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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88화 (28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88화

“전혀 모르겠군. 나는 귀족도 아니고 레트니는 더더욱 아니라서 말이야.”

케이는 국왕의 측근이 내뱉는 명백한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에게 걸어가서 그의 팔을 꼬집었다. 엘리자베스의 작은 반항에도 케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케이 하커 씨는 귀족이 아니죠. 어쨌거나 제 주군을 기다리게 하는 일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습니다. 호송용 마차에 실려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다니엘이 부드럽게 말하자 케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현관문을 열었다.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다니엘에게 물었다.

“입궁용 복장으로 갈아입을 시간이라도…….”

“그런 건 필요 없을 겁니다, 엘리자베스 양. 아시다시피 지금 모습이 훨씬 더 기자들에겐 선호될 테니까요.”

다니엘은 엘리자베스가 대충 입은 셔츠와 바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곤란한 얼굴로 떠밀리듯 현관문을 나섰다.

세 사람은 마차를 타고 궁까지 가는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엘리자베스는 마차 창문을 열고 계엄령이 해금된 도시 풍경을 바라보았다. 통행증이 필요 없어지자 그간의 살벌했던 도시 분위기의 반동처럼 수많은 행인들이 도시를 돌아다녔다.

엘리자베스는 길거리에 쏟아지는 부랑자들에게서도, 꽃을 파는 소년들에게서도, 커피 하우스 앞에서 진탕 취해버린 귀부인에게서도, 도시의 회복된 평화를 느꼈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기분도 잠시 마차가 궁 앞에 도착하자 엘리자베스는 또 궁 앞이 기자들로 떠들썩한 것이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긴장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또 기자들을 불러들였군.”

“엘리자베스 양에게 물어보시면 충분히 아실 수 있겠지만 이 정도는 엘리자베스 양이 감수하셔야 할 일입니다.”

다니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엘리자베스에게 웃어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다가 이어지는 그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제 제안을 거절하신 것 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이틀 전 밤에 다니엘이 찾아와 실험 결과를 조작하자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걸 제안이라고 부르나요, 보통?”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제 입장에선 그건 협박이 아니었고, 엘리자베스 양 입장에선 거절하셨으니 협상은 아니었을 텐데요.”

엘리자베스는 거친 손길로 마차 문을 부서질 듯 열었다. 마차 문이 삐걱하다 쾅 소리를 냈다.

그러나 곧 눈앞에서 터지는 플래시에 눈을 끔뻑거리며 방금의 기세와는 달리 흠칫했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보다 앞서 마차에서 내리며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케이가 나타나자 기자들은 전부 케이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이번에 하커 공장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주식을 분배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도요!”

그건 엘리자베스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연이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을 들으며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신사처럼 위장한 얼굴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저는 사업가입니다. 주식 분배가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일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신사다운 목소리를 들으며 폴짝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살살 좀 내려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 제 팔에 두르고 에스코트하며 보비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궁 정문으로 걸어갔다. 기자는 케이를 졸졸 쫓아오며 질문을 이어갔다.

“일각에서는 멜니아로 사업을 확장하기로 한 일을 두고 모건 양과의 결혼을 점치던데요. 두 분이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이렇게 나란히 입궁하시는 것을 보면 오늘은 두 분의 결혼을 허락 받으러 오신 걸까요?”

엘리자베스는 기자의 무례한 질문을 들으며 기자를 흘겨보았다.

기자는 일부러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극적인 문장을 연달아 사용했다. 하지만 기자의 무례함과 별개로 엘리자베스는 결혼이라는 말에 잠시 묘한 기분을 느끼며 케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케이는 대답 없이 엘리자베스와 함께 정문을 스쳐지나갔다.

* * *

“오랫동안 집을 비워두었더군. 케이 하커.”

조지 국왕은 케이와 엘리자베스를 나란히 앉혀 두고 이번에도 차가 아닌 와인을 선택하고는 첫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케이는 조지가 그간 케이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웠음을 느끼며 겸손함을 가장해 말했다.

“바쁜 일이 있었습니다.”

“바쁜 일이라……. 리오든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바쁜 일에도 불구하고 더 바쁜 일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하지만…….”

조지는 뼈가 들어 있는 말을 하며 케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굳이 묻지는 않겠네.”

조지는 입맛을 다시며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그러곤 다니엘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계속해서 연락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안 그런가?”

조지는 케이에게 가 닿아 있던 시선을 엘리자베스에게로 옮겼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조지는 엘리자베스의 머뭇거림에서 뭔가를 느낀 것 같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두 사람이 같이 입궁했으니 여러 귀족 가문에서 말이 나오겠군.”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말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박람회 때처럼 두 남녀가 함께 입궁한다는 것은 대체로 결혼을 허락 받기 위함이거나 적어도 결혼할 사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귀족 가문에서는 오늘의 입궁을 놓고 또 엘리자베스와 케이 하커의 사이를 점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 번 케이 쪽을 보았다. 케이는 대답 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사이 조지가 말했다.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엘리자베스 양?”

조지는 일부러 엘리자베스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엘리자베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실수였다, 라고 말하면 국왕을 탓하는 것이 되었고 두 사람이 같은 저택에서 나온 것을 다니엘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국왕의 실수를 탓하는 것은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실수가 아니었다라고 하려면…….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레트니의 사냥터에서 케이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표정으로 제게 건네던 청혼이 떠올랐다.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여기서 실수가 아니었다고 대답하면 케이를 제 앞에 무릎 꿇리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머뭇거리는 것을 힐끔 바라본 케이가 말했다.

“엘리자베스 양과 결혼하지 않더라도 엘리자베스 양은 제 유일한 상속자가 될 겁니다. 이미 제 변호사를 통해 알아보신 것 같지만 말입니다.”

단호하게 말을 맺은 케이는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다니엘은 능글맞게 웃으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조지는 케이의 말에 흥미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결혼하지 않더라도? 하지만 두 사람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하커의 이름을 물려받을 새로운 아내와 아이들이 생길 텐데 그래도 그들에게 상속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조지는 와인을 새로 따랐다. 쪼르륵, 와인이 잔에 따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혼하지 않더라도?

그 말은 케이가 자신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일까? 왜?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과의 결혼을 피하는 것 같다는 표면적인 상황보다도 그 이유가 두려웠다. 두 사람의 망한 결혼생활을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기억을 통해 모두 들여다보았을 테니 말이다.

케이가 말했다.

“엘리자베스 양이 아니면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커의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나 아내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평생 독신이 될 거고, 아시다시피 제 형은 금치산자로 정신병원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는다니.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그 말은 청혼은 아니면서, 고백이었다.

엘리자베스와 미래를 함께 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도—

엘리자베스가 아닌 다른 어떤 여자와도 미래를 함께하지 않겠다는 고백.

엘리자베스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에 조지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앰버 모건 양은? 알다시피 스미스 모건이 자네를 무척이나 탐내고 있어. 리오든이 누구 손에 들어갈지 모를 때야 엘리자베스 양과 자네를 손에 쥐고 싶어 안달이 났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다르지. 지금은 앰버 모건 양과 자네를 결혼시켜 손에 하커 공장을 쥐고 싶어하는 것 같더군.”

엘리자베스는 컬로든 정원에서 스미스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스미스가 엘리자베스에게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주기 위해 그렸던 머리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던 것도.

그때는 스미스가 그저 선의로 했던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전부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얻기 위한 계략의 일부였던 셈이었다.

약간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결국 누구든 제 것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앰버 모건 양과는 좋은 친구입니다. 사업상 스미스 씨와 만날 일이 있어서 접촉했던 것을 일각에서는 약혼이니 뭐니 떠들었던 모양이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직접 앰버 양과 약혼했다고 떠든 적도 없고 앰버 양에게 친구 이상의 빌미를 준 적도 없습니다. 앰버 양도 그렇구요.”

케이의 대답에 조지는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케이는 조지와 다니엘이 시선을 맞추는 것을 보며 자신이 조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음을 알았다.

케이는 옆에 있는 엘리자베스를 살짝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시선을 내리 깔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걸 확인해보면 좋겠군. 내일 오후, 레트니의 재판과 동시에 발표될 권리 장전이야.”

조지는 언제나 그랬듯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할 말을 꺼냈다. 그는 다니엘이 내미는 종이를 두 사람 앞에 들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트니를 재판장에 끌어내신다구요?”

“그래. 물론 새로 출범할 의회의 동의를 얻어서 말이지.”

조지는 그렇게 말하며 그들 앞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권리 장전]

[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법률의 적용, 면제, 집행, 정지를 금지한다.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평시의 상비군을 금지한다.

선거의 자유, 의회의 발언의 자유, 국민의 청원권을 보장한다.

선거의 4원칙을 지키도록 한다.]

엘리자베스는 권리 장전에 적힌 4원칙 중 마지막 평등 선거의 원칙을 보며 잠시 숨을 멈췄다.

[……레본의 모든 국민은 성별, 신분, 재산, 종교에 관계없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위의 권리 장전은 레본의 국왕이라 하더라도 침해할 수 없는 레본 국민의 권리임을 선포하는 바이다. —조지 클레몬트.”

조지는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담담하게 종이의 마지막 줄을 읽어 내렸다.

조지가 씨익 웃어 보였다.

“어떤가? 내가 약속을 잘 지켰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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