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90화
조지 국왕은 권리장전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케이에게 ‘경’ 칭호를 내릴 것을 약속했다.
케이가 노동자와 귀족의 지지를 모두 얻어 출마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는 조지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에 노동조합이 정당을 설립하도록 허가해주십시오.’
노동조합은 너무 덩치가 커서 다른 정당이나 이익집단에서 노동조합의 정당 설립을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반대하고 나설 것이라는 게 케이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케이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자본가들이 세운 정당에서는 노동조합이 이름을 지키며 정당을 만드는 것은 위법이라고 주장하거나 근거도 없이 모함을 했다. 하지만 조지는 케이에게 약속한 대로 노동조합이 출범시킬 정당을 허가했다.
“조합장에 케이를 추대해야 된다니까? 에밀리 양은 국회의원이 될 거니까, 엉?!”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켄터베리 홀에 가득한 담배연기와 우글거리는 노동자들을 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은 잔뜩 취한 채로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무대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추고 있었고 그러지 않는 노동자들은 저마다 모여 앉아 정치에 대한 토론을 이어나갔다. 무희들은 예쁜 캉캉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대신에 에이프런을 두르고 음식을 나르거나 술에 취해 잔을 깬 남자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당황한 얼굴로 앰버 쪽을 돌아보았다.
“이래도 되는 거예요? 켄터베리 홀이요. 완전히 달라졌는데요?”
엘리자베스가 묻는 사이에 무대 위에서는 에밀리가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완벽한 박치, 음치로 듣는 사람의 귀를 괴롭혔다.
“일단은 장사가 잘 되니까요. 솔라티오도 크게 불만은 없어요.”
앰버가 그렇게 말하며 2층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솔라티오는 앰버의 말과는 달리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부하들과 함께 서 있었다. 하지만 솔라티오로서도 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권리장전의 발표와 동시에 식당에서 귀족과 평민의 출입을 나누는 것이 불법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솔라티오는 에밀리의 노래를 들으며 귀를 파내버리고 싶다는 시늉을 하다가 앰버와 눈이 마주치자 애써 웃어 보였다. 어쨌거나 앰버가 아니었다면 이 많은 손님들이 올 수 있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바로 걸어가더니 와인을 고르는 것을 보며 제 이마를 짚었다. 케이는 주위가 시끄러운 통에 엘리자베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작작 마셔! 오늘은…….”
오늘은 분명히 데이트를 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케이는 그런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대신 이미 와인에게 정신을 빼앗긴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베스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포트와인 아무거나 주세요.”
엘리자베스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것을 바라보던 케이가 뒤에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마침 바 건너편에 있던 미리엄이 엘리자베스를 발견하곤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미리엄은 역시나 시끄러운 홀의 소리 때문에 별 수 없이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부공장장님 오셨네! 케이까지 데리고! 케이가 그간 노동조합에 나타나지 않는 통에 우리가 온갖 고생을 했다구요! 케이 하커를 혼쭐 내줘요! 주식만 분배하면 다인가!”
미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쿡쿡 웃으며 와인잔을 집어 들고 미리엄과 건배를 했다. 미리엄은 뒤에서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케이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말했잖아, 보통 아가씨가 아니야!”
“나도 알아, 미리엄. 닥쳐.”
케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옆 자리에 있던 사내들에게 돌아갈 술을 낚아채 털어 넣었다. 그동안 무대 위에서는 에밀리가 고성방가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노래를 끝내고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드디어 에밀리의 노래가 끝나 후련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다들 에밀리에게 투표해!”
“에밀리에게 한 표를!”
엘리자베스는 군데군데 보이는 여공들을 바라보며 미리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주위가 소란스러워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미리엄에게 물었다.
“투표가 언제죠?”
“다음 주 일요일이요. 무너진 의회 청사 건물 대신에 과거 레트니의 사냥터에 새로운 의회 청사를 지을 거라는 얘기가 있어요. 무너진 건물이 한두 개여야죠? 안 그래요? 그 사냥터에 있는 호화로운 건물은 따로 증축할 필요도 없는 모양이에요.”
미리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미리엄이 말하는 과거 레트니의 사냥터는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청혼을 받았던 바로 그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사냥터가 광활하게 내려다보이던 컨트리하우스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곳이라면 의회 청사 건물로 당장 쓰자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쯤 전에 지어진 천정고가 높은 연회실이 있고, 도로가 좁아터진 노스리오든에 비하면 마차가 밀릴 일도 없었다.
게다가 사우스리오든 근처에 의회 청사 건물이 생긴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모여 사는 노스리오든과 달리 사우스리오든은 공장지대였고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간은 노스리오든에만 법원, 의회 청사, 궁, 공원 따위가 과하게 편중되었던 경향이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뒤에서 비앙카가 케이를 툭툭 쳤다. 비앙카는 한 구석에 난동을 부리며 싸우는 두 남자를 가리키며 케이에게 뭔가를 속닥거렸다.
케이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재킷을 벗어서 바에 걸쳐놓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뒤늦게 그것을 눈치챈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불러세우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 미리엄이 엘리자베스의 잔을 제 잔으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케이와 결혼 허락을 받은 거죠? 그렇죠?”
미리엄의 뜬금없는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뭘 허락받아요?”
“결혼이요. 얼마 전에 둘이서 입궁했잖아요. 예?”
“아, 그거요…….”
엘리자베스는 그 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지 않았다.
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엘리자베스에게 제 모든 재산을 물려줄 거라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약속을 했을 뿐이었다.
‘왜 그런 허황한 말을 했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엘리자베스는 궁에서 나와서 회랑을 걸으며 케이에게 물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살짝 흐려진 얼굴로 대답했다.
‘변수 같은 건 없어. 난 내가 한 말을 지킬 거고 넌 그냥 내가 너보다 빨리 죽길 기도하면 돼.’
케이는 또 못돼 처먹은 말투로 대답하고는 엘리자베스를 에스코트하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회랑을 걸어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그때를 생각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화제를 돌리기 위해 미리엄에게 이렇게 물었다.
“셜리는요? 저번에 가져다준 뢰스티는 아주 잘 먹었는데 이제 감자 말고 다른 재료로 요리를 해볼 생각은 없대요?”
엘리자베스가 싱긋 웃으며 묻자 미리엄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내저었다.
“요새는 딸기예요. 완전히 꽂혀버렸는지…… 아니면 배 속의 아가가 딸기를 좋아하는 건지…….”
미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아가’라는 말에 얼굴을 새빨갛게 달궜다.
미리엄은 케이만큼이나 제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서툰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잔을 제 잔으로 툭 치며 말했다.
“그럼 들어갈 때 딸기를 잔뜩 사가지고 가야겠네요. 안 그래요?”
“그렇죠. 아무래도…….”
미리엄은 그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그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이더니 중얼거렸다.
“……보고 싶네요.”
미리엄이 하는 말을 들으며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빤히 보자 미리엄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말을!”
“무슨 말이긴요, 다 들었어요! 오늘은 작작 먹고 들어가요!”
엘리자베스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미리엄을 막 놀리고 있을 때였다. 얼굴이 시뻘게진 미리엄은 엘리자베스를 무찌르려고 하다가 한순간 포기하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나지막이 말했다.
“……저번에 했던 말 말이에요. 이런 세상에서 누굴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 그거 취소예요. 이젠 마음이 바뀌었거든요. 누구든 태어났으면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알고 있어요? 그게…… 엘리자베스 덕분인 거.”
미리엄은 술에 취한 건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알 수 없게 꼬부라진 목소리로 차마 제 손에서 얼굴을 떼지 못하고 눈과 코를 가리고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말을 들으며 제 얼굴까지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제, 제가 뭘…….”
“아니요. 진짜에요. 제약 공장 지분도 생기고, 퀴닌 같은 약을 만든다는 보람도 있고……. 매일 14시간 씩 일하고도 푼돈을 받아 챙기고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일어나던 때랑은 완전히 다르죠. 뭐 내가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난 여전히 평민에 천한 노동자지만 이젠……. 10년 20년 착실하게 일하면 나도 내 아들이나 딸에게 뭔가 물려줄 것도 생겼고……. 뭔가 쌓이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열심히 일해야죠.”
미리엄은 거기까지 말하곤 헛기침을 하며 손바닥에서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시선을 피했다. 미리엄은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씨익 웃었다.
“부공장장님……?”
미리엄은 키득거리며 엘리자베스의 팔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엘리자베스는 손사래를 치며 일부러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유, 취해가지고…….”
“에이! 거짓말 하지 마요!”
“진짜예요! 속고만 살았어요?!”
엘리자베스가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는 사이에 무대 위에 서 있던 에밀리가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조합장이요? 나보고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단언컨대 한 사람을 추천할 겁니다! 앰버 모건이요!”
그 목소리에 엘리자베스는 물론이고 장내에 있는 모두가 에밀리를 올려다보았다. 모두들 의아한 얼굴로 에밀리를 보고 있을 때 앰버 역시 무대 뒤에서 밴드 연주자들과 담배를 피우다가 말고 놀란 눈으로 에밀리를 보았다. 하지만 에밀리는 당당한 얼굴로 앰버를 가리켰다.
“뭐해요, 앰버? 이리 나와요!”
앰버가 당황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말했다.
“앰버 모건? 저 노래하고 춤추는 여자가 웬 조합장이야! 윌슨이면 몰라도!”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홀 내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에밀리는 그 말에 항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생뚱맞게도 먼저 입을 연 것은 제 이름이 나오자마자 케인을 들어 가장 먼저 목소리를 낸 남자를 후려친 윌슨이었다.
“내 이름 막 부르지 마라, 이 새파랗게 어린 새끼야!”
윌슨은 그렇게 말하곤 크흠, 기침을 토해내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앰버는 곤란한 얼굴로 윌슨을 보았다. 그때 윌슨이 앰버와 눈을 마주치더니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앰버 모건이 조합장 후보로 나온다면 나는 앰버를 밀어줄 거다, 모두들.”
윌슨의 말에 갑자기 장내가 싸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