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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89화 (28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89화

다시 0장

조지가 권리장전을 발표하고, 레트니가 컬로든 궁으로 잡혀온 날, 케이는 잘 차려입고 레트니 애비뉴 2번지에 찾아왔다.

조지는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예상대로, 아니, 그 예상을 넘어서는 영리한 자였다.

그는 귀족들과의 전쟁에서 손쉽게 이기고 레트니를 처형할 방법으로 권리장전을 들이밀었다.

성별, 종교, 신분,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이 투표권, 참정권을 가진다.

이 간단한 문장은 조지의 입을 통해 컬로든 궁 앞에서 확성기의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퍼져 울리는 순간 엄청난 힘이 되어 조지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조지는 의회주의에 입각한 권리장전을 선언함으로써 강력한 왕권을 내어주는 대신 그와 동시에 레트니와 왕비, 니콜슨 공작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명분과 힘을 얻었다.

레트니는 과연 평화적으로 왕위를 승계해줄 것인가?

케이는 제가 들고 있던 신문의 헤드라인을 바라보다가 초조한 듯 신문을 마차 안에 내팽개쳤다.

“헛소리. 레트니가 왕위 계승을 할 자가 아니지. 끝까지 버틸 거야.”

케이의 말에 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못된 놈들을 혼쭐내줘도 기분이 찝찝한 걸까요? 상쾌한 기분이 들지 않잖아요.”

“그야 못된 놈들은 우리 생각처럼 반성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못된 놈들을 가려보려면 배워야 하는 거야, 토비. 다음 계절부터 계약연장은 없으니까 학교에 꼭 가라.”

케이의 말에 토비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학교는 따분한데…….”

토비의 중얼거림에 케이가 토비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을 때였다. 레트니 애비뉴 2번지의 문을 박차고 나오던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보고는 멈춰 섰다.

케이는 제가 들고 온 꽃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귀를 붉혔다. 엘리자베스가 얼른 케이에게로 뛰어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안으려고 했지만 엘리자베스가 뛰어나오자마자 꺼낸 건 작은 나이프였다.

케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

“손을 줘봐. 상처를 내보게. 아무는 지 안 아무는지 보자고.”

엘리자베스의 황당한 말에 케이가 말했다.

“지금 데이트에 나이프를 들고 나온 거야? 그것도 데이트 상대를 찌르려고?”

“그래! 당장 손을 줘봐.”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더니 엘리자베스에게서 나이프를 받아들었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에게 제가 가져온 꽃다발을 대신 내밀었다.

케이는 나이프로 제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붉은 피가 그의 손바닥을 적셨다.

나라가 뒤집히는 동안 케이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붉은 피는 멈추지 않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상처는 멎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케빈이 케이를 치료한 것이다.

이게 다 라듐, 빛을 내는 돌멩이의 힘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인내심 있게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것을 바라보곤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녀의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앞에 쪼그려 앉아서 피식 웃었다.

“잘 하는 짓이야. 데이트 상대한테 피를 보게 만들고 말이야.”

“농담하지 마……. 지금은…… 지금은 시답지 않은 농담하지 말란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눈물을 닦아내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가슴께를 꽉 쥐었다.

라듐.

사람을 괴물로 만들 수도 있고, 사람의 몸을 치료할 수도 있는 물질이라니.

엘리자베스는 라듐이라는 돌멩이가 마치 이 대륙의 과학기술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리오든 거리를 걸을 때마다 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선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녀가 디트리히 폰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비행선은 분명 환상이 아니라 정해진 미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조지는 권리장전과 함께 이오페아의 평화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공고히 했다. 연합군의 도움에 감사한다는 의미의 인사치레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갸흐통은 당분간 전쟁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병기로 사용하는 일도, 인종 청소를 하는 일도, 절대로 할 수 없다. 갸흐통의 철군을 결정한 것이 갸흐통의 현 국왕이 아닌, 아직 봉건제도가 강하게 뿌리박힌 갸흐통의 개혁을 외치는 그의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지만, 또 나아가기도 했다.

케이가 괴물이 아닌 인간이 된 것은 그대로였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시간여행을 하기 전의 케이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꽉 끌어안고 울먹거렸다.

“젠장할…… 젠장할…….”

케이는 주저앉은 엘리자베스를 꽉 안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렇게 쪼그려 앉아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 * *

“……어쨌든 레트니는 처형되겠지. 아마도? ……뭐, 새로이 출범될 의회가 허튼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케이는 하일 강변을 엘리자베스와 함께 걸으면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다친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그 말에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이 왜인지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들로 구성될 텐데도? 다들 국민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레트니를 처형시키기로 결정할 거야.”

하일 강변에는 그간의 통행금지 동안 풀지 못한 원한이라도 풀듯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나와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장사를 하려는 행상도 잔뜩 돌아다녔는데, 케이는 그 행상 중 하나를 발견하자 반가운 듯이 다가가서 튀김과 병에 든 음료를 하나 사 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들고 있는 음료를 보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토닉워터잖아?”

케이가 피식 웃었다.

“그래. 토닉워터. 피시 앤 칩스랑 먹으면 딱이지.”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얼굴로 행상을 돌아보았다.

“우리 공장에선 행상에 이런 거 판 적 없는데?”

엘리자베스는 유리병 주둥아리에 입을 대고 토닉워터라고 쓰인 병에 든 액체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자 특유의 톡 쏘고 끝이 씁쓸한 향이 감돌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얼빠진 표정을 바라보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공장의 누군가가 빼돌려 팔았든지 아니면 대충 비슷하게 만들었겠지.”

“뭐라고?!”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감싸 쥐면서 제가 들고 있는 병과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는 병을 소리가 나게 부딪혔다.

“사람들이 다 너처럼 선한 행동만 할 거라는 건 심한 착각이야.”

“첫째로, 난 선하지 않아. 그리고 둘째로 이건 선한 행동이 아닌 게 아니라 나쁜 행동이야!”

엘리자베스가 당장 행상에게로 달려가려는 듯 몸을 틀었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휘감은 손에 힘을 주어 엘리자베스를 멈춰 세웠다. 케이는 몰록의 힘이 아니더라도 엘리자베스보다 훨씬 힘이 셌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힘의 차이를 느낄 때마다 자신에게서 몰록의 힘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어. 저런 행상 한두 개랑 싸움질 해봤자 변하는 건 없고 저런 행상들이 설치고 다닌다고 나쁠 건 없으니까.”

“왜 나쁠 게 없어?”

“저런 가짜 토닉워터 맛을 본 사람들이 진짜 토닉워터의 맛을 보게 되면 진짜 토닉워터 맛을 먹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이제부터 토닉워터 공장에서 정식 출하된 상품을 맛보러 음식점으로 가게 될 거야. 일종의 홍보 효과인 셈이지. 약간의 손해를 감수해서 큰 이득을 남기면 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볼멘소리를 했다.

“그렇게 말할 때마다 장사꾼 같아.”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눈을 살짝 찡그렸다. 케이는 노스리오든에서 사우스리오든으로 향하는 다리 초입에 멈춰 서서 튀김을 한 입 베어 물고 말했다.

“그럼 귀족 아가씨는 뭐라고 말하지?”

“일단 귀족 아가씨는 이렇게 길거리에 서서 튀김 안 먹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곤 케이에게서 생선 튀김을 빼앗아 들고 한 입 크게 물었다. 엘리자베스의 작은 입안에 튀김이 가득 찼다.

그녀의 입술이 기름으로 번들거리자 케이는 목이 타는 듯 토닉워터를 한 모금 마시다가 결국은 엘리자베스의 등을 당겨 안았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입을 맞추곤 번들거리는 입술을 제 손으로 닦아냈다. 엘리자베스가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귀족들은 이런 데서 키스도 안 해…….”

“귀족으로 살긴 참 각박하네.”

케이는 담담하게 말하곤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하일 강 다리 위로 올라갔다. 진한 오수의 냄새와 쾨쾨한 매연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다리 아래에는 꼬질꼬질한 소년들이 뭔가를 작당하듯 모여 있었고 하수구 구멍에서는 더러운 폐수가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품 안에 안겨서 그 지저분한 광경을 바라보다가 하수구 구멍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몰록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저 구멍.

엘리자베스는 몰록의 마지막을 생각했다. 몰록은 물을 싫어했고, 헤엄을 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 녀석은 분명히 죽었을 것인데—

왜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저 어두운 구멍을 제대로 바라보기가 힘들까.

엘리자베스는 오랫동안 그 괴물이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몸을 살짝 떨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더 꽉 안았다.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

“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다 선한 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거 말이야.”

“…….”

엘리자베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케이와 함께 이 거리를 걸어오는 동안 수없이 많은 정당 홍보물을 받아들었다. 대부분의 정당 이름에는 노동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지만 막상 그 정당의 우두머리는 과거 노동자들을 착취하던 공장장이나 사장인 경우가 많았다.

그 공장장이나 사장이 고용했음이 분명한 선동꾼들은 순박한 얼굴의 노동자들을 홀리기 위해 파격적인 공약을 읊어주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공약이 파격적이고 비현실적일수록 그 앞으로 모여들었다.

케이는 굳어진 얼굴의 엘리자베스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인간은 언제나 허튼 짓을 하기 마련이야.”

“하지만…….”

“하지만.”

케이는 걸음을 멈췄다.

“만약에 허튼 짓을 한다고 해도 또 다시 더 많은 사람들이 진보하기 위해서 노력할 거야. 반드시 그래. 그러니까 너무 기대할 필요도 없고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어.”

케이의 말은 엘리자베스의 마음에 남았다. 세상이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노력할 거라는 말이 엘리자베스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살짝 밝아지는 것을 보던 케이가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오늘 저녁은…….”

케이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일 때였다.

마차 하나가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눈앞에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이내 벌컥 열리더니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앰버였다. 엘리자베스는 앰버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앰버!”

“어머, 여기서 다 만나네요! 멀리서 봐도 딱 알아보겠더라구요. 어떤 덩치 커다란 남자와 예쁜 여자가 서 있으니까요.”

앰버가 장난스레 말하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짜증스럽게 앰버를 노려보았다.

“그냥 지나갔어도 됐을 뻔했는데.”

“그럴 순 없지. 오늘 모이는 사람들 대부분이 엘리자베스를 보고 싶어 할 텐데!”

“오늘 모이는 사람들이요?”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앰버의 뒤에 있던 에드워드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말했다.

“네, 저랑 윌슨이랑 제철 공장 사람들이요.”

“다들 켄터베리 홀에서 모이나요?”

엘리자베스가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팔을 뒤로 잡아끌면서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술 먹지 않겠다고 말해.”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케이는 제 머리를 헝클이며 이를 악물었다.

“며칠 전에 미리엄이랑 잔뜩 취하고 다음 날 잔뜩 토하고 다시는 술 안 먹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는 진 토닉이 얼마나 맛있는지 보려고 한 거고…… 진을 다시 안 마시겠다고 했지…….”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앰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됐네요. 오늘 켄터베리에 좋은 와인이 잔뜩 들어왔거든요. 에밀리 양도 오기로 했어요! 에밀리 양이 노동조합에서 정당을 만들면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기로 했거든요. 일종의 정당 모임이죠. 건실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술 먹고 노는 거랑은 좀 다른……?”

앰버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어깨를 툭 때렸다. 케이는 앰버의 손이 닿은 어깨를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이 털어내며 말했다.

“우리가 왜 거기에 가야 하는데? 노동조합 정당에 나는 관심이 조금도 없어.”

“왜? 조지 국왕 폐하 앞에서 ‘경’ 칭호를 받는 대신에 노동조합 정당 수립을 허가해달라고 했다며? 엘리자베스가 다 말했어. 그러니까 넌 우리 정당의 창립자인 셈이야!”

앰버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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