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291화 (29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91화

“하지만 앰버가 노동자가 아닌데, 어떻게 노동조합의 장이 됩니까?”

조용한 장내에서 저 멀리 있던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윌슨이 앰버를 보았다. 앰버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전 조합장으로 출마할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요.”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웃는 것을 보며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졌다.

앰버는 노동자가 아니다.

엘리자베스 역시 예전에는 마음으로 동조했을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앰버는 밴드 연주자들에게 눈으로 인사를 해보이곤 무대에서 걸어 내려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윌슨이 이렇게 말하기 전에는 말이다.

“앰버 모건과 무희들 역시 노동자로서 조합에 가입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 무대에서 춤을 추고 술집에서 서빙을 하고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사람들 모두 노동자로 노동조합에 가입을 한다면 말이야. 이들도 못할 게 없지 않나.”

윌슨의 말에 갑자기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앰버는 멈춰 서서 윌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을 힐끗 보았다. 미리엄이 중얼거렸다.

“그건…….”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그때, 3층 끄트머리에서 케이와 비앙카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뭔가를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러다가 비앙카가 한숨을 내쉬며 케이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본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리엄이 말했다.

“괜찮은 생각인데? 어쨌거나 그들도 노동자잖아!”

미리엄의 말에 주변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미 눈은 3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찾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엘리자베스를 지목해서 말했다.

“여기에 우리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이 있으니까 의견을 한 번 물어보죠. 안 그래요?”

엘리자베스는 ‘높은 사람’이라는 말로 지목을 당하고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미 주변 노동자들은 전부 엘리자베스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 *

“엘리베이터에다 쏟으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비앙카는 두 남자들이 싸우다가 한 남자가 술통에 아예 통째로 빠져버리는 바람에 더러워진 술통을 들고 3층으로 가고 있는 케이에게 잔소리를 했다. 케이는 술통을 쏟아버릴 것 같은 몸짓을 해보이며 비앙카를 겁줬다.

“야!”

“시끄러워. 앵앵거리지 좀 마.”

케이는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 밖으로 보이는 붉은 얼굴의 엘리자베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홀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빨개질 때마다 스스로의 볼도 빨갛게 달궜다. 케이가 그 광경을 보며 이를 아드득 가는 것을 보곤 비앙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왜 웃어?”

케이는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절당했지?”

비앙카는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케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뭘?”

“청혼 말이야. 했는데 거절당했잖아.”

“뭐?”

케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비앙카는 뻔하다는 듯이 들고 있던 수건을 어깨에 얹고는 거만한 자세로 말했다.

“뻔하지. 저런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가 널 쳐다볼 일이 뭐가 있겠어. 게다가 이제 왕족이잖아. 이웃나라 왕자님쯤 되는 남자들이 줄줄이 청혼을 해댈 텐데 굳이 너를 골라 결혼할 이유가 없지. 그러니 속이 타서 얼굴이 이런 거고.”

케이는 구구절절하게 맞는 말만 하는 비앙카를 노려보며 물었다.

“내 얼굴이 어떤데?”

“안달이 났어. 집문서를 잃어버리고도 도박판에 미련이 남은 빚쟁이 같아.”

케이는 헛웃음을 짓고 엘리베이터 바닥에 술통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엘리베이터가 출렁거렸다. 비앙카는 비명을 지르며 케이에게 더러운 수건을 던졌다.

“이 미친놈!”

“그럼 네가 들어.”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수건을 술통 위에 걸쳐놓았다. 비앙카는 잠시 식식거렸지만 혼자서 술통을 전부 들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술통을 다시 들어 올린 케이는 비앙카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지고 갔다. 아슬아슬한 외부 계단 난간 위에 술통을 올려놓자 비앙카가 더러워진 술로 청소부가 외벽을 청소할 거니 그냥 두고 가라고 말했다. 케이가 순순히 복도로 나왔을 때 무대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앰버 모건이 조합장 후보로 나온다면 나는 앰버를 밀어줄 거다, 모두들.”

윌슨의 목소리였다. 케이는 난간에 기댄 채로 당황한 앰버의 얼굴을 보았다. 비앙카가 그 모습을 같이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사고 쳤네, 저 늙은이.”

케이가 비앙카를 힐끔 보며 말했다.

“왜 사고야?”

“왜냐니? 저 승리에 도취된 남정네들이 앰버한테 노동조합장을 내준다고? 절대 그러지 않을걸?”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불만이 가득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앙카는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 말이 맞지 않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비앙카가 말했다.

“거 봐.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무희는 무희고, 남자들은 남자들이고…… 왕족은 왕족이야.”

비앙카는 1층에 있는 엘리자베스를 가리켰다. 그러곤 손가락을 그대로 옮겨 케이를 가리켰다.

“그러니 거절당하지.”

“……거절당하지 않았어.”

케이는 중얼거렸다. 케이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비앙카가 얼굴을 찡그리고 케이에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라는 거야? 안 들려!”

“거절당하지 않았다고. 아직은.”

케이의 자조적인 목소리를 듣더니 비앙카가 아, 하는 입모양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키득거리며 난간에 기대어서 케이를 놀렸다.

“그러니까 거절당할까 봐 시도도 하지 않았구나? 어차피 안 될 테니까?”

케이는 비앙카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아직은 안 했다고 했지…….”

그때 무대 위로 엘리자베스가 올라왔다.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케이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다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안 할 거라곤 안 했어.”

엘리자베스는 쭈뼛거리며 무대 위에 올라와서는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술을 나르는 종업원들,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들 모두 조합원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밀리와 여공들이 조합원이 되었던 것처럼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무대 아래에 있던 남자들에게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여공들 몇몇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비앙카는 케이 하커가 당장이라도 1층으로 뛰어 내려가서 야유를 내지르는 놈들의 입을 찢어버리려고 할까 봐 다급하게 케이를 보았는데 케이는 그럴 것 같은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삐딱한 자세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말이 됩니까? 저들은 노동을 하지 않잖아요!”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게 무슨 노동이야!”

“실내에서 옷이나 팔고 시계나 파는 것도 노동이라고 부르다니!”

엘리자베스는 잠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들썩이도록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비앙카는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쩌나…… 불쌍한 아가씨가 패닉이 왔나 보네.”

“그럴까?”

케이는 비앙카에게 담담하게 되물었다. 비앙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엘리자베스는 힘을 모으듯 모았던 숨을 모두에게 내질렀다.

“조용히 좀 해봐요! 조용히!”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비앙카가 놀란 눈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끼리만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거예요? 그럼 노동조합 숫자가 늘지 않잖아요! 가게 점원, 가게 사장, 가수, 연주자 모두 다 노동조합에 포함시키면 우리 숫자는 수백만까지도 늘어날지 몰라요. 그런데 그걸 포기하자구요? 제정신이에요?”

아까까지만 해도 빨갰던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분노한 목소리를 들으며 비앙카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수백만이면 우리가 의회 의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지도 모르고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바뀔 수도 있는데, 또 자본가들이 호의라도 베풀듯 이번 한 번만 주식을 나눠주는 게 아니라 상시적으로 나눠주게 할 수도 있는데 그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거예요? 뭣 때문에요? 겨우 자존심 때문에? 대답해봐요! 뭣 때문이냐구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장내가 다시 웅성거렸다. 미리엄이 소리쳤다.

“맞아. 모일수록 우리 힘이 커지는 거잖아!”

미리엄의 말을 들으며 케이가 비앙카를 보았다. 비앙카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아가씨가 말을 잘 하네?”

“세상이 바뀌어도 남자는 남자고 왕족은 왕족이라며?”

“글쎄. 내가 모르는 새에 세상이 더 바뀌었나 보지.”

케이는 비앙카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비앙카는 계단을 내려가는 케이의 뒷모습을 보며 품 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어 불을 붙이고 길게 빨아들였다. 1층에서는 엘리자베스와 노동자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정치 토론의 장이 된 켄터베리 홀이라니. 세상이 정말로 뭔가 이상해지긴 한 것 같다고, 비앙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에밀리는 그날 모임의 끄트머리에 노동조합 가입을 희망하는 무희들 몇에게 가입신청서를 받아가지고 돌아갔다. 앰버는 노동조합원들의 반발이 심할 거라고 우려했지만 에밀리는 별로 신경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안 되면 또 싸워야죠. 내가 원래 그런 걸 잘해요. 싸우고 버티고 그런 거. 원래 이런 사람들이 있는 걸 지키거나 그런 쪽이랑은 상대가 안 되죠.”

에밀리는 그렇게 말하곤 여공들과 함께 다른 펍으로 사라져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술 때문이 아니라 흥분 때문에 잔뜩 상기된 얼굴로 케이와 함께 레트니 애비뉴로 함께 걸어서 돌아갔다.

엘리자베스는 어둑어둑해진 거리에서 케이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될까?”

“뭐가?”

성난 투견처럼 토론에 임했지만 토론은 결론이 나지 않고 끝이 났다. 엘리자베스는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앰버가 조합장이 될 수도 있을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앰버는 조합장에 출마하지 않을 거야. 선거 결과가 나오면 멜니아로 갈 거라고 했어. 몇 년 동안은 그쪽에서 쉬고 싶다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럼 에드워드는?”

“에드 얘기가 거기서 왜 나와?”

“몰라?”

“뭘?”

케이가 되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무신경함에 입을 떡 벌렸다.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얼굴로 혀를 차며 케이를 앞질러 걸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그녀를 따라 걷다가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잠시 멈춰 섰다.

“아까 비앙카랑 무슨 이야기 했어? 엄청 가까이서 얘기하던데…….”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아까부터 시무룩해 보이는 게 토론 때문이 아니고 자신 때문임을 깨닫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보 같은 엘리자베스.’

그럴 필요가 조금도 없는데.

케이는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가로등 근처를 서성거렸다. 입술을 삐죽거리던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이상한 행동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아니, 아니야.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정치 얘기 같은 거.”

케이는 둘러대놓고도 제 대답이 약간 한심했다.

하지만 청혼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