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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97화 (29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97화

일 년 후—

거대한 증기선이 멜니아의 남부 켈토 항구에 도착했다. 배가 도착하기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켈토의 푸른 바다, 푸른 하늘을 눈에 담을 새가 없이 얼른 지면을 밟고 단단한 땅의 느낌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단 한 여자.

햇빛 아래에서 희게까지 보이는 금발을 가지고 품이 넉넉한 옷을 입은 한 여자를 빼면 말이다.

그 여자는 켈토의 하늘을 넋이 나간 것처럼 보다가 들고 있던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여기가 켈토야. 켈토에 왔다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뒤로 돌았다. 그러자 엘리자베스의 뒤에서 짐을 잔뜩 들고 서 있던 미리엄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요. 켈토에 왔군요. 이봐, 케이! 왜 어느새 내가 이 짐을 다 들고 있는 거야?!”

미리엄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미리엄의 표정이 안 좋은 이유가 있었다. 미리엄은 막 태어난 갓난아기 때문에 절대로 켈토 출장만은 오지 않을 거라고 다짐을 받아둔 터였다. 하지만 토닉워터와 퀴닌의 수출을 위해 준비되었던 출장에 참여하기로 했던 다른 이가 갑자기 사정이 생겼고, 대체할 다른 사람을 찾지 못한 미리엄이 긴 출장길에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뚱한 표정을 보다가, 미리엄보다 더 뒤에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케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테시톤과 뭔가를 열띠게 대화하는 중인 케이는 그 손길을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밀리가 벌써 말을 한다구요? 천재인 거 같아요.”

엘리자베스는 미리엄과 셜리의 아이인 밀리에 대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그러자 뚱했던 미리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밀리가 벌써부터 레본어 알파벳을 아는 것 같다는 소리를 떠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뱃멀미가 없는 편이었지만 미리엄이 하는 말도 안 되는 아이 자랑에는 점점 멀미가 나는 참이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리엄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곧 그들을 따라잡은 케이가 미리엄의 어깨를 가볍게라고 하기엔 꽤 아프게 주무르며 말했다.

“제발 닥쳐, 미리엄. 밀리는 이제 막 태어났어. 그런 아이한테 뭘 기대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내가 동화책을 보여줬는데…….”

“너 글도 못 읽잖아.”

케이가 미리엄을 구박하자 미리엄이 얼굴이 시뻘개져서 말했다.

“무슨 소리! 프란시스 부인께서 내가 배움이 빠르다고…….”

미리엄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케이가 프란시스가 1년 동안 여공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학생을 넓혀서 야학을 차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얼른 입을 가리고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눈치를 번갈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낭패라는 얼굴이었지만 케이는 어쩐지 딴청만 피웠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프란시스 보고 제발 무리하지 말라고 해.”

“알고 있었어?”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여자 다섯, 여섯이서 모임을 가졌다는데 담배, 술 냄새도 전혀 안 나잖아. 그럼 뭘 했겠어. 설마 프란시스가 여공들이랑 모여 앉아 남자 얘길 하진 않았을 거고.”

케이는 뻔하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케이의 팔을 살짝 껴안고 항구를 지키는 공무원들에게 걸어갔다. 공무원들은 엘리자베스와 케이에게 통행증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품 안에서 통행증을 내밀었다.

거기엔 선명한 글씨로—

“케이 하커 씨?”

“네.”

케이가 대답했다.

공무원은 통행증을 다시 케이에게 돌려주곤 엘리자베스의 통행증을 살피며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하커 부인?”

엘리자베스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공무원은 실수를 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곤 엘리자베스의 통행증 위에 있는 왕실 인장을 확인했다.

“아, 죄송합니다. 엘리자베스 경. 이 나라에는 귀족이 없어서 말입니다.”

공무원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너그럽게 말했다.

“알다마다요.”

케이의 팔 위에 얹은 그녀의 손가락에서는 반지가 반짝거렸다.

공무원은 엘리자베스에게 통행증을 건네주며 밝게 말했다.

“멜니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엘리자베스 경의 얘기는 여기저기서 들었습니다. 이번에 홀램브로에서 학술상을 받을 거라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엘리자베스는 공무원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글쎄요, 정확한 건 아무도 모르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은 제 손에 힘을 주며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미 초청장은 받았다고 하지 그래.”

케이가 놀리는 말에 엘리자베스가 주먹으로 케이의 아랫배를 세게 때렸다. 케이는 기침을 하며 몸을 뒤로 뺐다. 케이의 만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에 이끌려 항구에서 바로 이어지는 도시로 걸어갔다. 켈토는 해변과 항구로부터 겨우 몇 걸음만 나아가면 바로 도시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켈토라는 도시 자체가 마치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케이는 항구가 내려다보는 호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보면 수평선 위로 해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전부 볼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설레는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케이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케이는 참지 못하고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아당겨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곧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미리엄의 입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누구는 출장에 끌고 오면서 누구는 신혼이나 즐기고, 이게 무슨 일이야? 엉? 내가 우리 윌슨 의원님한테 신고할 거라고!”

케이는 미리엄의 말을 들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국회의원이 무슨 왕인 줄 알아? 헛소리 마, 미리엄. 그리고 이것도 좀 들라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에 들려 있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보더니 재빨리 낚아채서 제가 들고, 자신이 들고 있던 가방은 미리엄에게 던져버렸다. 미리엄이 시뻘게진 얼굴로 꽥꽥 소리를 질렀다.

“저, 저, 싸가지 없는 자식!”

미리엄이 침을 퉤 뱉자 테시톤이 껄껄 웃으며 미리엄에게서 가방을 하나 나눠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팔을 꼬집으며 말했다.

“그만 좀 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끌어안고 엘리자베스의 뺨과 입술에 입을 맞췄다.

“결혼하고 나서 더 심해진 거 알아?”

“뭐가?”

“계속 붙어 있으려고 하는 거…….”

엘리자베스는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케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려고 결혼한 거야.”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은 단출했다.

조지 국왕의 제안대로 궁 안에 있는 예배당에서 하는 대신에 로킨트에 있는 교회에서 진행했고, 엘리자베스와 케이와 친하지 않은 귀족들은 굳이 부르지 않았다.

맨 앞줄에는 프란시스만이 앉았다.

하객으로 온 공장 사람들은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이미 몰래 술을 나눠마시느라 여념이 없었다. 중간에는 그들이 대머리 윌슨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윌슨이 소리를 질러댔다.

단출하다기보다 엉망인 결혼식이었는데 엘리자베스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전처럼 귀족과 젠트리의 가식적인 농담소리 속에서, 잘 가꿔진 꽃의 죽어가는 향기를 맡으며 하는 결혼식이 아니라서 말이다.

마차는 궤적을 이탈해서 달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대표인 윌슨은 하원 의원이 되었고 의석의 절반 이상은 평민이 차지했다.

레트니의 죽음은 결코 명예롭게 기억되지 않았다.

새로 출범한 의회에서는 레트니의 시체를 수장하기로 결정했고 못질이 된 그의 관은 바다 이곳저곳을 떠돌게 될 터였다.

노동조합장에는 에밀리가 출마해 당선되었다. 에밀리는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남자들 사이에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조합장이 되었다. 우후죽순 생겨난 자본가들의 뒷돈을 받아 챙기는 다른 조합원들과 마찰이 생길 때마다 에밀리는 조합의 이익을 위해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리오든 노동조합은 불과 몇 달 만에 전국에 지부를 갖게 되었다.

전국에 생긴 노동조합에는 화공, 가게 점원,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연주를 하는 사람들도 모두 포함되었다. 에밀리의 지도력이 빛을 발한 덕이었다. 에밀리가 그 결정을 하기 위해 스무 명쯤 되는 남자들과 독주로 대결을 했던 밤에 대한 무용담을 듣고 엘리자베스는 경외심마저 품었었다.

앰버는—

앰버 모건은 저 어디쯤에 있다.

엘리자베스는 켈토의 화려한 거리 중간쯤에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앰버를 만나기 위해 커피 하우스로 가는 길이었다.

성난 짐승소리 같은 엔진 소리와 함께 작은 기계 하나가 엘리자베스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이 동그래진 엘리자베스가 입을 떡 벌리고 그것을 가리켰다.

“저거 마차야?”

엘리자베스의 새된 목소리에 케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마차야. 말이 없는 마차. 작은 증기기관 같은 거로 가는 거야. 자동차라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엘리자베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러자 케이는 슬그머니 미리엄과 테시톤을 바라보더니 들고 있던 여행 가방을 내려놓았다.

케이가 얼른 엘리자베스의 손을 쥐고 말했다.

“타볼래?”

“어?”

엘리자베스가 당황한 사이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끌고 멀리서 오는 자동차 하나를 손을 흔들어 세웠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가 그 자동차 주인에게 지폐를 한 장 내밀며 말했다.

“내 부인이 다리를 좀 다쳤소. 에비애튼 스트리트까지만 태워다 줄 수 있나?”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얼른 다리를 저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자동차 주인이 안타까운 얼굴로 일행을 보았다. 뒤에서 케이가 하는 짓을 깨달은 미리엄이 말했다.

“너,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짐짝처럼 쉽게 들어 자동차 뒤에 실었다. 드릉드릉하는 엔진의 떨림이 엘리자베스의 엉덩이에 그대로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어린 아이 같은 얼굴로 케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케이 역시 자동차 뒷좌석에 앉았다. 그러자 자동차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말했다.

“자동차를 처음 타보시나요, 부인?”

“네, 처음 타 봐요. 켈토엔 정말 신기한 게 많네요.”

엘리자베스의 대답과 동시에 자동차가 증기 같은 것을 뿜으며 미리엄과 테시톤을 스쳐서 지나가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미리엄이 손가락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리엄의 모습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다시 고개를 돌린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흥분된 얼굴로 말했다.

“자동차 속도 완전 빨라. 레본에도 이런 게 생길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당연하지. 레본에도 생길 거야.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것들이.”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동자가 켈토의 푸른 하늘을 담고 있었다.

케이는 제 품 안에 있는 고이 접힌 편지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1년 전에 청혼을 하던 날에 주고 싶었던 것을 아직도 주지 못했다. 결혼기념일을 맞춰 주려고 기다리다가 켈토에 오게 되면 호텔에서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되어 이렇게 끝났다.

[나의 엘리자베스에게]

[너의 케이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잠시 이 시간을 음미했다.

자동차를 타버린 탓에 앰버와의 약속은 뒤로 밀렸고, 사실 케이는 에비애튼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엘리자베스도 상관없어 할 것이었다.

파혼하러 돌아왔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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