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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95화 (29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95화

“어떤 자들이 의회의 주인이 될 것 같으냐?”

조지는 지나가는 사슴에게 풀을 먹이며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이곳이 레트니의 사냥터였을 시절 사슴은 절대 사람에게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남자들은 손에 짐승의 피 냄새를 묻히고 다녔고 여자들은 그 짐승을 잡아먹은 기름기를 입에 묻히고 다녔다.

“의회의 주인은 언제나 폐하와 국민들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조지는 피식 웃으며 사슴의 먹이를 주는 것을 그만두고 일어났다.

“그것 참 듣기 좋은 말이지만 의회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이제 의회는 국민들이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이 의회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인일 수가 없을 때가 있는 법이다.”

조지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에게 제 팔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흠칫하다가 그의 팔을 잡았다.

조지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더 깊은 평야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곤 엘리자베스의 뒤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엘리자베스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레트니가 죽었다.”

조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당황했다.

“폐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나와 다니엘 그리고 너만 아는 사실이야. 하지만 곧 이어질 연회에서도 이 사실을 알려야겠지.”

조지가 발로 쓱쓱 풀을 밀었다. 그러자 풀 비린내가 훅 끼쳐 올라왔다.

레트니가 죽었다니.

“레트니…… 아니, 내 아버지에게 누군가 독약을 건넨 모양이야. 아버지의 영예로운 죽음을 바라던 누군가가.”

조지의 밝은 머리카락 뒤로 석양이 지는 것이 보였다. 엘리자베스가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물었다.

“누가 말입니까?”

“니콜슨? 아니면 왕비…… 글쎄, 누굴까.”

“설마…….”

엘리자베스가 조지를 가만히 보았다. 조지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나는…….”

조지는 아무도 없는 평야를 눈으로 훑었다.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넓은 평야를 그대로 보존한 탓에 저택 쪽을 바라보지 않으면 약간 황량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의 영예로운 죽음을 바라지 않았느니라. 나는 그가 내가 차린 단두대 위에서 죽기를 바랐다. 국민들이 그를 끌어내고 재판장에서 그의 위선이 밝혀지며 그의 모든 밑바닥을 까 보이며 죽기를……. 나는 무척이나 바랐다.”

조지의 말에서 짙은 자기혐오가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럼 누군가 레트니에게 독약을 주고 그것을 레트니가 직접…….”

“직접이었을까 과연?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저 연회장 안에서는 직접이었다고 말해야겠지. 레트니가 직접 독약을 먹었다고 말이야. 망할 내 아버지는 그래도 마지막에는 명예를 아는 인간이었다고. 그렇게 레트니의 명예를 지키고 안 그래도 반발이 심한 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아직 네놈들이 아는 세계는 망하지 않았다는 위안을 줘야겠지. 레트니는 죽었다. 그리고 가짜 왕은 죽음으로써 가짜 세계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엘리자베스.”

네놈들이 아는 세계는 망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지옥이 있다면 그곳에서 클레몬트 공작이 그 말을 듣고 큰 위안을 얻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는 망하지 않았지만 변하고 있다.

그들이 붙잡고 있는 기존의 것에 대한 환상은 정말 그저 환상일 뿐이다.

“하지만 가짜는 그저 가짜일 뿐입니다.”

엘리자베스가 단호하게 말하자 조지는 엘리자베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잠시 그 말을 곱씹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는 가짜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럴 줄 알았어. 너의 이 단호한 얼굴이 보고 싶어서 너에게 이 얘기를 해줬는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조지는 빙그레 웃었다. 조지의 눈에는 아까 담겼던 자기혐오가 조금이나마 덜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따라 웃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멀찌감치 둘을 따르던 다니엘이 조지와 엘리자베스에게 잰 걸음으로 다가왔다. 뒤를 보니 군인 둘이 바쁘게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보였다.

“평원 근처에 곰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사냥터지기 둘이 장총을 들고 나가긴 했지만 평야 쪽에서 산책은 그만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아까까지 조지 근처에서 맴돌던 사슴 같은 작은 짐승들이 사라진 상태였다. 조지가 걱정스레 말했다.

“사람들의 안전에 주의하되 웬만하면 쫓아버리는 것으로 하라. 이런 좋은 날에 곰처럼 영특한 짐승을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

조지의 말에 다니엘이 군기가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 다니엘과 함게 평야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곧 어디선가 장군쯤으로 보이는 제복을 입은 자가 나타나 조지를 부른 탓에 엘리자베스만 군인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일은 그때 갑자기 벌어졌다.

검은 점 같은 것이 멀리 숲속에서부터 나타났다. 순식간에 집채만큼 커진 그것은 전속력으로 달려와 조지에게 가까워지더니 앞발을 들어 올렸다.

곰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곰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 순간, 조지가 차분하게 다니엘의 총을 빼앗아들어 곰의 어깨를 노렸다. 그러나 그 순간 곰이 날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엘리자베스는 조금 먼 거리에 있었으나, 그녀가 공포에 질려 몸을 떨자 엘리자베스를 호위하던 군인이 엘리자베스에게 다른 길을 안내했다.

“아무래도 곰 사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엘리자베스는 사방이 탁 트인 평야에서 곰이 날뛰는 동안 유유히 걸어갈 자신이 도무지 없었으므로 그의 말을 따라 작은 개울이 있는 길 쪽으로 함께 갔다.

엘리자베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군인에게 물었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요. 빨리 사냥을 마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실 겁니다.”

탕!

그 순간 군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총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군인은 이미 내리막길로 내려와 보이지 않게 된 저 위쪽을 힐끔 쳐다보며 기쁘게 말했다.

“아마 이미 잡으셨을 겁니다. 오늘은 연회 때 곰 고기가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이런 좋은 날에 곰 같은 영특한 동물을 잡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

군인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 고향에서는 좋은 날에 곰의 수놈을 잡아 푹 끓여먹으면 좋은 기운을 나눠가질 수 있다고들 합니다.”

엘리자베스는 군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놈이 수놈일까요?”

“글쎄요. 확실하지 않지만 제가 알기로 지금은 번식기라 암놈은 굴속에 있을 거고 수놈이 돌아다닐 겁니다. 지금 저렇게 설치는 놈은 수놈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스르륵.

그 때 개울 옆에 있는 덤불이 움직였다. 엘리자베스가 아까 본 곰 때문에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곧 그 덤불에서 작은 토끼가 튀어나왔다. 엘리자베스가 잔뜩 긴장한 것을 본 군인이 살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기분이 나빠져서 헛기침을 했다. 군인은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개울로 가더니 곤란한 얼굴을 했다.

“며칠 전에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났네요. 제가 다리가 될 만한 돌을 찾아보겠습니다.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종아리까지 첨벙첨벙 적시면서 큰 돌을 쌓기 시작하는 군인을 보며 그를 몇 번이나 말렸다. 조금 젖어도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군인은 나중에는 들고 있던 총을 엘리자베스 앞에 내려놓고 개울 안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돌을 쌓았다.

저렇게까지…….

엘리자베스는 큰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사냥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곰이 수놈이길 바라며 재차 군인을 말리기 위해 개울 근처로 걸어가려고 했다.

투둑.

덤불이 크게 움직이며 검은 그림자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덤불 속에 드러난 검은 그림자에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곰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몸의 너덧 배는 되는 것 같은 곰이 네발로 기어서 자신에게 걸어오는 것을 보며 머릿속이 완전히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는 사이에 옆에서 첨벙하는 소리가 났다. 군인이 곰을 보고 놀라 자빠진 것이었다.

“아, 아가씨!”

군인이 소리를 지르는 통에 곰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곰은 군인을 보더니 흥분한 숨소리를 냈다. 군인은 개울에 물이 불어난 탓에 빨라진 유속에 휩쓸려 자꾸만 첨벙거리며 곰을 자극했다. 곰은 앞발을 들고 당장이라도 군인을 덮칠 것처럼 손을 휘저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별 수 없이 군인이 내려놓은 총을 집어 들었다.

탕!

곰의 등에 총알이 명중했다.

곰은 등이 가려운 것처럼 몸을 비틀더니 엘리자베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총을 든 손이 달달달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절대로 맞출 수 없다.

엘리자베스는 아무렇게나 한 발을 더 쏜 다음 그것이 빗맞는 것을 지켜보고 뛰기 시작했다. 

다니엘과 조지가 있는 곳으로 가면 포수가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오르막에서 한 번 말을 헛디뎌 구르자 마음속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 장악했다. 엘리자베스는 일단 몸을 틀었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그나마 저택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뛰었다. 뒤에서 곰의 성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 발을 헛디뎠다. 

탕! 

뒤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엘리자베스의 몸은 숲 안의 작은 계곡을 구르고 있었다.

* * *

곰의 숨소리도, 총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지 얼마나 지났을까.

엘리자베스는 온몸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을 무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둠이 숲에 짙게 깔렸다. 엘리자베스는 곰이 붙잡혔든지, 아니면 엘리자베스를 추적하는 것을 그만뒀든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걸었다.

부엉이가 우는 소리나 나뭇잎끼리 부딪히는 소리에 신경이 쓰여, 아주 짧은 거리를 걷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굴러 떨어진 계곡으로는 다시 올라갈 수가 없었고 숲을 둘러서 나가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했다. 이대로 길을 잃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조지 국왕이 수색대를 보내 엘리자베스를 찾아내긴 하겠지만 그 사이 곰을 만난다면?

엘리자베스는 그 거대한 덩치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엘리자베스는 목숨 줄처럼 쥐고 있던 총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제대로 쏴야했다.

투둑—

그때 뒤에서 또 그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는 소리.

엘리자베스가 뒤로 돌았다. 그녀는 총을 들어 당장 그 쪽을 노렸다. 일단은 아무렇게나 쏠 생각이었다.

탕!

반동으로 손목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총알은 빗나갔다. 뒤에 있는 나무가 총을 맞고 파편을 튕겨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들고 있던 오일 램프로 나무 파편을 막아내며 뜀박질이라도 한 것 같이 가슴팍을 오르내리며 땀에 젖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날 죽일 셈이군.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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