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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86화 (28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86화

앰버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피투성이가 된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오히려 먼저 케이에게로 달려든 것은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는 케이를 보자마자 절뚝거리며 케이에게 달려 그를 안았다.

케이는 에드워드가 달려와서 황소처럼 그를 받아버리는 바람에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다가 이내 에드워드의 머리를 헝클이며 웃었다. 앰버는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변호사에게 뭔가를 말하곤 혼자 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침내 앰버의 차례가 왔을 때 그녀는 케이의 정강이를 차버리고 등을 후려쳤다. 하지만 곧 두 사람에게 묻은 피가 전부 케이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고 놀라서 그를 때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와 에드워드에게 깊은 상처는 아니라고 설명하고 케이를 부축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정원은 오랫동안 주인 없이 방치된 탓에 엉망진창이었고 실내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먼지가 쌓인 소파에 케이를 앉히고 밝은 곳에서 케이의 얼굴을 보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케이의 얼굴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야? 어?”

앰버는 케이의 발가벗은 상체를 향해 담요를 던지며 분노한 얼굴로 물었다.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담요를 넓게 펼쳐서 덮고 에드워드가 내미는 담배를 물고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켠 초를 촛대 채로 들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에드워드가 대답 없는 케이를 원망하듯 말했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유언장 같은 거나 변호사한테 맡겨놓고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에드워드는 아까부터 볼이 퉁퉁 부어서는 당장이라도 어린 아이처럼 주저앉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케이는 에드워드의 앞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웃었다.

“내가 정말 죽었으면 같이 묻어달라고 했겠네.”

“케이!”

에드워드는 케이의 농담에 그를 흘겨보았다.

케이는 담요 위로 원래의 피부보다 더 어두워진 어깨를 드러낸 채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담배 연기를 뱉어내는 케이에게 에드워드는 그간 리오든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려고 했다.

“조지 국왕이 매일 같이 케이를 찾고 있어요. 거기도 뭔가 눈치챈 분위기였다구요. 오늘까지 기다린 것도…….”

“그런 얘기는 나중에 듣지.”

케이는 에드워드의 말을 끊고는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에드워드가 황당한 얼굴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지금 당장! 당장! 조지 국왕한테 가야 되는 상황이라니까요?”

케이는 에드워드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오늘 내가 입궁을 안 하면 내 목을 자른다고 해도 오늘은 안 가. 그러니까 내일 얘기하자고, 내일.”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따뜻한 물을 가져오고 있던 엘리자베스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케이의 어깨를 때렸다.

“너……!”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케이의 허벅지 위에 앉아서 그의 담요 안으로 쏙 들어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안고 벙찐 에드워드에게 손짓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늦게 나갈수록 내일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도 더 늦어지는 거야, 에드. 당장 꺼져.”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가 앉아 있던 소파를 발로 툭 차버렸다. 에드워드의 소파는 가볍게 밀려났다. 앰버가 그의 소파를 손으로 잡아주며 헛웃음을 지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뭐 어떠냐는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더 세게 안았다.

앰버가 제 뒷목을 주무르며 에드워드를 일으켰다.

“나가요. 여기 더 있는다고 저 고집불통을 말릴 수도 없어요.”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야.”

케이가 대답했다. 앰버는 그 대답에 참지 못하고 협탁에 놓여 있던 책을 케이에게 던졌다. 케이는 손쉽게 그것을 낚아채곤 앰버에게 장난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앰버는 이를 악물고 케이를 노려보다가 얼른 현관문을 나섰다.

* * *

케이는 앰버와 에드워드를 내쫓고 탐욕스럽게 엘리자베스를 먹어치웠다.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물을, 눈물, 땀, 몸의 모든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작은 물방울들을, 케이는 거침없이 마셨다.

엘리자베스는 쏟아내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케이는 그것을 삼키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없는 시간 동안 제 안에 고인 모든 것들이 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이 개 같은 자식…….”

엘리자베스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케이의 머리카락을 헝클이고 그의 앞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부드럽게 결을 헤쳤다.

그녀는 케이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일들이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이 세상에 무슨 영향을 미쳤는지 전부 알려주고 싶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런 말보다는 천박하고 지저분한 욕들뿐이었다.

재회의 기쁨보다 기다림의 시간동안 쌓였던 원망과 서러움이 얇은 막을 깨고 나온 물방울처럼 흩어져 내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어깨를 긁거나 때리면서 그 상처가 순식간에 낫는 케이의 몸을 지켜보았다. 상처를 내고, 또 그 상처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엘리자베스는 마음에 켜켜이 쌓였던 무게들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엘우드 밀에 대한 것도.

물속으로 사라져가는 하얀 털을 가진 디트리히 폰과 함께 뛰어내린 엘우드 밀.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자신의 미래가 될 수 있었다는 걸 알았다.

케이를 잃었더라면 엘리자베스 역시 엘우드 밀과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케이의 목덜미를 꽉 안고 케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나를 떠나면 죽여버리겠다고.

케이는 그 말조차 먹어버렸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는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침대 시트 위에 벌거벗은 상체를 내놓고 엎드려 누운 채로 엘리자베스의 하얀 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반쯤 감긴 눈을 보며 살짝 웃었다.

꿈을 꾸고 있나.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할 때, 케이가 눈을 떴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눈이 딱 마주치자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케이는 시트 안으로 손을 넣어 엘리자베스의 맨 허리를 지분거리며 말했다.

“꿈을 꿨어.”

“무슨 꿈?”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뜨거운 숨이 제 쇄골에 와서 닿는 것을 느끼며 케이의 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은 몽롱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제 무게로 엘리자베스를 지그시 누르며 엘리자베스의 턱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갈급하게 찾다가 입술끼리 살짝 떨어지자 말했다.

“울창한 나무숲에서 밤을 보낼 때마다 매일 꾸던 꿈이야.”

“엘린크 성 근처에서?”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의 눈 속에는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한 불안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래. 매일 밤 피 냄새가 났어. 나는 점점 피 냄새에 미쳐가고 있었고 멀리서 쇠붙이 소리가 들려왔어. 아주 먼 곳에 있는 소리, 냄새까지도 다 보였어. 그 소리 중에는 비명소리도 간간히 섞여왔고…….”

엘리자베스는 어린 아이처럼 안겨오는 뒷덜미를 가볍게 주물렀다.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습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케이가 말하는 그 공간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어두운 밤, 커다란 오크 나무에 둘러싸인 채로 죽어가는 병사들의 목소리를 듣는 케이.

짐승들은 사방에서 울어대고 몸은 점점 가벼워질 테지.

내가 괴물을 쫓는 건지, 괴물에게 쫓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순간.

피를 향해 맹목적이 되어가는 제 영혼을 느끼는 극한의 공포.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다니엘이 탄저균 종두법의 결과를 조작하자고 말했을 때 그녀 역시 그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자신이 지금 종두법의 성공을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 순간 말이다.

‘괴물이 되어서는 안 돼.’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케이에게 남겼다는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케이의 뺨을 그러쥐었다.

“너를 생각했어. 매일 밤, 깊은 숲 속에서 매 순간……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너를 생각했어. 이런 네 모습. 나를 볼 때면 초롱초롱한 네 푸른 눈. 네가 나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순간을 생각했어. 괴물이 된 나를 원망하고 욕하는 순간을. 나는 절대 괴물이 되지 않을 거야. 나는 네 것이니까. 그래야 하니까. 너의 세상을 망치는 존재가 될 수는 없으니까.”

케이의 동공 주변에 빨간 실핏줄이 돋아났다. 엘리자베스는 지금 케이가 자신에게 허기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케이는 이겨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술을 제 입술로 막았다. 그 안으로 제 타액을 남김없이 흘려보냈다. 케이는 주인이 주는 먹이를 먹어치우는 개처럼 엘리자베스가 주는 모든 것을 핥아먹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금발에 코를 묻고 끔찍한 허기를 고통스럽게 저지했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흐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다른 욕망이 그의 허기를 막아서는 것을 느꼈다.

너를 갖고 싶다. 네가 나를 가졌으면 좋겠다.

나만이 너를 이해할 수 있고…….

너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번들거리는 입술에 묻은 제 타액을 삼켰다.

어두운 밤, 산짐승 소리를 들으며 짐승과 나를 구분할 수 없었던 시간들 속에서 이 여자를 생각하며 버텼다.

사우스리오든을 가로지르고 숲속에서 몰록을 쫓으며 케이는 어느새 제 몸도 몰록처럼 하얗게 변하고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엘우드 밀이 케이를 몇 번이나 불렀지만 케이는 어느새 엘우드 밀을 앞질러 가고 있었다. 케이는 몰록의 피 냄새를 쫓아가다가 정신을 잃기도 했다. 눈을 뜨면 사슴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기도 했고 나무 위에 올라가 있기도 했다.

그는 괴물이었고 멀리서 나는 전쟁터의 비명소리는 더 이상 그에게 연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살덩이들은 그의 먹잇감이었다.

케이는 억지로 제 살가죽을 뜯어 피를 내고 몰록이 자신을 쫓아오도록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피 냄새에 이성이 마비되어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내내—

엘리자베스를 생각했다.

이 여자를.

제 인생을 모조리 뒤흔들어버린 이 소란스럽고 대단한 여자를.

케이는 울창한 숲으로 빛이 들지 않는 아침마다 엘리자베스를 떠올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과 작고 귀여운 입술과 부드러운 하얀 피부를.

그러면 알 수 있었다.

아직은 괴물이 되지는 않았구나.

아직은 내가 널 기억하고 있구나.

케이에게 엘리자베스는 매일 아침 케이가 케이임을 일깨워주는 존재였다.

그 아침을 떠올리자 욕망이 허기를 손쉽게 앞지르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몸 아래에서 흔들리며 케이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리고 케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넌 절대 괴물이 될 수 없어. 넌 절대…….”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꽉 안고 놔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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