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84화
“키와 체구가 모두 케이와 비슷해요.”
엘리자베스의 눈에 침울함이 깃들었다. 그녀는 최대한 담담한 체하며 물었다.
“케이일 거라는…… 말인가요?”
앰버가 엘리자베스와 대화하는 사이에 변호사와 에드워드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 둘만의 대화를 나눴다. 두 여자의 대화가 무슨 내용일지 뻔히 알면서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앰버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주변 마을에 물었을 땐, 그 사람이 그 마을에서 빌어먹던 친척이나 가족이 없는 남부 사람이라고 했고, 실제로 어떤 농부가 그 남부 사람의 새끼손톱이 빠졌다고 했는데 그 시체에서도 새끼손톱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엘리자베스가 담담함을 위장했던 것을 그만두고 그 말에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꾸만 의심이 일었다.
그게 정말 케이였으면 어떡하지? 정말로…… 사실 그 남부 사람이 새끼손톱이 없듯 케이도 몰록과의 전투 중에 손톱이 없어진 거면……
엘리자베스는 잡초처럼 자라나는 의심 때문에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묻고 싶어요. 엘리자베스. 케이가 정말 돌아올까요?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돌아온다고 말했지만…….”
앰버의 질문에 엘리자베스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케이가 돌아오겠냐고?
엘리자베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남들에게 믿어달라 하겠는가.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앰버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챘다. 앰버는 그 시체를 케이로 만들자는 얘기를 하러 온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를 대동한 것이리라.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그런 제안을 정말로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속으로 가늠했다. 레트니가 붙잡히고 이 전쟁이 모두 끝나고 날 때까지 케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케이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고,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의 신탁 대부분을 남겼다는 사실을 다니엘 같은 자가 먼저 알아챈다면 뭔가 수를 쓸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앰버가, 에밀리가, 그리고…… 케이가 이뤄놓은 이 많은 변화들이 위기를 맞게 되겠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달싹일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케빈이 소리쳤다.
“돌아와요!”
“케빈?”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케빈을 돌아보았다. 케빈은 앰버를 노려보며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앰버는 케빈을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엘리자베스의 친구라는…… 그 친구군요. 그런데 수염도 나고…… 소년이 아니라 청년이 다 됐네요.”
케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에요.”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아서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왜 그래?”
“왜긴요. 저 여자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죠. 케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니. 케이는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케빈은 그렇게 말하며 힐끔 위층을 바라보았다. 프란시스가 내려올까 봐 걱정이 되는 얼굴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케빈이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케빈이 엘리자베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믿으라구요. 봤잖아요. 말해줬잖아요. 분명…….”
엘리자베스의 눈이 흔들렸다.
“분명 돌아올 거예요. 케이는 그럴 사람이니까. 꼭 그럴 거니까.”
케빈의 목소리에는 불안함이 담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자신도 믿지 못할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앰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앰버의 얼굴이 환해졌다. 케빈이 다급하게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엘리즈! 케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돌아보지 않고 앰버 쪽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이틀. 이틀만 줘요. 이틀만 기다려보고 케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땐 앰버 말대로 할게요.”
앰버의 얼굴이 굳어졌다.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던 에드워드도 두 사람에게로 걸어와 곤란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설득했다.
“이틀이면 레트니가 붙잡혀 올 거예요. 그 전에 조지가 의회주의는 물론이고 우리가 만든 권리장전에 서명하도록 해야 돼요.”
에드워드의 다급한 목소리에 케빈이 코웃음을 쳤다.
“결국은 케이가 아니라 당신들의 잇속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거군요! 사실 당신들, 케이를 그냥 이용하다 버릴 생각이었지? 차라리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거 아니야? 그래놓고도 케이의 친구라고 할 수 있어요?”
에드워드가 그 말에 발끈해서 케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 바람에 에드워드가 쥐고 있던 케인이 떨어지면서 바닥을 울렸다. 쿵, 소리가 나자 메리가 식사실에서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앰버가 곤란한 얼굴로 에드워드의 어깨를 쥐었다.
“진정해요! 진정해, 에드!”
하지만 앰버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에드워드는 케빈을 노려보며 눈물이 고인 얼굴로 소리쳤다.
“네가 뭘 알아? 케이가 어디 갔는지 알아? 알고 있으면 말해! 우리도 이 레본 땅을 다 뒤져서라도 케이를 찾아내고 싶으니까.”
“에드!”
앰버가 소리를 질렀다. 에드워드는 씩씩거리다가 서서히 케빈의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에드워드가 한 발자국쯤 물러나자 앰버가 에드워드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에드워드는 케빈의 옆에 있던 엘리자베스의 놀란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어요? 케이가 어디에 갔는지. 대체 왜 사라졌는지. 그 귀족 놈을 피떡으로 만든 거, 케이죠? 우리도 다 알고 있어요. 그놈을 피떡으로 만들고 사라질 이유가 뭐가 있냐구요.”
에드워드의 가슴께가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에드워드의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의 시선을 피했다.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케이가 어디에 갔는지는 엘리자베스도 알지 못해 대답할 수 없었고 왜 사라졌는지는 알아도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틀이요. 이틀이면 돼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마치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에드워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곧 변호사가 그를 따라갔다.
앰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틀이에요. 그리고…….”
앰버의 눈동자가 케빈에게로 옮겨갔다. 케빈은 망가진 셔츠 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케이가 돌아오지 않길 바란다는 말은 취소하는 게 좋을 거예요.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특히 에드워드는 더더욱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리는 모두 다 같이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이 일을 시작한 거예요. 우린 친구였고요. 친구를 잃고도 행복할 사람이 있나요?”
앰버의 고양이 같은 눈매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케빈은 앰버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어버버거리다가 이내 제 머리를 헝클이며 짜증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엘리자베스가 케빈을 불렀다. 케빈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나도 마음이 격해서 그런 거예요.”
“그랬겠죠.”
앰버는 케빈을 노려본 후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엘리자베스는 텅 빈 현관문 앞에서 식사실 문틀에 멍하니 서 있는 메리를 보았다. 그러며 메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메리가 에이프런에 손을 쓱쓱 닦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안 하셔도 돼요. 도련님은 돌아올 거고, 전 다른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는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렸다. 그러자 케빈이 당황해서는 허둥거렸다.
돌아올 거라니.
정말…… 돌아올까?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위는 고요하고 어둑어둑했다. 모든 게 바뀌었는데, 케이만이 돌아오지 않았다.
케이 하커.
이 개 같은 자식.
엘리자베스는 잠시 현관문을 나가서 문 앞에서 앰버와 에드워드, 그리고 변호사를 태우고 저 멀리 가고 있는 마차를 바라보다가 더 멀리 나갔다.
케빈이 엘리자베스를 따라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 잡혀주는 대신 대문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대문 창살을 열고 쭉 뻗은 거리를 바라보았다.
“엘리즈!”
케빈의 목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대신에 길게 이어진 거리 끝을 바라보았다.
케빈이 곁으로 와서 손을 잡았을 때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개 같은 자식.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스르르 놓아주었다.
* * *
“하, 이 정도 계약이면 십 년은 공장 운영에 문제가 없겠어요.”
미리엄은 백신 생산에 대한 회의를 마치고 나가는 엘리자베스에게 밝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말에 살짝 웃어 보였다.
미리엄은 엘리자베스의 야윈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뭘 좀 먹고 다니긴 하는 거예요?”
“그럼요. 그러니까 제발 이제 감자는 그만 보내줘요.”
엘리자베스는 다급하게 말했다. 미리엄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셜리가 뢰스티를 좀 해서 엘리자베스에게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될까요?”
“아유, 사양이에요.”
엘리자베스는 손을 내저었다.
앰버가 다녀가고 이틀이 지났다.
이틀 동안 남부의 귀족 대부분이 투항을 선언했고 갸흐통은 조지 국왕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철군을 선언했다. 엘린크 성 앞에 형성됐던 전선은 무너지고 니콜슨 공작과 왕비는 이미 리오든으로 투항해 들어왔다. 조지는 공작과 왕비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의 작위를 유지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귀족들의 바람과 달리 그들을 당장 구금했다. 레트니는 지금 남부 어딘가를 도망 다니고 있었다.
귀족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리오든을 가득 채웠던 시위대의 외침이나 노동조합의 출범 따위보다 귀족들은 니콜슨 공작과 왕비가 단두대에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세상이 변화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귀족들의 아둔함과 조지의 행동력에 놀랐다. 조지는 엘리자베스와 케이와의 약속을 생각보다 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어? 마차가 어디 갔지?”
미리엄은 공장 문 앞까지 엘리자베스를 배웅하다가 비어 있는 거리를 보곤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가 살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먼저 보냈어요. 오늘은 옴니버스를 타고 가려고요.”
미리엄은 엘리자베스가 옴니버스를 타는 게 걱정스러운지 몇 번이나 그녀에게 다른 마차를 부르라고 설득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로킨트 스트리트를 걸어서 내려왔다.
로킨트를 걸어 내려오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익숙한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을 만났다. 엘리자베스의 공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에게 인사하고 곧 담배를 피우며 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엘리자베스는 한참을 걸었다. 로킨트 끄트머리에 자리한 케이의 저택까지. 그녀는 저택의 정문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오늘 저녁에 로킨트 저택에서 만나요.]
앰버와의 약속 때문에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앰버는 오늘 발표하자고 할 것이고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케이 하커가 죽었다, 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엘리자베스는 느려지기만 하는 걸음으로 저택 정문으로 다가갔다.
하늘의 아래쪽은 붉었지만 위로 갈수록 어두워졌다.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저택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어두운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걸음은 계속해서 느려지다가 한순간 멈췄다.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동자가 대문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 하나에 꽂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대문 철창에 기대어 선 그 그림자는 엘리자베스의 기척을 듣자 엘리자베스 쪽을 바라보며…….
오만하게 웃었다.
엘리자베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엘리자베스가 뛰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발소리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그 그림자에게 뛰어들기 직전, 그 그림자가 입술을 열어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타났네. 나를 구원할…… 대단하고 소란스러운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