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83화
“뭘 만들어?”
엘리자베스가 케빈을 다그쳐 물었을 때였다. 그보다 먼저 저 멀리서 보비와 군인들의 저지선을 뚫고 기자들이 엘리자베스에게 다가왔다.
“엘리자베스 양! 질문이 있습니다!”
“탄저균의 종두법을 성공시키셨는데, 이 약의 이름을 뭐라고 부르실 겁니까?”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등을 밀었다.
“일단 저쪽으로 가봐요. 빨리요!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엘리자베스는 떠밀리듯이 기자들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는 눈앞에서 펑펑 터지는 플래시 불빛을 바라보며 케빈이 아까 한 말을 떠올렸다.
치료제를 만들었다고?
대체 어떻게?
미리엄은 분명 치료제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이, 루이가 엘리자베스의 등을 두드렸다.
“자네, 기자들이 질문을 하고 있지 않나! 대답해. 어서! 지금이 기회야. 자네와 에밀리를 암소 취급하면서 암소들의 반란이라고 기사를 써댔던 놈들한테 한 방 먹일 기회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말에 지난 기사들을 떠올렸다.
‘암소’라는 말은 켈리어스가 에밀리를 암소 취급한다며 엘리자베스를 비난한 데에서 나온 단어로, 한동안 엘리자베스의 종두법 내기를 두고 수많은 그림이 신문 지면을 채웠었다. 멍청한 암소들이 탄저균을 고칠 수 있다고 내기를 거는 그림들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그 그림들 속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던 암소들을 떠올리며 신사복을 입은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에밀리는 엘리자베스의 어깨에 제 팔을 올리고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였다.
기자들은 엘리자베스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 종두법 약의 이름을 뭐라고 지으실 겁니까? 앞으로 며칠 안에 엘린크 성이 이 약이…….”
“엘리자베스 양, 결혼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이쪽 한 번 봐줘요!”
엘리자베스는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에밀리의 친구 여공들을 바라보았다.
암소들의 반란.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갑자기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엘리자베스는 이제까지 클레몬트 공작이 키우는 암소처럼 살아왔는지도 몰랐다. 짙푸른 쉐필드 초원에서 매일 매일 자신을 구원할 소년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한 시도를 버거워하면서, 그렇게 변화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삶.
엘리자베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 약의 이름은…… 암소(vacca)에서 따서, 백신(vaccine)이라고 짓겠습니다. 우두법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접종 방식으로 탄저균을 치료하는 만큼 이건 종전의 우두법과 구분되는 백신이라는 약입니다. 수일 내로 백신이 이 레본 땅에 퍼질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이며 제가 이렇게 학술원의 지원을 받아 교수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조지 국왕 폐하의 덕입니다. 조지 국왕 폐하께서는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실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기자들 앞에서 또박또박 조지 국왕에게로 공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 있던 교수들이 일그러진 얼굴을 얼른 수습하고 박수를 쳤다. 그들은 ‘조지 국왕 만세’라고 소리치며 엘리자베스의 옆에서 어떻게든 웃는 얼굴로 사진이 찍히려고 얼쩡거렸다. 하지만 에밀리는 그런 교수들을 밀어내며 엘리자베스의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조지 국왕 만세!”
“조지 국왕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다!”
“전쟁을 승리로!”
엘리자베스는 저 멀리서 아스라하게 들리는 목소리들에 화답하듯 웃어보였다. 그러자 또다시 수많은 플래시가 터졌다. 엘리자베스는 쏟아지는 빛무리 속에서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 * *
그날 저녁은 리오든 거리 곳곳이 환하게 빛났다. 에밀리를 필두로 한 서프러제트들도, 노동자들도, 그리고 이민자와 이교도들도 저마다의 초를 켜고 거리를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승리가 가까이에 왔음을 느꼈다. 아마도 마음속으로 남부군을 응원했던 귀족들과 몇몇 젠트리 역시 그들의 패배를 직감했을 것이다.
레트니 애비뉴는 어두웠고 엘리자베스의 마차가 레트니 애비뉴로 도착했을 때는 사위가 고요했다. 그녀는 최대한 억제된 표정으로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에게 앰버가 밤늦게 방문하기로 했다고 전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케빈과 함께 2층 방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가 문을 닫기가 무섭게 케빈이 말했다.
“치료제를 개발했어요. 제가요. 제가 했다구요.”
“어떻게?”
엘리자베스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케빈이 품 안에서 짙은 색깔의 종이를 꺼냈다. 허브 향으로 가득한 그 종이는 낡은 끈으로 묶여 있었다. 끈을 풀자 종이 안에서 바싹 마른 잎이 드러났다. 엘리자베스는 허브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미리엄은 라듐을 분리할 정도의 강한 출력의 기기가 없다고 했어. 그런데 겨우 이런 걸로 출력을 낼 수 있다는 거야?”
케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출력을 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엘리즈.”
“뭐?”
“엘 삼촌이 써놨던 그 종이 생각나요? 그 설계도가 그려진 종이 말이에요. 온통 세세한 기기 설명을 써놓고, 그 밑에 이상한 단어가 쓰여 있었죠. 생각나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을 들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세세한 설계도 아래쪽에 적혀 있던, 해석되지 않는 갸흐통어 단어를 떠올렸다.
“로…… 로슈니. 그거?”
“맞아요. 로슈니. 그거 갸흐통어가 아니에요.”
케빈은 얼른 품 안에서 펜을 꺼내서 허브를 싸고 있던 종이 끄트머리에 ‘로슈니’라고 적었다. 그런 다음 그 밑에 엘리자베스로서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를 적고는 ‘로슈니’라고 다시 읽었다.
“로슈니. 이국어였어요. 아루쉬가 가르쳐줬어요.”
케빈은 그렇게 말하더니 엘리자베스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방 안에 있는 촛불을 꺼버렸다. 갑자기 방 안이 어둠에 잠겼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일어나는 일을 보고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어둠 속에서 풀이 빛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풀을 바라보았다. 케빈이 말했다.
“이국어로 ‘빛’이라는 뜻이래요, 로슈니는.”
빛.
엘리자베스는 풀에서 흘러나오는 초록색 빛을 바라보며 입을 막았다.
저렇게 환한 빛을 내뿜는 풀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저 초록색 빛은 엘리자베스에게는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케빈이 말을 이었다.
“미리엄에게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기계의 설계도가 현재 레본의 기술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우연히 아루쉬를 만났어요. 벨룬타에서 같이 약초를 고르는데 아루쉬가 ‘로슈니’라는 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어요. 초록색으로 빛이 나는 풀. 로슈니. 과거 10부족이 싸울 때 썼던 풀이래요. 물론 전설이지만.”
엘리자베스는 초록색 불빛 아래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로슈니라는 글씨를 바라보았다.
“이 풀을 많이 먹으면 사람이 괴물로 변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해요. 사람의 형태가 기이하게 비대해지고 하얀 털이 나고 이성을 잃어버린다고요. 그래서 원래 아루쉬의 땅에 10부족이 살았는데 그 10부족 중 한 부족이 다른 부족들을 이기기 위해 이 풀을 먹고 괴물 전사들을 만들었다가 결국 그 부족은 자멸했다고요. 하지만 이 풀을 약하게 먹으면 몸 안에 있는 병이 낫고 전보다 건강해진대요. 이 풀은 어두울 때 초록색 빛이 나는 바위들이 많은 곳에서 나고…….”
엘리자베스는 ‘초록색 빛이 나는 바위’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충분히 추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라듐일 것이다. 자연 상태의 라듐 말이다.
그리고 이 로슈니라는 풀은 라듐에게서 흘러나오는 방사능을 흡수하고 그것을 방출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하얀 털을 가진 괴물이라니.
분명 몰록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풀이 몰록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몰록이 되기 전의 인간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인가?
독을 약하게 쓰면 약이 되고, 약을 강하게 쓰면 독이 된다.
이건 백신과 다를 바 없는 원리였다.
케빈이 말했다.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래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지만, 로슈니라는 이 풀은 라듐이 많이 매립된 땅에서 자라나면 스스로 방사능을 흡수하고, 어둠 속에서 조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돼요. 이 풀을 농축시켜서 이렇게—”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눈에도 익숙한 기계를 꺼내보였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치료제를 담았던 주사기를 담은 의료 기기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초록색 액체를 바라보았다.
그 초록색 액체는 역시나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치료제가 되는 거예요,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치료제의 초록빛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침대 헤드를 붙잡았다.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을 때였다.
“……이제 남은 건 케이 하커가 돌아오는 것뿐이네.”
아래층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앰버 양이 오셨어요! 내려와 보세요!”
* * *
엘리자베스가 메리의 말을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앰버가 엘리자베스와도 안면이 있는 변호사와 함께 서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런 두 사람의 뒤에서 살짝 떨어진 채로 엘리자베스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정말 축하드려요, 엘리자베스. 백신이라니. 지금 리오든이 들썩이고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가 정중하게 제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앰버 역시 엘리자베스를 가볍게 안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리오든을 하나로 이어준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칭찬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건 다 그럴 만한 일이 일어난 거예요.”
“아뇨. 아니에요.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몰라요.”
앰버가 부드럽게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제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러자 앰버의 옆에 서 있던 변호사가 말했다.
“맞습니다. 백신 덕분에 조지 국왕의 세가 더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엘리자베스 양과 에밀리 양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고 노동조합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어요. 내일이면 신문에 그 소식이 실릴 겁니다. 윌슨 씨와 앰버 양도 힘을 썼지요.”
변호사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에게 웃어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고생했어요. 결국…….”
‘역사는 여자의 이름을 싣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는 제 말을 앰버가 결국에는 반박하는 데에 성공했음을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진심으로 앰버가 이룬 성취가 자랑스러웠고 저번 생과 달리 앰버가 결국 세상을 바꾸는 데에 성공했음에 기뻤다.
그 세상 속에 엘리자베스 역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케빈이 치료제를 발견했으니 이제 케이가 돌아오면 케이 역시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변호사와 앰버, 그리고 에드워드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앰버가 가만히 엘리자베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말 좋은 날이에요. 축배를 들어 마땅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해야 하는 말이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앰버의 다정한 목소리에 불안한 눈으로 에드워드와 앰버,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앰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엘린크 성 근처에서 짐승에게 물려 죽은 시체가 발견됐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