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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85화 (28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85화

케이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불과 두 세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그리 오래 뛴 것도 아닌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엘리자베스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 내쉬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케이가 사라질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잔뜩 헝클어진 케이의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 삐뚜름한 표정 따위를 제 푸른 눈동자로 빈틈없이 담았다.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한참을 그러고 서 있자 케이가 쌕쌕 숨을 몰아쉬며 엘리자베스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와. 얼른.”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케이가 기댄 철창에 묻어나는 케이의 붉은 피를 눈치챘다. 케이의 몸은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재빨리 케이에게로 뛰어가 완전히 쓰러진 케이의 머리를 받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케이의 뒷덜미를 받쳤던 손바닥을 눈앞에 가져다댔다.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엘리자베스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케이를 흔들었다. 케이의 눈동자는 엘리자베스가 아닌 허공을 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케이 하커! 정신 차리라고!”

엘리자베스가 소리 지르자 케이가 힘겹게 손을 뻗어 엘리자베스의 금발 끄트머리를 살짝 만졌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 남은 힘이었던 듯 케이의 손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케이가 살짝 웃었다.

“……여기에 계속 서 있었어…… 네가 나타날 것 같아서…… 네가 금방이라도 저 로킨트 스트리트 끄트머리에서 나타날 것 같아서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중얼거림 따위는 듣지 않고 케이의 재킷을 벗겼다. 등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대문에 기대게 만들었다. 케이는 얼굴에도 붉은 핏자국을 남긴 채로 잔뜩 찢어진 셔츠만 입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케이의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꺼풀을 뒤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케이의 눈빛이 살아났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뻗은 손을 꽉 잡고 엘리자베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시선의 지향점이 없던 눈동자와는 약간 달랐다.

케이가 말했다.

“네가 날 기다렸던 것처럼, 나도 널 기다렸어. 한참 여기에 서서…… 기다렸어…….”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케이의 손을 뿌리쳤다.

“늦었어! 늦었단 말이야!”

케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케이가 웃을 때마다 몸이 들썩이고 피가 더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찢어진 셔츠 안으로 보이는 수많은 상처들을 엿보며 케이의 뺨을 만졌다.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셔츠를 벗기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넌 꼭 오더군. 나는 오지 않았는데, 너는 꼭 와. 항상.”

“닥쳐. 닥치란 말이야. 이건 대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갈색 피부 위로 드러난 열상을 바라보았다. 이건 날카로운 짐승의 이빨이나 손톱, 발톱에 의해 찢긴 상처였다. 상처만 보아도 그간 케이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알 것 같아서 머리털이 삐쭉 섰다.

“……몰록과 싸웠어?”

엘리자베스는 다 찢어진 셔츠를 돌돌 말아 케이의 등을 지혈하기 시작했다. 케이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지혈할 필요 없어.”

“피가 너무 많이 흘러.”

엘리자베스가 불안한 눈빛으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잖아. 난 괴물이야. 엘리자베스. 난 괴물이라고…….”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리볼버를 꺼내어 바닥에 툭 던졌다. 엘리자베스에게 익숙한 리볼버였다. 엘우드 밀이 자주 들고 다녔던 것이므로.

케이는 리볼버 옆에 탄환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탄환 주머니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 그 안에 들어 있는 초록색 발광물질이 발린 탄환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엘우드 밀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뒷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뺨을 매만지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턱을, 푸른 눈을, 금발 머리카락을 오랫동안 제 눈에 담았다.

“엘 선생이 죽었어.”

엘리자베스는 아까보다 현저히 줄어든 출혈량을 눈으로 확인했다. 케이의 등을 꽉 누르던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옆얼굴을 보았다. 땀과 피로 흠뻑 젖은 케이의 옆얼굴에서는 체념이 묻어났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동생에게 물려서 말이야.”

“디트리히 폰.”

엘리자베스는 시야가 온통 뿌옇게 변하는 걸 느끼며 케이의 셔츠에서 손을 뗐다. 피투성이가 된 케이의 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

“몰록도 죽었어. 그건 내가 했지. 엘 선생의 총으로. 심장을 쐈어.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은 그 가죽이 이 총알에 닿으니까 쉽게 뚫리더군. 내가 죽였어. 엘 선생이 사랑했다는 동생을. 몰록은 참나무 숲을 통과하는 계곡 물로 빨려들어 갔고 엘 선생도 거기로 갔어. 엘 선생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알아?”

“케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괴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절대로 괴물이 되지 말라고 했어. 자기는 괴물이 되었었다고. 자기는 괴물로 살았었다고. 진짜 괴물은 사실 자신이라고.”

케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이 고통 때문인지, 슬픔 때문이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엘리자베스는 알 수 없었다.

엘 선생이 죽었다고?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케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모든 순간에도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엘우드 밀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랫동안 몰록을 쫓아왔으니까,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테니까.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생명의 은인임과 동시에 엘리자베스에게 수많은 과학적 지식을 전수해준 훌륭한 스승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가깝게 알던 한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그러나 슬픔은 잠시였다. 엘리자베스가 정신을 빼놓고 있는 사이에 케이가 리볼버에 탄환 주머니에서 꺼낸 총알들을 집어넣었다.

딸깍—

약실이 장전되면서 경쾌한 금속음이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뭐 하는 거지……?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는 그런 걸 물어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케이가 장전된 총을 들어올렸다.

케이는 총을 쥔 채로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숨결마저 느낄 수 있는 거리에서 케이가 말했다.

“나한테 또 기회가 있으면, 그땐 반드시 내가 널 구해주러 올 거야. 그땐 내가 시간여행기인지 뭔지를 타고 열 살짜리 엘리자베스 클레몬트가 기다리는 쉐필드로 갈 거야. 내가 그 어린 널 데리고 도망치겠어. 클레몬트 저택뿐 아니라, 이 레본에서 가장 값비싸고 귀하고 아름다운 너를 데리고…….”

케이의 목소리가 서서히 어둠에 물드는 하늘처럼 점점 잦아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케이의 건조해진 입술을 적시고 그의 입술을 열어 제 체취를 남겼다.

절망스러웠다. 엘 선생의 죽음 앞에서도 케이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안도하고 마는 스스로의 모습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때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밀어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떠밀려서 살짝 뒤로 밀려났다. 케이가 비척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자베스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벽에 손을 짚고 서서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가.”

“뭐 하는 거야?”

엘리자베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케이가 다시 한 번 딸깍, 총알이 장전된 약실을 확인했다.

케이가 뒤로 돌았다. 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듯했다.

엘리자베스가 다가가려고 하자 케이가 뒤로 물러났다. 그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엘리자베스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았다. 마차 소리이리라.

케이가 물었다.

“뭐야?”

“앰버 모건. 이쪽으로 오기로 했어. 일단 안으로…….”

엘리자베스가 말하는 와중에도 케이는 내내 총만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들어가.”

“무슨 소리야?”

케이가 총을 들어 제 관자놀이에 겨눴다. 케이가 핏발이 선 눈으로 소리쳤다.

“들어가라고,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난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을 거야! 아무도 날 도와줄 필요 없어! 난 혼자 할 거고, 내 시체를 발견하는 건 앰버가 될 거야. 네가 아니라!”

거센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점점 더 커져왔다. 마부가 말을 채찍질하는 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

케이의 손이 아주 약하게 떨렸다. 그것을 본 엘리자베스는 멀리서 들려오는 채찍질 소리에 제 심장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케이 하커.”

케이의 목울대가 살짝 움직였다. 케이의 눈은 두렵다기보다는 지쳐 보였다. 케이가 말했다.

“엘우드 밀은 자살했어. 몰록에게 물리고 몰록이 죽는 걸 보더니 그대로 자살했어.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는데도, 거절했어. 절대로 나한테 그런 기억을 남겨주지 않겠다고 하더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총을 뺏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케이의 움직임이 당연히 더 빨랐다. 케이는 뒤로 더 물러났다. 엘리자베스가 분노한 얼굴로 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 케이에게 던졌다.

“이 개 같은 자식! 엘우드 밀은 몰록이 될까 봐 자살한 게 아니야! 엘 선생님은…….”

엘리자베스는 흐느꼈다. 온몸을 누가 비틀어 짜는 것처럼 아팠다.

“엘 선생님은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셨어! 엘 선생님이 치료제를 만들 방법을 적어놓고 가셨다고!”

엘리자베스는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대문 철창을 쥐었다. 손등이 하얗게 되도록 세게 쥐었다.

그녀는 계곡 물 위에서 제 관자놀이에 총알을 쑤셔 박았을 엘우드 밀을 떠올렸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엘우드 밀.

그의 마지막 선택.

엘리자베스는 누군가가 그녀의 명치를 세게 때린 것처럼 가슴을 쥐고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의 얼굴은 당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총을 든 케이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 개 같은 자식아…… 엘 선생님이 치료제를 준 거야……. 넌 괴물이 아니야…… 넌 괴물이 될 수 없어. 그러니까 감히…… 감히 나한테 죽겠다는 말 같은 건 하면 안 돼…… 내가……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

나의 대단하고 소란스러운 녀석.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케이에게 소리쳤다.

“빨리 이리 와! 이리 와서…… 흐흑…….”

케이가 총을 내던졌다. 총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곤 그 커다란 체구로 엘리자베스를 감싸버리듯 안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품에 안겨서 중얼거렸다.

“이리 와서 나를 안으란 말이야…… 이 나쁜 놈아…….”

어둠이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주변을 가득 메웠다.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울음소리 위로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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