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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87화 (28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87화

다음 날 아침 엘리자베스는 온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엘리자베스는 침실에 케이가 없는 것을 깨닫고 얼른 슈미즈를 입고 문을 열었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 순간 쟁반에 커피와 빵을 담아 들고, 입에는 신문을 문 채 올라오는 케이와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난간을 붙잡았다. 케이는 2층 복도에 놓인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신문을 겨드랑이 사이에 낀 뒤에 엘리자베스를 보며 물었다.

“왜, 더 자지 그래?”

케이는 어젯밤 새벽까지 엘리자베스를 괴롭힌 것이 미안했는지 슬쩍 눈을 피했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시계를 보았다. 아침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내려놓은 쟁반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가롭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 없는 거 아니야? 앰버랑 에드워드가 널 찾을 거야.”

케이는 오만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는 한품에 쏙 들어오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제 팔로 감싸고 깍지까지 낀 뒤에 중얼거렸다.

“이미 다녀갔어. 조지 국왕이 나를 찾는다더군. 너도 말이야. 우리 같이 가야 돼.”

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베스는 옷 아래로 케이의 몸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황급하게 케이를 떨어뜨려놓았다.

“그런데 나를 안 깨웠어? 너 미쳤어?”

케이는 쿡쿡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화난 얼굴을 바라보다 엘리자베스의 이마 중앙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넌 화났을 때 표정이 참 재밌어. 화가 났는데 하나도 안 무서워. 알고 있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멱살을 움켜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정말로 무섭게 할 수도 있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꽉 안고 말했다.

“그래, 그것 참 기대가 되는군.”

그러고는 건방지게도 엘리자베스를 제 품에 안고 소파에 몸을 걸친 채로 테이블 아래로 두 다리를 쭉 뻗어 엘리자베스를 완벽하게 가둬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 어이가 없어서 케이를 노려보았다.

“국왕을 기다리게 하는 건 절대 안 돼. 몇 시에 알현하기로 했어?”

“두 시?”

엘리자베스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당장 레트니 애비뉴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어도 빠듯할 시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어깨를 세게 떠밀었다. 하지만 케이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고 오히려 엘리자베스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국왕 따위, 기다리라고 해. 어차피 급할 것도 없잖아.”

“뭐가 급할 게 없어.”

엘리자베스가 의아하게 묻자 케이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엘리자베스는 제 등 뒤로 안겨오는 케이의 체온을 느끼며 돌아서서 신문을 집어 올렸다. 엘리자베스의 등허리로 케이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신문 1면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레트니, 붙잡히다!]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신문을 다급하게 훑어 내렸다. 신문 기사 내용은 제목과 별다를 게 없었다. 남부의 한 자작령에서 레트니가 붙잡혔다는 내용이었다.

[……자작이 직접 레트니를 붙잡아 가두고 국왕에게 연통을 넣었으며 국왕 폐하께서는 레트니를 호송할 것을 지시해 지금 레트니는 리오든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국왕 폐하의 관대한 처분을 기다리는 귀족들이 많지만 왕비와 공작이 구금된 현 상황으로 보면 레트니는 쉽게 풀려나기 힘들 것으로 보이며……. 대법관은 교회가 인정한 국왕이 선왕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국왕 폐하께서는 연합군에게 큰 감사를 보이며 앞으로도 이오페아의 평화를 위해 레본이 언제나 힘을 보탤 것을 약속……]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짜 왕이 붙잡혔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잠시 전율했다.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표정이 없는 얼굴로 군림하던 레트니를 떠올렸다.

머리가 잘리는 순간에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레트니가 무릎을 꿇고 처형대 위에서 기사에게 머리가 잘리는 상황을 상상했다.

하지만 조지가 과연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가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팔 위로 제 팔을 뻗어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던 신문을 펼쳤다. 그러자 신문 속지에 있는 다른 기사들이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펼쳐졌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케이가 말했다.

“신문에 온통 네 얘기들이야. 학술원의 교수. 백신을 만든 사람.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경…….”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아랫배와 가슴을 한 손으로 휘감고 다른 한 손으로 학술원 앞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의 사진을 가리켰다. 그 위에는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여자, 세상을 바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간질거림 때문인지 자꾸만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얼른 신문을 내던지고 제 뺨을 그러쥐었다. 케이는 낄낄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꽉 안았다.

“왜 그래?”

“놀리지 마!”

“놀리는 게 아니야.”

케이는 웃음을 멈추고 엘리자베스를 돌려세웠다. 길게 뻗은 다리로 엘리자베스의 몸을 손쉽게 제 쪽으로 더 가까이 오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자랑스러워하는 거지. 네가 한 모든 일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들으며 점점 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랑스럽다고……? 내가……?

엘리자베스는 아까보다 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케이의 입을 막았다. 케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엘리자베스는 갈 곳 잃은 눈동자로 케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만 말해.”

케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빨간 얼굴과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꼈다. 입궁은커녕 이 저택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창피하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곤 케이의 입에서 손을 뗐다. 케이가 입술이 바싹 말라버린 것을 느끼며 혀로 제 입술을 적시는 사이에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진 케이가 얼굴을 살짝 숙였을 때, 엘리자베스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야…….”

“뭐가?”

“아니…… 그냥 계속 말해도 될 것 같아.”

케이가 미간을 찌푸리자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힐끔 보며 말했다.

“다시 말해줘.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을 마친 엘리자베스가 수줍게 웃었다. 그러더니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고 볼을 부풀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아주 가늘게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케이는 예고 없이 엘리자베스의 슈미즈 아래로 손을 넣었다. 엘리자베스가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등을 당겨 힘으로 그녀를 끌어왔기 때문에 차마 몸을 돌리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술에 제 입술을 내준 채로 몸마저 스르르 당겨졌다.

“이제 그만 나가야…….”

“절대 안 돼…….”

“케이…….”

“다 네 잘못이잖아.”

케이는 이성이 날아가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 뜨겁다 못해 서늘한 욕망이 엘리자베스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몸이 남김없이 맞닿는 순간, 멀리서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보다 먼저 고개를 들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턱을 잡아당기며 애처롭게 말했다.

“젠장…… 젠장할…….”

“누가 오고 있다고!”

엘리자베스는 쉴 새 없이 키스를 퍼붓는 케이를 손으로 밀어내다가 나중에는 결국 소리쳤다.

케이는 목구멍을 긁는 소리를 내며 소파를 뒤로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의 힘을 못 이기고 소파가 뒤로 기울어졌다. 케이는 분노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힐끔 본 후, 거친 숨을 토해내며 창문으로 걸어갔다.

“저 개새끼…… 죽여버릴 거야.”

“누군데, 그 개새끼가?”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케이는 이내 웃음을 거두고 짜증스레 말했다.

“다니엘 빌리스. 내가 살아 있는 걸 반드시 확인해야겠다, 뭐 그런 거겠지.”

케이는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엘리자베스의 말려 올라간 슈미즈를 차분하게 정리해주었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 머리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밀어내고 창문으로 걸어갔다.

창 아래에는 보비들을 잔뜩 데리고 온 다니엘 빌리스가 서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창문으로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케이와 엘리자베스가 함께 있을 것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얇은 슈미즈 차림임을 깨닫고 화닥닥 창문에서 떨어졌다.

케이는 어디선가 재킷을 꺼내어 입고는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그리고 당황한 엘리자베스에게 담담하게 쟁반에 있는 빵과 커피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 먹고 내려와. 천천히.”

“너 진짜 미쳤어……? 저건 왕실에서 보낸 마차야.”

엘리자베스가 묻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뭐? 기다리라고 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헛소리를 들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케이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빵을 한 입 먹고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케이가 그대로 남아 있는 빵과 커피를 확인하면 난리를 칠까 봐 한 일이었다.

가만 보면 케이 하커는 엘리자베스에게 아침을 먹이는 걸 정말 좋아했다.

* * *

엘리자베스가 옷을 차려입고 1층 응접실로 내려갔을 때 다니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케이는 손님을 응대하는 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건방진 자세로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읽으며 다니엘을 온몸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런 케이의 태도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내려오는 것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다정한 미소를 만면에 걸고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걸 본 케이가 얼굴에 살기를 띄우며 다니엘의 등을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누가 봐도 밤새 두 남녀가 같이 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을 상황에 어색한 미소를 띠며 다니엘에게 물었다.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가만히 두면 감히 제 주군을 두 분이 기다리게 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금까지 쭉 그러셨듯이.”

다니엘이 아까까지의 다정한 말투는 전부 가면이었다는 듯 순식간에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케이를 쳐다보았다. 케이는 다니엘의 가식이 지겹다는 듯 체념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쭉 그러셨듯이 한 두 시간 더 기다리셨어도 좋았을 건데.”

“하하, 케이 하커 씨께서는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봅니다. 레트니가 붙잡히고 귀족가에는 피바람이 부는 상황이 말입니다.”

다니엘은 케이 쪽을 노골적으로 노려보며 손바닥을 비볐다.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적의를 드러낼 때마다 중간에서 어쩌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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