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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화 (1/130)

<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입니다 >

1화 불륜 황후

헉!

눈앞이 캄캄해진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미친 듯이 거머쥐고 드러난 다리로 죽어

라 달리기 시작했다.

저 남자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같이 있다가는… 죽는다!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며 남자가 쫓아오기 시작하자 더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오지 마. 너한테서 떨어져야 한다고.

사방팔방 어두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숨이 막힐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고 온몸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덜 떨렸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는 흘

러내려 뒤통수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위태롭게 흔들렸다.

젠장. 빙의를 해도 하필이면.

조금 전, 저를 깨우는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고 보니 짙은 초록 눈동자에 잘생긴 금발의 남

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거의 얼굴이 닿을 것처럼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드레스를 풀어 헤치려 했다.

숨소리 또한 거칠고 끈적거렸다. 가슴 쪽 끈에 닿으려는 남자의 손은 다급했고 서늘한 바

람이 옷 사이를 훑으며 지나갔다.

남자 무릎 위에 앉아 있던 그녀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불편하게 자신

이 공주님 드레스 같은 걸 왜 입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딘지도 모르겠다. 왜 자신이 여

기에 있는지도.

야무지게 피워 놓은 모닥불, 야릇한 분위기, 인적 없는 숲속, 흐트러진 옷차림…….

앗!

지금 어딜 만져!

제 가슴을 만지려는 남자의 손을 바로 야멸차게 쳐 내며 뒤로 물러났다. 이왕 물러나는 거

남자의 무릎에서도 내려왔다.

“벨리타. 나 지금 급해… 어서 시작해 줘.”

조급해진 남자가 다가오는 만큼 더 뒤로 물러나 앉은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가만. 벨리타?

이 특이한 이름을 어디서 들어 본 것도 같은데.

“이름이 뭐죠?”

답답한 마음에 그녀의 목소리는 자연 날카로워졌다.

“지금 뭐 하는… 아! 알았어. 에무르. 이젠 됐지? 빨리하자. 시간 없어. 달링.”

몹시 흥분한 상태인 남자는 그녀가 장난친다고 생각했는지 그마저도 귀찮다는 듯 대답만

툭, 던지고는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발정 난 수컷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후딱 이름을 말해

준 남자는 원래 하고자 했던 일을 이어 갈 심사였다.

잠깐.

이 남자는 에무르, 난 벨리타?

설마. 빙의?

턱!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밀어 냈다. 남자는 뒤로 볼썽사납게 넘어지며 헉,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는 얼른 발딱 일어나 더 멀리 떨어졌다. 아니 도망치듯 멀찌감치 떨어져 여전히 바닥

에 주저앉아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로카 왕국 둘째 왕자, 그 에무르?”

꼭, 반드시, 절대적으로 확인이 필요했다. 빨리 대답을 할 것이지 환장하게도 그는 다소 기

분 상한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지금 보고 있는 저 입술이 애무의 화신인 에무르

왕자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

빨리 대답해. 아니라고.

“다 아는 걸 왜 물어?”

헉!!!

사실이다. 큰일 났다.

그녀는 번개 같은 속도로 뒤돌아 그로부터 죽어라 도망쳤다. 헉헉대며 앞만 보고 뛰느라

뻗어 있는 나뭇가지에 얼굴과 다리를 마구 긁히면서도 이를 악물고 멈추지 않았다.

난 여기서 높은 확률로 죽는다. 저 남자와 떨어지지 않으면.

벨리타.

이런 망할!

소설 ‘전장 속에 핀 꽃’에 잠깐 등장하는 카르탄 제국 폭군의 황후, 벨리타. 재수 없는 건

기본이고 하루라도 남자 없으면 못 사는 욕정 덩어리. 원작에서 가장 일찍 죽는 인물. 에무

르 왕자와 손잡고 도망치던 중, 산속에서 뜨거워진 몸을 주체 못 하고 둘이서 산불이라도

낼 것처럼 한바탕 불 싸지르다 추적해 온 폭군 황제의 검에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 즉사하

는 인물.

불륜 전문 황후. 일명 ‘불륜 황후’로 소문난 인물. 원작 표현에 의하면 천사 같은 외모에 음

탕한 잡부의 욕망을 지녔다 했다.

그게 이 몸, 벨리타다.

바로 지금이 그 산속이고 빙의하지 않았으면 벨리타는 저 남자와 합체를 했을 것이다. 게

다가 절정에 올라 괴성을 질러 대다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민망한 포즈 그대로 목이 잘린

다. 그러니 도망치지 않으면 이 몸은 바로 이 산속에서 죽는다. 폭군 황제의 시퍼런 칼날

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 달려오는 트럭을 본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하필이면 여기로 오다

니.

헉…헉….

얼마나 죽도록 뛰었는지 심장이 파열할 것처럼 쥐어짜는 통증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분명 폭군 황제가 근처에 있을 것이다.

시간이 없다. 어서 빨리…….

퍽!

그녀는 갑자기 사정없이 나동그라졌다. 미친놈처럼 저를 쫓아오는 에무르를 뒤돌아보다

아주 단단한 것에 부딪혔다.

으윽…….

산발이 되어 제 얼굴을 다 덮어 버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치우며 그녀는 욱신욱신 통증이

이는 몸을 추스르고는 발딱 일어섰다. 그러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로 다시 쓰러져 벌

벌 떨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부딪힌 것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눈빛을 한 사람.

호랑이의 눈을 닮은 황금빛 눈동자, 드래곤이 불을 뿜어내듯 살기 가득한 눈빛.

저런 눈빛을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단 한 사람.

폭군 황제.

어둠 속에 우뚝 솟은 괴물 같은 존재.

머리카락부터 검은 망토까지 온통 새까만 악마 같은 모습.

그 황제의 서슬 퍼런 눈빛에 몸이 이미 두 동강이 난 듯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들오

들 떠는 그녀를 죽일 듯이 내려다보던 황제의 손에 들린 기다란 검이 피를 부르는 것처럼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저 검으로 이 목을…….

그녀는 덜덜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며 목소리를 내려 안간힘을 썼다.

살려…….

그때였다. 벨리타, 라고 부르는 소리가 제 목소리보다 먼저 들려왔다. 저 망할 애무 왕자가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줄 아는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헤매는 게 저 멀리 보였다. 캄

캄한 숲길인데도 달빛에 빛나는 허연 애무 왕자의 금발이 등불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가!

저리 가.

여기 오면 우리 둘 다 죽는다고.

“꿇려라.”

황제의 단호한 목소리에 벨리타는 자진해서 바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대여

섯 명의 군사들이 애무 왕자 쪽으로 가는 걸 보고는 저한테 내린 명령이 아님을 뒤늦게 알

아차렸다. 아주 잠시 안도하던 그녀는 군사들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오는 왕자를 보고는

다시 숨을 멈추었다.

질질 끌려오던 왕자는 폭군 황제를 발견하고 잠깐 멈칫, 하더니 갑자기 되지도 않게 여유

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이. 황제~.”

기가 막혔다. 전쟁광 폭군 앞에서 저러다니.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여긴 어인 일로…….”

닥쳐.

그녀가 외치기도 전에 왕자는 윽,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지며 자동 무릎을 꿇어 버렸

다. 옆의 군사 한 명이 왕자의 뒷덜미를 가격했기 때문이다.

폭군 황제의 사나운 시선이 왕자에게 한동안 머물더니 느릿하게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황

제의 황금빛 눈동자가 점점 검붉게 물들어 가자 그가 들고 있던 검이 웅웅 진동 소리를 내

며 시퍼런 빛으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마력이 분신과도 같은 그의 검에 모이고

있었다.

“아직 죽이진 마라.”

퍽. 퍽.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저한테 날아오는 발길질을 피하려고. 하지만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와 으드득 부러지고 터지는 소리는 그녀가 아닌 바로 옆에서 들려왔

다. 왕자가 내지르는 비명은 곧 사그라들었다. 바로 기절한 듯. 그래도 군사들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달달 떨며 그다음 차례가 자신임을 확신했다.

“폐, 폐하….”

이렇게 금방 또 죽을 순 없다. 죽는 게 너무나 무서웠다.

“그새 내 이름도 잊었나 본데.”

황제의 목소리마저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되어 그녀 몸에 사정없이 박혔다.

아. 이름으로 불러야 하나? 하도 빨리 죽는 황후라 그런 정보는 원작에 없었다.

이 폭군 황제 이름, 빨리 기억해 내. 빨리.

“아! 칼, 칼리크. 구…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장이라도 황제의 검이 날아올 것만 같아 사시나무 떨듯 목소리가 떨리고 갈라졌지만 그

래도 살기 위해 굳건히 버텨 냈다.

“구해 줘?”

황제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어하는지 낮게 깔린 목소리에 한껏 실려 있었다.

“네. 지금 죽어라… 도망치고 있었고…….”

스윽.

기어코 그의 살벌한 긴 검이, 시퍼런 광채를 띠고 있는 검 끝이 그녀의 어깨 위로 내려왔

다. 비명을 삼킨 그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황제가 손목만 슬쩍 움직이면 바로 목

이 댕강할 위치였다.

“누구한테서 도망을 쳐?”

“저, 저 왕자한테서.”

윽!

예리한 검 끝이 그녀의 드러난 하얀 목에 바짝 들이밀어졌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것만으

로도 검 끝에 피가 맺혔다.

폭군 황제, 미친 황제. 피에 굶주린 또라이 황제.

“나한테서 도망친 것이 아니고?”

시퍼런 빛을 내고 있는 검 끝이 무서워 고개도 젓지 못한 그녀는 혀까지 뻣뻣하게 굳어 버

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간절한 눈빛으로 황제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살고 싶은

간절함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행히, 너무나도 다행히 그녀의 어두운 토파즈 눈동자를 응시

하던 황제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정, 정말입니다……. 저 왕자한테서 도망치던 중이었습니다.”

어디 계속 지껄여 보라는 듯, 비웃음에 가소로움까지 얹은 눈빛이 그녀를 관통하듯이 꿰뚫

었다. 너무 억울한 상황이었다. 평생 불륜은커녕 연애도 한번 제대로 못 해 봤는데 희대의

불륜 악녀로 몰려 죽게 생겼다.

내가 저 애무 왕자랑 도피한 게 아니라고. 나도 뭐가 뭔지 모른단 말이야.

이렇게 여기서 죽긴 너무 억울하고 무서웠다.

“지금 제 모습을 보시면…….”

도저히 믿지도 않고 어두워 엉망이 된 제 꼴을 못 봤나 싶어 결백을 주장하듯 찢어진 옷차

림과 피가 여기저기 맺혀 있는 제 얼굴을 잘 보이게 움직이며 황제의 시선이 닿게 안간힘

을 썼다.

“등불.”

그의 한마디에 불을 붙인 등불이 나타나더니 그녀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황제의 살벌한

시선이 겁먹은 푸른 눈동자와 피가 맺혀 만신창이가 된 허연 다리까지 쭈욱 훑어 내렸다.

그녀의 몰골을 면밀히 확인하던 황제의 눈빛이 살짝, 아주 살짝 흔들리는 걸 보았다. 일단

살고 봐야 한다.

빙의한 이 육체가 죄를 지었지 자신이 여기서 죽을 이유는 없다. 빙의했다는 걸 말할 순 없

겠지만, 진실만을 말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그녀에게는 진실이지만 애무 왕자에게는 거짓말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신의 말에 반박할 애무 왕자는 지금 죽은 듯 피투성이로 뻗어 있다.

“칼리크. 믿어 주세요.”

왕자에게 볼일이 다 끝난 군사들이 왠지 비웃음을 날리는 것 같았다. 당신을? 그 유명한

불륜 황후를 믿어? 음성 지원까지 되었다.

“그럼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저놈이 당신을 납치라도 했단 소린가?”

납치?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얼어붙은 그녀의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했다.

“전… 그냥 도망치던 중이었고…….”

이거 하나만은 사실이었다.

황제의 검게 변한 눈동자가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듯 점점 옅어졌다.

“어디로 도망치려 했지?”

“당연…… 황궁이죠. 돌아가려고 이렇게…….”

이게 맞는 대답일까?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원래 벨리타와 지금의 벨리타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길도 없고 이대로 죽을 것 같아 서러운 눈물이 맺혔다. 아무리 발버

둥 쳐도 원작대로 여기서 죽을 것만 같았다.

푸른 토파즈 눈동자가 그 눈물로 보석처럼 반짝거렸지만, 황제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

다.

“뭐 하러 돌아가? 황궁에 뭐가 있다고.”

질문이 이상했지만 두려움에 떨던 그녀는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 사실대로만 말했다.

“거기가 제 집이고…….”

황제가 계속 지껄여 보라는 듯 다시 검붉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서늘하게 내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나 무서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황제… 아니 칼리크도…….”

“나?”

여기서 자신이 왜 나오는 건지 어이없다는 듯 황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점점 더 사나

운 표정으로 변해 갔다.

“남,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일단은 둘이 부부 사이니까 틀린 말은 아닌…….

쉬익!

끔찍한 바람 소리와 함께 황제의 시퍼런 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녀의 얼굴을 스치듯

날아가더니 뒤에 콱,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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