불만스럽다는 듯 유모가 입술까지 삐죽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예산 삭감은 아무래도 좋았고 원래 벨리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저 어지럽기만

할 뿐이었다.

“이…런 걸 해야 해요?”

“무슨 말씀이세요? 이걸 해야 아까 쫓아낸 목욕 시종이나 마사지사들을 다시 뽑죠.”

유모의 말에 잊고 싶었던 그 남자들 모습이 떠올라 진저리가 쳐졌다.

“다 집어치워요.”

“네? 설마 이걸 안 하신다는 말이에요?”

공주님 얼굴이 새하얘진 걸 보니 예산 때문에 적잖이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어떻게

달래 드리나.

“유모.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아하!

공주님이 원하시는 게 그거라면 당연히!

예산을 반으로 확 줄였으니 더 당연히!

“다 뒤집어엎고 가시면 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