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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82화 (28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82화

만약 엘리자베스의 종두법이 거짓으로 밝혀져도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을 것이다. 조지 국왕은 새로운 협상책으로 엘린크 성주를 구슬릴 거고, 그러면 성주는 국왕의 동조자가 되어 넘어가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미 여론은 엘리자베스를 의술로 엘린크 성을 구한 영웅으로, 조지는 여성 교수를 배출한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둘을 기억할 테니까.

우습지만 대부분의 학술원 과학자들이 그런 방법으로 거짓 논문을 부풀리기도 했다. 당장 표본 집단 몇의 수치만 조작한 뒤, 나중에 반론이 제기 되면 그때는 이미 가지고 있는 명성으로 반론을 짓눌러버리는 방식 말이다.

과학이란 워낙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학문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폐하께서 이 일을 모르신다면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시죠?”

“그런 걸 묻는다는 건 결국 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얘깁니까?”

엘리자베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담배를 길게 빨아들이고 유리 재떨이에 짧아진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곤 짙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그때가 되면 폐하께선 저를 내다 버리시려나요? 제 목을 자르시려나요? 저한테 실망하시거나 저를 팽개치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레트니의 목을 매달 충분한 힘을 가지시길 바랄 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엘우드 밀을 떠올렸다.

“엘린크 성주와의 관계는 그 물꼬가 될 겁니다. 레트니를 유폐시키더라도 레트니가 살아 있다면 귀족들은 계속 폐하의 앞날에 방해가 될 테고, 저는 그걸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양도 그렇지 않습니까? 레트니가 살아 있는 게 소름끼치게 싫지 않습니까? 엘리자베스 양의 부모를 죽인 게 누군지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엘우드 밀이라면, 그녀의 스승이자 천재 과학자였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

엘리자베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웃겼다.

엘우드 밀이라면 당장 다니엘에게 얼음물을 던지고 소리쳤을 것이다.

‘너 지금 내가 실패할 거라고 말하는 거냐? 멍청한 자식! 난 절대 실패하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거리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그러자 다니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당신의 말은 제가 탄저균 종두법을 성공시키지 못할 거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게 웃겨서요.”

“무슨…….”

엘리자베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품 안에 가지고 있던 리볼버를 다시 꺼내 보이며 말했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요. 궁으로 돌아가서 국왕 폐하를 잘 보필하면서 내일 신문이나 기다리고 있으라구요. 난 절대 실패하지 않아. 왜인지 알아?”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 같은 오만한 얼굴로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다니엘은 헛웃음을 지었다.

‘난 천재니까!’

엘우드 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니까. 난 이 거지같은 레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여자 과학자라고!”

엘리자베스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 다니엘이 키득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진심입니까?”

다니엘이 담담하게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리볼버를 품 안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외침을 듣고 에밀리가 막 응접실로 온 것이 보였다. 다니엘이 그런 에밀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에밀리 양의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겠다는 거죠?”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에밀리와 눈이 마주쳤다. 에밀리는 피식 웃더니 벽에 몸을 기대고 삐딱하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이 내기는 나와 엘리자베스가 함께 하는 거예요, 궁에서 온 아저씨.”

다니엘은 에밀리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에밀리와 눈을 맞추던 다니엘은 이윽고 천천히 시선을 옮겨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나가요. 당장.”

* * *

다니엘은 엘리자베스에게 내쫓기듯 저택을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이 사라진 후 잠시 현관문에 이마를 기댔다. 엘리자베스가 한참이나 그러고 있자 프란시스는 그녀의 뒤로 가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엘리자베스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얼른 그녀에게 가서 안겼다.

프란시스는 잠시 놀란 것처럼 서 있다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꽉 안았다. 엘리자베스가 프란시스의 품 안에서 중얼거렸다.

“절대로…… 프란시스는 나를 떠나면 안 돼요.”

그 말에 프란시스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더 세게 엘리자베스를 안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날 밤엔 창문을 열어보지 않고 잤다.

케이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바쁜 일들이 마음을 채웠다. 에밀리와 탄저균, 그리고 전쟁…….

다음 날 아침, 엘리자베스는 왕립학술원 강당, 기자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에밀리에게 탄저균을 노출시켰다. 켈리어스는 내내 떨떠름한 얼굴이었고 루이는 긴장된 얼굴이었다.

에밀리는 떨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는 무척이나 떨었다. 에밀리의 목숨을 두고 내기를 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이틀 동안 에밀리에겐 전혀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틀 후, 켈리어스는 에밀리에게 탄저균을 직접 주입시키는 실험을 해야 한다고 우겼고, 루이는 그 말에 반발했지만 내기 조항이 애매모호했던 탓에 에밀리는 흔쾌히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자리에서 에밀리에게 탄저균을 주입시켰다.

에밀리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프란시스는 레트니 애비뉴에서 하루를 꼬박 지새웠다.

엘리자베스는 그 다음 날 아침 갸흐통이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신문에는 갸흐통뿐만 아니라 줄줄이 군대를 빼기로 한 귀족들의 투항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은 조지 국왕의 군대에게 먹을 곳과 쉴 곳을 제공하며 이 나라가 빨리 ‘통합’되길 바란다는 취지의 말을 전해왔다.

엘리자베스는 귀족들의 말을 대부분 믿지 않았지만 ‘통합’이라는 말에는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통합.

그 평화롭고 고요한 어휘.

그 말에는 레트니를 매달거나 참수해 목을 거는 것 같은 격렬한 최후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귀족들은 레트니의 죽음을 별로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레트니가 조지의 친부인 만큼 조지가 레트니를 죽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레트니가 살아만 있다면 귀족들은 언젠가 다시 자신의 시대가 올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었다.

마치 찰스 아이드가 아무리 의회주의 혁명을 일으켰어도 결국은 목이 잘린 동상으로 남았던 것처럼.

하지만 남부 귀족들의 그런 의미심장한 발언과는 상관없이 리오든은 연일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조지는 ‘나의 승리는 리오든의 승리이며, 리오든 시민들은 마땅한 대가를 받을 것이다’라고 공표했다. 리오든에서 ‘마땅한 대가’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노동조합의 출범이 발표되었고, 노동자들은 리오든의 7월 15일을 노동자의 날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의 시위를 벌였다. 계엄령하에서 시위는 철저하게 금지되었으나 오늘만큼은 길거리에 시위대가 넘쳐났다. 조지는 그런 시위대를 막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 시위대가 모두 조지의 사람들임을.

엘리자베스는 시위대 때문에 꽉 막혀 움직이지 않는 마차 안에서 에밀리와 함께 이 소식들을 읽었다. 에밀리는 때때로 마차 창문을 열고 시위대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면 시위대는 에밀리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목적지까지 겨우 몇 걸음 남지 않은 곳에서 도무지 마차를 움직일 수가 없자 마차에서 내렸다. 수많은 인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냄새가 엘리자베스의 코를 찔렀다.

레본의 한여름.

7월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 중에는 기자들도 있었고, 시위대도 있었고, 그저 행인도 있었으며, 보비나 군인들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에게 팔짱을 끼며 에밀리의 상태를 살폈다.

에밀리의 상태는 완벽하게 건강했다.

에밀리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거지 같은 레본에서 살아남은 여자들이에요, 엘리자베스.”

에밀리의 목소리는 곧 시위대의 목소리와 기자들의 목소리에 파묻혔다. 기자들이 소리쳤다.

“에밀리 양의 상태가 건강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감 한 말씀……!”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기자들의 질문 틈새로 간간이 시위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조지 폐하께서 여성들의 참정권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동시에 엘리자베스 양은 왕족의 지위를 되찾아 상원과 하원 전부에 출마하실 수 있는데요, 다시 국회의원으로…….”

“노동자들에게 인간의 권리를!”

“케이 하커 씨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

“여자들에게 인간의 권리를!”

“케이 하커 씨가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추측이 많은데…….”

“이교도들에게 인간의 권리를!”

엘리자베스는 작열하는 태양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자신이 ‘후세를 위하여’라고 쓰인 청동판 앞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젠장. 젠장할.

그녀는 컬로든 궁부터 왕립학술원, 벨룬타 공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보비들과 군인들은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망할 세계가 망하지 않고 변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루이 교수는 엘리자베스와 에밀리가 청동 앞에 서자 에밀리의 상태를 천천히 살피고 잠시 뒤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내기는 엘리자베스 양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여기 계신 에밀리 양의 상태는 완벽하게 건강합니다!”

루이의 목소리는 내내 차분하다가 마지막에 약간 흥분조로 돌아섰다. 엘리자베스는 루이를 보았다. 기자들 사이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에밀리가 저도 모르게 루이를 껴안았다. 루이는 씨익 웃으며 에밀리를 껴안고 엘리자베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축하한다. 축하해,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목소리를 아스라하게 들으며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축하드립니다, 엘리자베스 양.”

켈리어스와 교수들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엘리자베스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저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를 들으며 제 심장께를 두드리고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 나라는 변하고, 이 세계는 망하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엘리자베스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책상을 짚었을 때였다. 에밀리가 신이 나서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렸죠? 당신이 지금 학술원의 교수가 됐어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숨을 쉬는 것에만, 적어도 그것을 하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 것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그때,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엘리즈!”

엘리자베스가 뒤로 돌았다. 그러자 다급한 얼굴 하나가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쓱 나타났다. 엘리자베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케빈 퍼킨!”

학술원 앞은 축제 분위기였다. 시위대들은 엘리자베스의 승리를 기념하며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은 그저 더위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울먹거렸다.

“케빈…… 나…… 나 말이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엘리즈, 내가 치료제를 만들었어요! 내가 만들었다고!”

케빈이 소리쳤다. 못 보던 사이 케빈의 턱과 뺨은 거뭇하게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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