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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93화 (29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93화

“시간여행이요?”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아루쉬를 보았다. 

“뭐 과거로 가거나 미래로 가거나 그런 거 말이에요?”

엘리자베스는 애써 모르는 척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루쉬가 대답했다.

“그래요. 그 사람의 경우에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었어요. 그 약초에 얽힌 사연이에요. 이 약초를 가지러 아주 먼 미래에서 온 한 사람이 바하에 도착해 초록빛이 나는 약초를 찾았다고 해요.”

엘리자베스는 뒷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루쉬를 보았다. 그러자 아루쉬의 검은 눈동자가 관대하게 빛났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그 약초를 왜 찾았다고 하던가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아루쉬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나중에 일어날 엄청난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왔다고 했어요. 로슈니가 그 전쟁을 막을 약이 될 거라고. 로슈니가 어떻게 전쟁을 막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냥 로슈니와 관련된 전설로 떠도는 말이니까요. 어쨌든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아루쉬는 마치 무언가를 아는 사람처럼 창문 밖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는 남은 9개의 부족이 과거에 있었던 영역 분쟁의 여파로 서로 반목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현재의 사람들이 잘 살면 미래에 있는 나의 고향도 다른 모습이 될 거라고. 현재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그러니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를 잘 살아가라고. 그렇게 하면 미래는 반드시 화답할 거라고.”

아루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학술원 정문에도 쓰여 있잖아요? 후세를 위하여, 라고. 지금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은 미래에 영향을 줄 거예요. 어쩌면 지금 당신들이 열심히 살면 그 하얀 피부에 초록 눈을 가졌다는 이방인의 고향 땅에서 전쟁이 사라질 수도 있겠죠. 하얀 피부의 초록 눈이라면 이오페아 사람 아니겠어요?”

하얀 피부에 초록 눈.

엘리자베스는 침대 위에 올려둔 낡아빠진 까마귀 가면과 수술도구를 내려다보았다. 케빈 역시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그것을 바라보다가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가 심장께를 쥐었다.

현재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라니.

아루쉬의 말대로라면 디트리히 폰과 엘우드 밀이 바뀐 현재 때문에 미래에서는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천진한 얼굴을 보았다. 아루쉬가 뭔가를 알고 하는 말인 것만 같아서 그를 추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것 참, 좋은 교훈이 있는 전설이네요. 그렇죠?”

아루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우리 바하에서는 엄마 아빠들이 잠자리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이 전설을 얘기해주면서 빨리 자야 한다고 말하죠. 그래야 내일이 오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날일 테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날일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아루쉬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맴도는 것을 느꼈다.

* * *

일요일 아침, 많은 신도들이 교회에서 쏟아져 나왔다. 케이는 공장에 갔다 오자마자 마차를 레트니 애비뉴 끄트머리에 있는 교회 앞으로 돌렸다. 마차 문을 열고 케이는 교회에서 쏟아져 나오는 귀족들 틈에서 프란시스를 향해 손을 들었다.

프란시스는 제 장갑을 매만지며 케이에게로 걸어왔다.

“대체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프란시스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케이가 프란시스가 들고 있는 성경가방을 빼앗아 들고 마차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예배에 참석하고 싶지 않아서요. 신자도 아니면서 대체 왜 교회에 이렇게 열심히 나오시는 거예요.”

“시끄럽다.”

프란시스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면서 케이의 가슴팍을 들고 있던 양산으로 세게 때렸다. 케이는 당연히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난 공장을 가진 사람이야. 이 나라, 이 땅에서 인맥이 없이 사업에 성공하는 자도 있니? 그런 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저 위에 신이 있다면 참 듣기 좋아할 소리로군요. 그런 불순한 의도로 예배에 나오고.”

케이는 비릿하게 웃으며 프란시스의 손을 잡았다. 프란시스는 하늘을 힐끔 쳐다보곤 케이의 손을 지탱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케이는 뒤따라오는 메리의 손을 잡아주다가 그 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요?”

“아, 4번지에 사는 자작 말이다. 그 첫째 아들이 선더렌으로 갔다가 돌아왔다더구나. 그 아들이 엘리자베스를 무척이나 보고 싶어 했다고 해. 선더렌에도 엘리자베스가 탄저균 종두법을 성공했다는 소식이 한참 돌았다고 하잖니. 그 아들도 선더렌에서 ‘대학’이라는 걸 다녔다는데 과학에 관심이 많은지 둘이 한참이나…… 케이! 케이 하커!”

프란시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케이가 메리와 프란시스를 마차에 두고 교회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프란시스는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케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메리가 물었다.

“어떡할까요? 모시고 올까요?”

“됐다. 오늘이 투표 날 아니냐. 나는 땡볕에서 오래 기다리고 싶지는 않구나, 메리. 난 많이 늙고 낡았어. 저 아이들은 젊으니까 땡볕에서 오래 걸어도 괜찮겠지. 게다가 난 투표가 끝나면 갈 곳도 있어.”

프란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인정사정없이 마차 문을 닫아버렸다. 메리는 그 모습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사우스리오든에서 여공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 말씀이시죠?”

메리의 질문에 프란시스는 딴청을 피웠다.

“여공들이라니. 무슨 그런 말을. 케이 하커가 알면 또 난리를 피울 게야. 여자들끼리 은밀한 다과회를 가지는 것으로 하자.”

“은밀한 다과회 덕분에 부인께 요새 생기가 생겨서 기뻐요.”

메리가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프란시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그 어린 여자애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젊어지는 기분이 들어.”

프란시스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허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가자, 토비. 지금 투표소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마차를 세울 곳도 없다고 하더구나!”

프란시스가 다급하게 토비를 재촉했다.

토비는 급하게 마차를 몰았다.

프란시스가 창문을 열고 슬그머니 마차 좌석 아래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었다. 케이나 엘리자베스에게 들키면 큰일이었으므로 마차에 숨긴 것이었다. 프란시스는 담배 연기를 창밖으로 내뿜으며 서늘해진 가을바람을 맞았다.

레본에서 유일하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계절이었다.

프란시스는 창틀에 팔을 기대고 투표소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투표소로 쓰이는 건물의 위에는 이런 천막이 걸려 있었다.

[국민들이여, 투표하라.]

평민이라고도, 귀족이라고도, 남자라고도, 여자라고도, 노동자라고도, 자본가라고도 칭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무리.

이제 이들을 레본은 ‘국민’이라고 불렀다.

“젠장할. 이 나라에 국민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새치기라도 해야 되나…….”

프란시스가 중얼거렸다.

* * *

* * *

엘리자베스는 자작의 첫째 아들에게 붙잡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였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만나 영광이라는 말로 처음에 엘리자베스를 붙잡더니 프란시스와 메리가 케이가 기다릴지도 모른다고 먼저 나갈 때까지 계속해서 자신이 아는 종두법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엘리자베스가 바로 백신을 만든 사람인데도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중간 중간에 황당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네, 저도 다 아는 얘기예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2백 년 전에 시행되기 시작했던 천연두의 종두법이 이렇게 백신의 기원이 되다니…….”

그걸 제가 만들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학술원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엘리자베스를 만난 신사들은 이제 엘리자베스가 교수이기 때문에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했지만 은근히 친한 척을 하고 존경심을 가진 척 다가와서 잘난 척을 했다. 엘리자베스가 다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럴 때 엘리자베스는 대체로 그들에게 경고를 날리는 편이었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곳은 레트니 애비뉴의 교회였고 프란시스는 토닉워터의 대대적인 홍보를 위해 이곳에 주일마다 나오는 것이었다.

토닉워터는 케이의 예언대로 불티나게 팔려, 음식점이나 펍에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리 행상이 팔아치우는 가짜 토닉워터에 반한 사람들은 펍이나 음식점에서 진짜 토닉워터를 마시길 원했다. 미리엄은 처음에는 기뻐하다가 나중에는 점점 경악스러워지는 주문량에 혀를 내둘렀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이 앓는 소리를 할 때마다 공장이 잘 나갈수록 주주의 몫도 커지는 게 아니냐고 다그쳤다. 그 후 미리엄은 엘리자베스를 악덕 공장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왜 내가 악덕 공장장이에요!’

‘희망고문하면서 은근히 초과 근무를 시키잖아요! 이번에 윌슨이 출마하면서 내세운 게 14시간 이상 노동 금지인데! 요새 정당원인 내가 그걸 못 지키고 있어요!’

미리엄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노동조합 정당에서 내세운 후보는 바로 윌슨이었다. 윌슨은 몇 번 고사했지만 사실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케이는 국회의원에는 정말 관심이 없었고 다른 협잡꾼들은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윌슨은 결국 출마 선언을 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의회주의 권리장전이 선포된 이후 첫 선거일이었다.

리자베스는 기대되는 마음으로 케이를 만나 투표를 하러 갈 생각이었는데, 케이를 만나기는커녕 자작의 첫째 아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다 아는 얘기를 듣느라고 정신이 몽롱해져만 갔다.

그때였다. 자작의 첫째 아들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정말 말이 잘 통하는 것 같군요, 우리.”

“우리가요?”

엘리자베스가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함께 걸으면서 더 얘기를 나누실까요?”

“같이 걷자구요? 오늘 투표하러 안 가세요?”

엘리자베스가 곤란한 얼굴로 주변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투표라뇨. 거긴 평민들이 가득할 텐데, 거기다가 나온 후보들도 썩 맘에 들지 않아요. 투표소 설치라도 귀족들은 따로 투표를 할 수 있게 해놨으면 또 모를까……. 제가 듣기로는 아직 정혼자가 없으시다고 들었는데…….”

자작의 첫째 아들은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은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가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색의 케인이 그의 손을 쓰윽 뒤로 밀어냈다.

놀란 엘리자베스가 뒤를 돌아보자 매끈한 케인을 들고 불쾌한 기색은 조금도 숨기지 않은 케이가 서 있었다.

이를 악문 케이가 자작의 첫째 아들에게 말했다.

“이 신성한 예배당에서 표정이 너무 음습하군.”

“뭐, 뭐라구요?”

자작의 첫째 아들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그는 케이가 들고 있는 케인을 탁 쳐내며 말했다.

“이게 무례하게 뭐하는 짓이오! 당신!”

“무례는 당신이 논할 게 아닌 것 같소만. 선더렌에 약혼자까지 있는 자가 할 말이 아니다, 이거지.”

케이의 말에 상대의 어깨가 움찔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자작의 첫째 아들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고 케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이제 온 거야…….”

케이는 그 말을 듣더니 만족스럽게 웃으며 엘리자베스에게 마주 속삭였다.

“당장 깨버리고 도망갈까?”

케이는 케인으로 살짝 자작의 첫째 아들을 가리켰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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