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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4화 (4/130)

4화 어디 네가 어떻게 나오나 볼까?

황제 칼리크는 아주 커다란 침대 정중앙에 누워 천장에 그려져 있는 난해한 무늬들을 따

라 천천히 눈을 움직였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거구 다섯 명이 누워도 넉넉한 이 큰 침대는 만에 하나 첩자가

침입해 그를 공격해도 일단 침대 위로 올라와야 하기에 예민한 그가 그 미동을 바로 알아

차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황제 보호용이다. 물론 황실 근위대를, 특히 안톤과

신검을 뚫고 들어올 수나 있으면 가능하겠지만.

늘 별생각 없이 잠을 청하던 칼리크는 몸이 찌뿌둥한데도, 벌써 뿌옇게 동이 트고 있는데

도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단 세 글자 때문에.

벨.리.타.

약을 먹거나 실성하지 않았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금 전 벨리타는 상당히 이상했다. 단

한 번도 이렇게 그녀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적이 없는데 이것도 이상했다.

당연히 죽여 버리려고 달려갔던 깊은 산속. 산발한 여자가 헐떡거리며 뛰어오다 뒤로 넘어

졌을 때는 다른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그게 벨리타일 줄이야. 완벽하게 자신의 외모만을 가꾸고 꾸미던 벨리타가 저런 몰골로 뛰

어다녀? 고급스러운 드레스만 아니었으면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러워진 옷차림만 보고 그

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다. 그걸 시작으로 난해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말투 또한 어

떠했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존대를 하다니. 그것도 무릎까지 꿇고 아주 공손하게. 그 한마디만으로도 이 여자가 드디

어 돌았다 여겼다.

처음 보는 겁에 질린 그녀의 눈동자. 외모는 대단하나 원래 그녀의 눈동자엔 생기가 없었

다. 그저 색기만 흘렀었다. 그런 눈동자가 떨고 있었다. 온몸까지 달달 떨고 있었다.

왜? 이 무슨 연극이지? 게다가 믿어 달라고? 날 뭐로 보고!

믿지 않았다. 무슨 변덕을 부려 이러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납치라는 말을 던졌을 때, 거짓말에 능한 벨리타라면 덥석 물었어야 맞다. 죽고 싶지 않아

납치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왔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녀가 흥미로웠다. 그 의도

가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눈물을 글썽이는 벨리타를 보고는 눈곱만큼 들었던 흥미로움이 바로

가셔 버렸다. 눈물을 무기로 쓰는 여자.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처럼 파랗게 반짝거리는 눈

동자로 보였어도 역겨웠다. 그럼 그렇지. 그는 그녀의 눈물 앞에서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

았다. 그런데 해괴한 말들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남편, 부부, 아내.

[그 말 빼고 말해 줄 수 없어요? 구속된 것 같아 답답하네요. 그 끔찍한 말이 다시는 내 귀

에 들리지 않게 주의 좀 해 주시죠.]

그 빈정거리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펠론 왕국의 유일한 공주였던 벨리타. 제 왕국의 힘

을 믿고 가소롭게 구는 벨리타를 그냥 둔 것은 오로지 펠론 왕국 왕과의 약속과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로카 왕국 왕자와 야반도주까지 하며 황실을 능멸하지 않았다면 황궁에서 계

속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그 끔찍한 말을 제 입으로 직접 떠들어 댔다. 지금 죽을지도 모르는데 여전히

시건방을 떠는 건가? 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덜덜 떨며 두려워했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낯선 여자로 보였다. 이 모든 거짓 행동과 눈빛을 왜 하는 걸까? 그것도 자신한테. 달아난

흥미가 약간 다시 돌아왔다.

우린 서로에게 그 어떤 관심도 없다. 서로 부딪히지 않고, 안 보고 지내는 것이 상책이었

다.

그런데 왜?

너무 떨고 있어 저 작은 몸이 바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언제까지 이 같잖은 연극을 할 것인지.

그렇다면 어디 네가 어떻게 나오나 볼까?

증명을 해 보이라 했더니 사람 허를 찌르는 데는 따라올 자 없을 정도였다.

벨리타. 벨리타. 황궁의 남자들 절반 이상은 다 데리고 논 벨리타.

자신과 처음 하는 키스를 무슨 순결한 여자처럼 부끄러워하고 어리숙하게 하는지.

엉망으로 구겨진 몰골이지만 외모 하나는 인정했다.

그리고 생각과는 다르게 맞닿은 입술에 숨이 가빠 왔다. 능숙함에 홀려서가 아니라 오히려

숙맥처럼 구는 그녀의 입술에 마음이 동했다.

제기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도 그렇게 거칠고 열정적인 키스는.

이 여자와 이런 키스를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결혼식 때 잠깐 닿았던 것이 다였

는데. 요부는 요부였다.

벨리타가 기절하지 않았다면 언제 끝냈을지, 어디까지 갔을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

런 일 또한 처음이었다.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벨리타.

말랑말랑하게 안겨 왔던 벨리타.

진심을 담은 듯 흔들리던 눈동자.

조금 더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기절한 그녀를 들여다보며 내린 결론. 그래

서 황궁으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변함없는 것 하나.

속지 마라.

그녀의 거짓된 행동에 속은 남자가 셀 수 없이 많다.

아무리 이상하게 굴었다고는 하나, 그 여자는 악명 높은 벨리타다. 잊지 마라.

어이없는 상황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그의 눈꺼풀에 피곤함이 내려앉았다. 벨리타

와 엮이면 피곤한 건 당연한 거다. 서서히 잠에 빠져들면서 그의 입술이 슬며시 올라갔다.

재미는 있네.

내 앞에서 벌벌 떠는 게.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데리고 온 거지만.

변덕을 부려 금방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면 정말 재미없는데.

그땐 죽여 버리면 된다. 더 생각할 필요도 가치도 없다.

칼리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제서야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꺄악!!!!!!!”

그녀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한 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가슴

을 가린 채 다리까지 오므리고는 한껏 웅크렸다.

“공주님!!!”

난데없는 공주님의 비명 소리에 식겁한 유모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저… 끔찍한 걸 어서 치워 줘요.

“무슨 짓을 한 거냐?”

유모의 호통 소리에 벌거벗고 욕조 앞에 서 있던 시녀인지 뭔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

었다.

“전… 아무것도… 시작도 안 했는데…….”

“닥쳐라. 어서 꺼져.”

분명 저놈이 뭔가를 했다. 무엄하게도 우리 공주님에게. 가뜩이나 지금 상태가 안 좋으신

데 왜 저렇게 만들어! 죽일 놈 같으니라고.

옷가지만 겨우 들고 벌거벗은 여장 시녀가 부리나케 사라지자 유모는 벨리타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공주님. 이젠 괜찮아요. 고정하세요.”

뻣뻣하게 굳어 있는 팔을 달래듯 떼어 낸 뒤 가만가만 일으켜 세워 벨리타를 욕조에서 나

오게 했다. 얼른 보드라운 가운을 입혀 준 뒤 여전히 멍하게 서 있는 그녀를 데리고 파티션

을 나와 옆자리로 향했다.

유모가 이끄는 대로 그녀는 로봇처럼 걸었다. 이상한 걸 본 충격으로 머릿속이 텅텅 비어

버렸다.

“여기에 누우세요. 상처 피해서 몸 풀어 드릴게요. 종아리가 단단히 뭉쳤어요. 이러면 기분

이 좋아지실 거예요.”

유모가 하라는 대로 침대가 아닌 좁은 침상에 얌전히 누운 그녀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유모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영혼이 달아난 듯 그저 뜨고만 있던 그녀의 퀭한 눈에 이상한 사람 둘이 보였다. 유모가 그

들에게 인사를 받고는 멀어져 갔고 이내 그 두 사람이 다가와 그녀의 팔과 다리를 살며시

잡았다.

“오늘도 황후마마를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눈을 감고 느끼십시오.”

굵은 목소리.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목

소리가 여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차렸다. 손과 다리를 슬금슬금 쓰다듬는 건지 이상하

게 만져 대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자, 근육으로 잘 발달된 울퉁불퉁한 가슴이 눈에 들

어왔다.

옷을 안 입고 있네.

맨가슴이…….

어?

맨가슴?

갑자기 정신이 든 그녀는 그들에게 잡혀 있던 팔다리를 거칠게 뿌리쳤다. 상처 때문에 윽,

소리가 나왔지만 겨우 참아 내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뭐…뭐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얼른 벗겠습니다, 지금부터 하나씩 벗으려 했는데 제발 용서해 주십

시오, 뭐 이런 말이 들린 것 같았는데 그들이 갑자기 입고 있던 얇은 바지를 쓱 아래로 빠

르게 내리는 것이었다.

아악!

또다.

그것도 쌍으로.

“유, 유모! 유모!!!”

또다시 목이 터져라 그녀는 외쳐 댔다. 눈에 눈물이 다 맺힐 정도로 소리를 질러 댔다. 덜

렁이 하나 피해서 여기로 왔더니 이번에는 둘이다. 돌기 직전이 된 그녀는 미친 듯이 유모

를 불러 댔다.

“얼른 꺼져. 오늘따라 이것들이 다 왜 이래?”

바로 달려온 유모가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공주님부터 제 품에 안고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

렀다.

“공주님. 괜찮아요. 제가 저것들을 다 감옥에 처넣을게요. 진정해요.”

그녀를 품에 안고 토닥거리던 유모는 심히 걱정이 되었다. 공주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

다. 제 품에 안겨 이렇게 바들바들 떠시는 건. 남자들만 있으면 펄펄 날아다니시던 공주님

인데. 어제 오후부터 드신 게 없어 더 몸이 허해지신 모양이다. 유모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벨리타를 부축해서 다시 고풍스럽고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온몸이 파묻히는 새털같이 부드러운 소파에 얼빠진 얼굴로 축 늘어진 그녀는 또다시 저를

혼자 두고 멀어져 가는 유모의 뒷모습을 맥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가…지 마요.

이젠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처음 눈을 뜬 저기 보이는 커다란 침대에 눕고 싶었

다. 무엇을 보았는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끔찍한 일들이 연

달아 벌어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조금만 쉬고 싶다. 조금만.

뭔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라도 주고 사람을 이리 내몰든가 하지…….

저벅저벅.

말할 기운도 없어진 그녀가 시선을 들자 흰색으로 깔끔하게 정복을 입은 신사 한 명이 손

에 커다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 있는 고풍스러운 테이블 위에 쟁반

을 내려놓은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아주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본 남

자들 중 가장 정상으로 보였다.

“황후마마. 해피밀 드실 시간입니다.”

목소리도 정중했다. 지쳐 있어서 그런 건지 이제야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해피밀은 친숙하다. 맥도00 햄버거 해피밀. 그럼 혹시 햄버거인가? 너무 진이 다 빠져 버

려 뭐라도 좋으니 기운 차릴 걸 먹고 싶어졌다.

억지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데.

앗.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허락도 없이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어…… 혼자 걸어갈 수 있는데.

어색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지만 테이블 앞, 저기 보이는 의자에 앉혀 주려고 그러

나 보다 여겼다. 그래도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그 의자에 앉긴 앉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자신을 안고 의자까지 간 남자가

그대로 앉아 버려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 있는 꼴이 되었다.

왜… 이런 자세로…….

그녀의 눈꺼풀이 연거푸 껌벅거렸다.

“자. 황후마마. 아~~~.”

이상하게 들리는 말과 함께 그녀 앞으로 먹음직스러운 고기가 다가오자 얼떨결에 입술을

벌렸다. 그런데 그 고기가 제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입으로 들어갔다.

왜…….

다시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고기를 입에 문 채 점점 다가오는 남자의 게

슴츠레한 눈동자가 소름 끼치도록 끔찍했다.

설마…… 입에서 입으로?

이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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