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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94화 (29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94화

“좋아.”

엘리자베스의 대답과 동시에 케이의 케인이 높이 치켜올라갔다. 엘리자베스는 놀라서 케이를 붙잡으려고 했다.

‘저런 미친 놈!’

하란다고 진짜 하다니!

하지만 케이의 케인은 자작의 첫째 아들의 바로 옆을 지나쳤다. 자작의 첫째 아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케인에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그는 곧 케이를 노려보았다.

“이게 뭐 하는……!”

그때였다. 2층 예배석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마워요!”

그제야 자작의 첫째 아들은 케이의 케인에 걸려 있는 귀부인의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케이는 비웃음을 잔뜩 건 얼굴로 손수건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그는 2층 예배석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리로 내려오셔서 받으시지요, 부인.”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얼굴로 케이의 등을 주먹으로 때렸다. 케이는 아픈 척 얼굴을 찡그리며 자작의 첫째 아들을 보았다.

“왜 그러고 계십니까?”

그 말에 자작의 첫째 아들은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케이를 보며 욕이라도 해줄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노려보곤 휙 예배당을 나갔다.

케이가 삐뚜름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정말 때리는 줄 알았잖아!”

“지금이라도 해줄까?”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케인을 치켜들었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치켜떴다.

“그러기만 해.”

“나도 네가 진짜 하라고 하지 않을 줄 알고 물어본 거야.”

“넌 정말 이상한 놈이야.”

그때 2층 예배석에서 내려온 귀부인이 케이에게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하곤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케이는 신사처럼 다정하게 귀부인의 감사를 받은 후 엘리자베스에게 제 팔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얼굴로 케이를 노려보다가 그의 팔을 잡았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어. 내게 정혼자가 없으니 당연히 자신의 차지가 될 거라는 말투였다고. 그런데 자작의 첫째 아들이 선더렌에 정혼자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찍은 거야. 레본 귀족가의 아들씩이나 되는 주제에 타국에 있는 대학까지 유학을 가는 신사들은 대부분 그 타국에서 다른 여자를 만들러 가는 거지. 이쪽에도 한 여자, 저쪽에도 한 여자. 그런 그 여자들을 전부 정혼자라고 부르지.”

엘리자베스는 저질스러운 케이의 표현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놈한테 속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케이는 예배당을 나와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다른 놈이었으면?”

“뭐?”

“다른 괜찮은 신사가 나타나서 나한테 데이트를 신청하고 있었으면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농담조로 가볍게 말했는데 케이는 왜인지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표정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케이가 말했다.

“어떤 놈이어도 너한테는 괜찮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케이는 아까 자작의 첫째 아들이 엘리자베스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을 보곤 당장이라도 저 자식을 죽여버리겠다는 얼굴로 걸어왔다. 하지만 지금 케이의 말에는 마치 엘리자베스를 독점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처럼 들렸다.

케이는 교회 앞에 하커가의 마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곤 입맛을 다셨다.

“젠장할. 도개교까진 걸어가야겠군. 오늘 같은 날 이 근처에서 마차를 잡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노스리오든에서 프란시스와 함께 투표를 하고 사우스리오든에 새로 만들어지는 의회 청사 앞에서 있을 후보자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의회 청사의 출범식에 갈 예정이었다.

의회 청사에서 있을 출범식은 저녁 늦은 시간부터 시작되어 다음 날 오전 당선자들의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 이어지는 긴 정찬회였다. 물론 두 사람을 초청한 것은 조지 국왕이었다.

“사우스리오든에서 투표를 하고 바로 사냥터로 가자.”

교회 앞에서 협잡꾼들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케이의 말이 금방 묻혔다.

“헬렌 에르게니아에게 투표하세요!”

“올랜도입니다. 올랜도!”

“당신의 미래를 위해 투표하세요! 국민 한 명당 10파운트를 나눠줍니다!”

엘리자베스는 진정성이라곤 도무지 없어 보이는 전단지를 모아서 손에 들고 케이를 힐끔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잃어버릴까 두려운 듯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도개교까지 걸어갔다.

케이는 투표 날이라서인지 평소보다 유난히 사람의 파도가 몰려드는 도개교 위에서 옴니버스를 겨우 한 대 얻어 탔다. 엘리자베스는 뚜껑이 없는 마차 안에 태우고 케이는 뒷바퀴에 매달려 섰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얼굴로 케이의 조끼를 꽉 잡았는데,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놀려주려고 몇 번이나 한 손을 놓고 섰다. 엘리자베스는 그럴 때마다 케이의 명치를 퍽 퍽 때렸다.

청량한 가을 하늘이라니. 리오든에서는 몇 없는 날씨였다.

투표소에 도착한 엘리자베스는 삼삼오오 모여든 노동자들 틈에 끼어 투표를 마쳤다.

그 후 케이와 함께 사냥터로 가는 마차를 잡았다. 노스리오든에서보다는 마차를 수월하게 잡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 투표했지?”

마차 안에서 케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대답 대신에 케이의 손을 잡았다. 불안한 얼굴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겠지?”

“뭐가?”

“이상한 후보자들도 많고…… 레트니가 아직 죽지도 않았고……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잖아. 상원 자리를 놓고도 귀족원을 다시 세습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그건 모르는 거지. 하지만 겨우 몇 달 전을 생각해봐. 이게 가능한 일이었는지.”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제 쪽으로 잡아당겨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손을 들어 투표소 밖으로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내일은 오늘보다는 나은 날일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이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낼 내일이 궁금했다.

그 내일이 디트리히 폰과 엘우드 밀의 고향을 바꿔놓을지도.

그 먼 미래에서도 조지 국왕의 권리장전이 지켜지고 있을까? 더 이상 국가에 의해 국민이 희생당하지 않고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말살시키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 세계가 왔을까?

인류에게 자유가 도래했을까?

그건 현재를 사는 엘리자베스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래는 낯선 땅이었으니까.

* * *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함께 익숙한 숲이 펼쳐진 사냥터에 발을 내디뎠다. 사냥터 중앙에 있는 커다란 저택 앞에는 많은 마차들이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군인 둘이 다가왔다. 그들은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 경과 케이 하커 씨로군요. 다니엘 경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경 칭호가 이럴 땐 참으로 민망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군인들은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에스코트했다.

사냥터의 거대한 평원은 엘리자베스에게는 쉐필드를 떠올리게 했다. 엘리자베스는 저택까지 걸어가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사냥터에서 과거에는 사냥감이었을 토끼나 사슴을 멀찌감치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숲 앞에 있는 평원까지 나와 풀을 뜯거나 사람들을 고요하게 구경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다니엘과 윌슨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엘리자베스의 눈에 띄었다.

“엘리자베스 경. 케이 하커.”

윌슨은 케이에게는 경칭을 쓰지 않았다. 그가 케이를 꽉 안았다. 케이는 윌슨을 밀어내며 말했다.

“이런데서 친한 척해봤자 표를 얻는 데에 도움 하나도 안 된다고.”

“뭐라고? 이 건방진 자식이.”

윌슨은 당장 케인으로 케이를 때리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주변을 힐끔 보더니 포기했다. 다니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케이에게 인사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네 사람은 서로 인사를 짧게 나누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화려한 연회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구경할 수 있었다. 원래의 반들거리는 대리석 위에는 푹신한 붉은 카펫을 깔았고 천정고는 오히려 더 높여서 주변이 잘 보이도록 만들었다.

기존의 의회청사가 독립된 섬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번의 의회 청사는 탁 트인 정원이 전부 보이는 구조였다. 엘리자베스가 불안한 얼굴로 다니엘에게 물었다.

“청사에서 테러가 있었던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괜찮을까요? 이렇게 창문이 많으면…….”

다니엘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창문이 없는 곳이라고 해서 테러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걸 오히려 증명했던 꼴이 아닐까요? 폐하께서는 그 일이 있고 첫 의회 청사는 많은 국민들이 밖에서 안을 지켜볼 수 있는 투명한 느낌으로 만들길 원하셨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도 전의 의회 청사와 지금의 의회 청사가 달라진 것은 선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귀족원, 평민원과 달리 상원과 하원의 자리에는 구별이 없었고 자리는 마구 섞여 있었다.

자본가, 노동자, 평민, 귀족, 여자, 남자, 이교도까지 전부 앉을 수 있는 그 많은 자리를 엘리자베스가 눈으로 훑었다. 그러자 다니엘이 말했다.

“전처럼 하원에 출마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엘리자베스 경?”

“왜 갑자기 경이라고 부르시죠?”

“보는 눈이 많지 않습니까.”

다니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케이가 뒤에서 듣다가 코웃음을 쳤다. 다니엘과 케이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이 또 으르렁거리는 것이 보기 싫어 재빨리 대답했다.

“생각 없어요. 그땐 내가 아니면 안 되니까 했던 거고, 지금은…….”

엘리자베스는 정원에서 각자 잔을 들고 서 있는 후보들을 바라보았다.

협잡꾼을 동원한 자본가들도 있었지만 검은 피부를 가진 이교도인 같은 파격적인 후보들도 눈에 띄었다.

“지금은 내가 아니어도 되니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 왕은 엘리자베스와 다니엘, 윌슨과 케이가 청사 안을 다 구경했을 즈음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긴 정찬회가 이어지기로 예정된 만큼 조지는 편한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섰다.

조지는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건네며 그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몇몇 귀족이나 자본가 후보자들은 조지의 악수가 어색한 것 같아 보였지만 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수를 했다. 레트니가 귀족과 자본가들에게 늘 충성 맹세의 의미로 손등에 키스를 받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차례가 돌아오자 조지는 역시나 반갑게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그래. 왔구나, 엘리자베스.”

“축하드립니다, 폐하.”

조지는 엘리자베스의 인사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을 말이냐?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는가.”

“전쟁이 아니라 페하의 승리를 축하드리는 것입니다. 레본 땅이 전부 조지 국왕 폐하의 결단을 존경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지가 살짝 웃었다. 주변에 있는 후보자들이 모두 엘리자베스의 말에 박수를 쳤다. 조지는 그들에게 미소로 화답하고는 엘리자베스와 케이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참 영리한 말이로구나. 네가 원하는 것을 다 얻고 나를 추켜세우고 있어.”

엘리자베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조지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은 그대로 케이를 보고 물었다.

“잠시 엘리자베스를 내가 데려가도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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