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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96화 (29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96화

케이는 나뭇가지에 오일 램프를 건 후 가파른 계곡을 미끄러지듯이 내려왔다. 제 겉옷을 벗어서 엘리자베스에게 덮어주고 그녀를 잡아당겨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젠장할…… 깜짝 놀랐잖아….”

엘리자베스는 싸늘한 늦여름, 초가을의 날씨에도 케이의 몸이 후끈후끈한 것에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떴다. 케이는 자신의 품 안에서 숨을 쌕쌕 몰아쉬는 엘리자베스의 몸을 한참 끌어안고 있다가 이내 엘리자베스의 뺨을 그러쥐고 그녀의 몸을 살폈다.

“다쳤어?”

“굴러 떨어졌어. 대단히 다친 덴 없지만 찝찝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대답하곤 주변을 살폈다.

“혼자서 왔어?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일단 곰 사냥을 끝내고 나서 수색대가 뒤따르고 있어. 나 혼자 일단 뛰어 온 거야.”

케이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열기며 땀을 보며 케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민망해진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곰도 없으면 그냥 혼자서 돌아갔어도 됐는데…….”

엘리자베스가 총을 만지작거리자 케이는 그 총을 빼앗아들고 총알을 모두 빼서 주머니에 넣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괜히 사냥당할 뻔했네.”

엘리자베스는 아까 정말로 케이를 쏠 뻔한 것을 떠올리며 원망스럽게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아까까지 잔뜩 상기되었던 얼굴에서 겨우 긴장을 풀어내며 쿡쿡 웃었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혼자 걸을 수 있나?”

“걸을 수 있어.”

“그럴 수 있겠지. 총도 쏠 수 있는데.”

“그만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팔을 꼬집었다. 케이는 아픈 척을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람은 비탈길을 다시 올라가 오일 램프를 들고 숲을 걸었다.

어두운 숲속에서 케이를 만나니 아까까지 엘리자베스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두려움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안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그 곰, 수놈이었어?”

“국왕이 잡은 건 수놈이었고 너를 쫓다가 포수에게 잡힌 놈은 암놈이었어. 수놈은 이미 죽었고 암놈은 새끼를 배고 있다고 해서 기절시켜서 우리에 뒀다가 내일 멀리 풀어둘 거라고 하더군.”

결국 수놈을 잡았구나.

엘리자베스는 군인이 해줬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살짝 안도했다.

케이와 함께 걷자 숲길도 금방이었다. 곧 엘리자베스는 개울가와 평원이 다시 나온 것을 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케이는 어두운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턱짓으로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뭔가 익숙하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질문에 웃었다.

익숙하지 않냐고?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거지같은 고백을 했던 이곳이 익숙하다는 말 정도로 설명이 될까.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케이 역시 그 기억을 생각하고 있다는 데에서 밝아졌다가 그 기억이 두 사람에게 결코 좋은 시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어두워졌다.

“왜 그래?”

“그냥. 내가 여기에서 너한테 나뭇가지를 던졌던 게 생각이 나서.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네가 내 것이 되지 않아서? 사람은 가질 수 있는 게 아닌데 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아서…….”

엘리자베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는 게 우스웠다. 엘리자베스가 침울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케이가 말했다.

“난 그때도 이미 네 거였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피식 웃었다. 

“나 지금 진지하게 과거를 반성하고…….”

엘리자베스가 짐짓 밝게 말하려고 할 때였다. 램프 빛을 등지고 있어 어두웠던 케이의 얼굴에 더 이상은 못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붉은 기가 피어올랐다.

케이는 붉어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턱과 관자놀이에 힘줄이 돋아났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을 느끼며 조금 당황했다.

“내가 너한테 부족하다는 건 알아…….”

케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부족하다고?

엘리자베스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르고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뿐이었다.

케이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아까 계곡을 뛰어내려왔을 때만큼 숨도 차 있는 것 같았다.

“네 집에 달린 작은 마구간에서 자는 것도 괜찮다는 말도 여전히 유효해…… 매일 아침에 네 얼굴을 볼 수 있고 눈을 맞추며 얘기할 수 있다면 충분하겠지…….”

케이는 명치를 세게 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가슴을 둥글게 말고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지 못하며 계속 바닥을 차기만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막고 싶었는데 이 멍청한 소리의 끝이 궁금하기도 해서 그냥 두었다.

케이의 뺨에서 시작된 홍조는 귀까지 퍼져 있었다.

케이는 꺽꺽거리는 노동자의 어투를 쓰지 않으려고 자꾸만 말을 더듬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젠장할.

케이는 지금 이 순간 레본 땅에 있는 어떤 놈보다 더 신사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더 연습을 했어야 했나 싶지만…….

곰이라니. 그 망할 놈의 곰이 나타나 이 사냥터에서 엘리자베스를 위협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케이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내 눈 앞에서 한 시라도 떨어져 있는 건 견딜 수가 없어.

케이는 계속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살짝 고개를 들어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을 보는 순간 케이는 별 수 없이 다시 노동자의 어투로 천박하고 하나도 고귀하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 내가 네 옆에 합법적으로 매일 같이 있을 수 있는 거 말이야……. 그래,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물건이 아니지. 내가 너를 가장 값비싸고 귀한 것이라고 했던 말은 취소야. 너는 내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야. 하지만 넌…… 넌 할 수 있어. 나를 가질 수 있어.”

케이는 속으로 수없이 많은 욕을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온몸의 관절이 감히 주인의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케이는 간신히 엘리자베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머니에서 반지 주머니를 꺼내려다가 아까 쑤셔 넣은 총알을 바닥에 다 흘렸다. 케이는 결국 욕을 뱉었다.

“젠장할…… 젠장…….”

케이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바닥에 총알과 함께 흘린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내려다보았다.

케이는 한심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칠 자신이 없어서 눈을 반지 주머니에 고정하고 그것을 집어 올려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들고 제 성대를 비틀어 짜듯이 말했다.

“나와 결혼해주겠어?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멍한 얼굴로 케이를 내려다보았다. 케이의 붉어진 뺨을 한동안 가만히 보았다. 케이는 온몸이 불타고 있는 것처럼 괴로웠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몸부림을 지켜보다가 얼이 빠져서 말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청혼하는 거야.”

케이의 무릎 아래에서 돌멩이가 그의 관절을 아작 내고 있었지만 케이는 그런 통증을 느낄 새가 없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미래를 살자. 그렇게 하겠어. 반드시.”

케이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춘 건지, 아니면 드디어 진정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웃었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활짝 올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다. 엘리자베스의 무게가 케이를 덮쳐오는 통에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고 그녀의 몸을 지탱한 채로 겨우 버텼다. 그 와중에도 반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주먹 안에 꽉 쥐고 있다가 엘리자베스의 목덜미와 입술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엘리자베스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둔 채로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젠장할. 신사처럼 말하고 싶었다고.”

“걱정하지 마. 넌 절대 신사가 될 수 없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끼워준 반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케이의 뒤통수를 잡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삼켰다.

“너 울어……?”

“아니.”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붉어진 눈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케이의 뜨거운 체온이 제게로 옮겨 온 것처럼 느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넌 내 거야, 이제.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눈에 강한 욕망이 담겼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아당겨 제 몸에 붙이고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세게 빨아들였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숨이라도 된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에 매달려 정신없이 그의 입맞춤을 받아냈다.

지난 생에서 엘리자베스에게 사랑은 경멸이고 굴욕이었는데, 이번 생에서 엘리자베스에게 사랑은 변화가 되었다.

그녀를 변화시키고 그녀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

엘리자베스는 내일 아침 또 세상이 변해버릴 것을 생각하며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 마음으로 케이에게 매달렸다.

괜찮아.

네가 있으니까.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이제.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날이 될 거야. 케이.

오늘의 우리가 어제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니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안긴 채로 정신없이 그와 숨을 나누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개울 너머에서 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염병 떨고 이리 와! 투표가 끝났다고! 조지 국왕이 연설을 시작할 거야!”

윌슨의 목소리에도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놓아주지 않자 곧 윌슨이 개울가에 돌멩이를 던졌다. 차가운 물방울이 튀기자 엘리자베스가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윌슨은 낄낄 웃으면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아이고, 실수했네! 이 늙은이는 손힘이 없어서 실수를 자주 해!”

케이가 분노한 얼굴로 커다란 바위를 들어보였다. 그러자 윌슨이 손사래를 치면서 멀리로 도망갔다. 케이는 그런 윌슨의 뒷모습을 보다가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가자. 가야 할 시간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말했다.

“알겠어.”

* * *

조지는 각계각층에서 나온 후보자들을 앞에 두고 단상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레트니의 죽음을 알렸다.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연회장 끄트머리에 서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몇몇 귀족들은 애도의 표시를 했고 대부분의 평민들은 야유를 보냈다.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그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애도와 야유가 끝난 후의 조지의 말을 기다렸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저는 아들이 아니라 국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레트니의 시대는 갔습니다. 더 이상 소수의 권력층이 다수의 국민들을 지배하는 식으로는 이 나라가 굴러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계신 모두는 그 사실에 동의하여 이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후보자들은 잔을 들고 조지의 연설 중간 중간 동의의 표시를 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새로운 날이 왔습니다. 여기 있는 누군가가 패배하고, 또 누군가가 이긴다고 하여도 이 전쟁은 우리 모두의 승리입니다. 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조지의 연설은 거기까지였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렸다.

그 박수 소리에 맞춰 엘리자베스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연회장 곳곳에 울려 퍼졌다.

정말로 새로운 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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