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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92화 (29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92화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대답에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원에 출마할 생각 있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원?”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케이의 얼굴이 다시 원래의 얼굴색을 찾았다.

“아까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나 보군.”

켄터베리 홀에 모인 노동자들은 온통 노동조합 정당의 대표로 내보낼 국회의원 후보에 대한 얘기로 정신이 없었다. 그들의 입에 제일 많이 오르내린 것은 당연히 케이와 윌슨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경’ 칭호를 사양하긴 했어도 하원에 출마하는 것만은 당연히 나설 것이라고 여겼다. 그건 하커 가문의 영광이기도 했지만 케이가 바라는 평민들도 참정권을 가진 세상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가 볼 때, 아니, 그 누가 보더라도 케이만큼 평민들의 참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할 사람은 없었다.

“아니. 관심없어.”

하지만 케이의 대답은 단호했다. 엘리자베스는 당혹스러웠다.

“왜?”

“왜냐니. 관심이 없으니까.”

케이는 당연하지 않으냐는 듯이 대답했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삐딱한 자세로 걸어가는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알던 그대로였다.

케이가 그대로라는 게 엘리자베스에게는 무척이나 위안이 되었다.

엘우드 밀이 죽고, 케이가 엘우드 밀의 손을 탄 총과 탄환 주머니만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케빈은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에게 큰 기회를 주었던 삼촌이 죽었다는 사실이 슬픈 것 같기도 했지만 그뿐 아니라—

‘내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나는 여기 남고…… 멍청한 삼촌만 혼자…… 왜 죽은 거예요. 왜! 죽지 않고 견딜 수도 있잖아. 응?’

후회와 미련이 남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 역시 그랬다. 때때로 엘우드 밀에게 했던 모진 말 같은 게 생각나면 그 자리에 오래 멈춰 서서 생각에 잠겨들고는 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으로.

엘리자베스는 케이만은 그런 후회의 소용돌이에 잠기지 않길 바랐다.

“왜 관심이 없냐고 그러니까.”

엘리자베스가 대꾸하자 케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정치 같은 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바라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야. 다른 사람들의 행복, 안위, 평화 이런 거에 관심 있는 사람들. 대표적으로 앰버나 너 같은 오지랖 넓은 인간들이 있겠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케이의 눈동자는 아주 찰나 욕망으로 드글거렸다.

엘리자베스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눈빛보다는 케이의 말이 신경 쓰였다.

케이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케이가 한 일들은 전부 평민들을 위한 일이 아니었던가? 사업가가 제 몫을 굳이 떼어서 노동자들에게 나눠준 것은? 참정권 운동가들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대온 것은?

케이는 가끔 너무 심한 헛소리를 했다.

엘리자베스가 황당한 얼굴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너만큼 남들 인생에 관심 있는 사람이 어딨어? ‘경’ 칭호도 반납하고 노동조합의 정당 설립까지 도왔잖아.”

“그건 네가 원하는 걸 테니까.”

케이의 눈에는 조금의 허풍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담백함이 오히려 겁이 나 뒤로 물러났다.

“내가 원할 테니까 ‘경’ 칭호도 포기하고 정당 설립을 도왔다고? 거짓말 마. 그건 네 동료들을 위한 거였잖아.”

케이는 코웃음을 쳤다.

동료. 동지. 동무.

집단이 살아남기 위해 내부인들에게 주는 칭호들이었다. ‘경’ 칭호는 평민이 레본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호였지만 엘우드 밀에게는 동무라는 칭호가, 윌리엄 조쉬에게는 동지라는 칭호가, 또 앰버 같은 사람에게는 동료라는 칭호가 훨씬 더 중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그걸 위해 ‘경’ 칭호를 포기했다고 믿었다.

“‘경’ 칭호? 나는 그냥 케이 하커야. 프란시스가 문 밖에서 떨고 있는 나를 집 안으로 들여와 이름을 짓기도 귀찮아서 그저 글자 하나를 선심 쓰듯 던져준 내 이름, 케이. 거기에 내가 가장 경멸하는 나의 성, 하커. 그 뒤에 뭔가가 붙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

K.

그의 이름 뒤에 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덧붙이곤 했지만 케이에게는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제 이름이 아무렇게나 쓰이고 아무렇게나 불려도 별로 상관없었다.

‘너한테 줄 손수건에 수를 놓는 중이야.’

잔뜩 상처가 난 손으로 엘리자베스가 제 이름을 수놓은 손수건을 보면서 케이는 화가 났었다.

나한테 손수건이, 이름이 왜 필요하지?

넌 몰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네가 아닌 다른 누구한테도 나는 내 이름을 불리고 싶지 않아.

이름도, 성도 빼앗긴 채로 네가 사는 거대한 저택의 마구간에서 새우잠을 잔다고 해도 나는 별로 상관없어. 

네 작은 입술 사이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올 때, 네 붉어진 뺨이 나를 생각하느라 달아올랐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때를 제외하곤 내 이름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 이름 뒤에 뭐가 붙든 쓸데없지.”

엘리자베스는 물끄러미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

엘리자베스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표정을 지어보일 때마다 하얀 피부 위의 짙은 눈썹은 무서운 척 휘어졌지만 케이가 볼 때는 귀여울 뿐이었다.

“난 몰랐어. 네 이름에 그런 사연이 있는지. 하지만 난 네 이름이 좋단 말이야. 네가 다른 이름인 건 싫어.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녀의 입술이 휘어졌다. 케이는 선생님한테 혼이 나면서도 장난을 치는 학생처럼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럼 나도 내 이름이 좋은 걸로 해.”

“좋은 걸로 하는 게 아니라…….”

엘리자베스는 무서운 선생님처럼 케이를 올려다보며 허리에 손을 짚었다. 케이는 웃으며 그런 엘리자베스를 품 안에 가뒀다. 엘리자베스의 콧김에서 짙은 포트와인 냄새가 났다. 케이가 중얼거렸다.

“이 주정뱅이…….”

“얼마 안 마셨는데도?”

“조용히 해.”

케이는 잠시 엘리자베스를 안고 가만히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목덜미에 대고 숨을 불어넣으며 잠시 쉬었다. 케이가 말했다.

“넌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몰라.”

“알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아.”

엘리자베스는 빨개진 얼굴을 케이의 어깨에 비볐다. 케이는 쿡쿡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았다.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에서는 끝나가는 여름의 냄새가 났다. 습하고 비릿한 냄새.

케이는 그 냄새를 맡으며 참을 수 없는 죄악감을 느꼈다.

케이는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말했다.

“난 네가 아니었으면 저 사람들 따위 돕지 않았을 거야. 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어. 내가 관심이 있는 건 내 행복뿐이야. 내 행복에 관계있는 건 오로지 너밖에 없었어. 말했잖아. 내 인생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걸 허락받아본 건 너뿐이야.”

케이의 목소리에 짙은 불안함이 베어났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커다란 몸이 이렇게 불안함으로 옅게 떨려오는 것을 느낄 때면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도 그래.

내가 좋아하는 걸 가져본 건 네가 전부야.

너를 잃으면 나는 전부를 잃어버리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런 말을 입 안으로 삼키고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알아.”

“넌 몰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 하커가 몸을 숙여 엘리자베스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너는 내 세상을 바꿀 거야. 분명히 알 수 있어. 그러니까 난 널 절대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너의 케이 하커.”

케이가 뒤로 물러나 붉어진 귀를 한 채로 엘리자베스를 쳐다보았다.

“너…….”

케이가 제 입을 손등으로 막았다. 케이의 눈이 커졌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멍청하긴. 절대 날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해놓고 왜 넌 내 거라고 했어? 바보 같아. 넌 정말…….”

케이의 얼굴에서 시작된 열기는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엘리자베스가 말한 그 구절을 케이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별궁에 머무는 동안 로킨트에서 편지를 가지고 나오긴 했지만 그건 일종의 신변 정리에 불과했다. 엘리자베스에게 그런 편지를…….

엘리자베스 말대로 그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편지를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케이는 이를 악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추궁하듯이 말했다.

“대답해봐.”

케이는 빨개진 얼굴로 제 눈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왜겠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짙어지는 것을 보았다. 제 몸을 타고 흐르던 수치가 순식간에 욕망으로 색을 바꾸는 것이 느껴졌다. 염치도 없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이 달싹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삼켰다. 케이는 입술이 떨어졌다가 다시 합쳐졌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합쳐질 때마다 말했다.

난 네 거야.

나는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몸을 마치 동아줄이라도 붙잡듯이 꽉 안았다.

* * *

열흘 정도의 시간이 재빠르게 지나갔다. 후보자 등록, 선거 준비는 약간의 잡음이 있기는 했어도 일정에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학술원에는 엘리자베스의 연구실이 생겼다.

놀라운 것은 엘리자베스의 연구실이 바로 켈리어스의 연구실이었다는 것이다.

내기에서 진 후 켈리어스는 그간 연구비를 횡령해온 사실이 드러나 방을 빼게 되었다. 방을 빼는 날에 난동을 부려 보비들에게 끌려나가다시피 했다는데, 엘리자베스는 다른 학생들처럼 그걸 구경하러 올라가진 않았다.

별로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도 응징의 서사를 좋아했지만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자가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것을 바라보는 건 통쾌함보다는 답답함을 안겨줄 뿐이었다.

아루쉬는 선거가 끝나는 대로 앰버와 함께 멜니아에 들렀다가 다시 자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케이 하커 씨가 약속대로 국왕 폐하를 뵙게 해주었습니다. 뭐 약속을 받을 때만 해도 그 대상이 분명 레트니 국왕 폐하였지만요.”

아루쉬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그간 엘우드 밀이 지내던 방을 청소하며 말했다. 아루쉬는 케이 덕분에 레본과 공정한 무역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책도 많이 얻었구요.”

아루쉬는 엘리자베스가 사다준 이오페아의 의학 책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하지만 케빈과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밝지 않았으므로 그도 이내 미소를 거뒀다.

케빈은 엘우드 밀의 침대 맡에서 꺼낸 낡은 수술도구 주머니를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이건 엘리즈가 가져요. 난 수술 같은 건 할 줄 모르니까.”

엘리자베스는 E라고 적힌 수술 도구를 받아들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물건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걸 사용할 사람만 없다는 것이.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서 있을 때 아루쉬가 물었다.

“그 약초를 사용해 환자는 잘 구했나요, 케빈?”

케빈은 아루쉬의 말에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았다. 아루쉬가 말하는 약초는 로슈니일 것이었다.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구했어요. 덕분이에요.”

“그 약초에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들어볼래요?”

아루쉬는 케빈의 말을 듣더니 씨익 웃으며 짐짓 밝게 말했다.

“시간여행을 한 사람의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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