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81화
이오페아 곳곳에서 연합군이 도착하고 있다는 소식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선더렌에서, 멜니아에서, 할터른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이국에서도 군대가 도착했다.
엘리자베스는 정확한 내막은 몰라도 이국에서 군대가 도착한 것과 케이가 아루쉬와 함께 레본으로 귀국했던 것 사이에 연관이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지리멸렬한 공방전으로 이어질 것 같았던 전쟁은 순식간에 리오든의 압도적인 승리에 가까워졌다. 신문은 매일매일 분명하고 간결한 승리의 소식으로 가득 찼다.
[갸흐통 정부에서 외교관을 보내다.]
[남부 귀족군, 일부 투항.]
[남부 항구, 조지 국왕 폐하의 발아래 무릎 꿇다. 해양 무역 재개되나?]
[전쟁에서 진 레트니의 최후는 어떻게 될까? 레트니가 조지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다. 과연 그 내용은? 화해의 서한? 국왕은 화해를 받아들일까?]
엘리자베스와 에밀리의 기사도 틈틈이 신문을 채웠다. 2차 접종에 관한 소식과 함께 켈리어스 교수가 엘리자베스가 학술원에서 무척 게으른 학생이었다는 폭로를 한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
프란시스는 그 인터뷰를 본 날 무척이나 분노했다. 에밀리는 1차 접종 이후 내내 레트니 애비뉴에서 머물렀다. 에밀리는 첫날에 사과를 한 바구니 잔뜩 사와서 엘리자베스와 프란시스에게 선물하고 식사 때 콩을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나자 프란시스는 2층을 구경시켜 주면서 엘리자베스가 사다놓은 어린 아이들을 위한 쉬운 책을 에밀리에게 읽어주었다.
에밀리는 처음에는 화를 냈지만 나중에는 프란시스가 읽어주는 책을 달달 외우면서 옆에 적었다. 에밀리가 모음과 자음을 구분할 수 있게 되고 이중모음, 이중자음까지 읽을 수 있게 되는 일주일 동안에—
케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엘우드 밀도, 몰록도 나타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일주일을 버티면서 케이의 말을 실감했다. 케이가 없으면 프란시스를 돌보면서 엘리자베스가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말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에밀리를 가르치며 조금씩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나아질 게 없다는 생각으로 좌절한 사람에게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큰 힘이 되었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가 틈틈이 벨룬타 공원 근처 약초상에 가서 아루쉬가 일러준 약초를 사와 우려내면 그것을 차처럼 마셨다. 하지만 차를 마시지 않는 날에도 이제 꾸벅꾸벅 조는 것을 그만두고 산책을 다녔고, 산책을 하다가 에밀리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이 생기면 담배나 술을 사는 값 대신에 책을 사서 모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프란시스와 에밀리를 살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동안 앰버 모건이 두 번 레트니 애비뉴를 방문했다. 다행히 에밀리는 앰버와 서먹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에게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으며 전쟁이 곧 끝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에밀리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엘리자베스가 잠시 1층으로 내려갔을 때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지는 못했다.
에밀리는 2차 접종 이후에도 큰 무리 없이 생활을 했고 하루는 감기 기운이 있다는 말에 셋이서 밤을 꼴딱 샜지만 그마저도 그저 재미있는 사건으로 기억될 뿐 큰 문제는 없었다.
탄저균에 에밀리의 몸이 면역이 생겼는지 확인하기로 한 전날까지는 말이다.
그 전날 밤, 누군가가 레트니 애비뉴의 문을 두드렸다.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목소리를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다니엘 빌리스였다. 엘리자베스는 당황했다. 이 사람이 여기에 올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다니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허리를 숙인 그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올려다보곤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못 본 새에 많이 야위었네요, 엘리자베스 양.”
요새 늘 듣는 말이었다.
잠에 깊게 드는 게 아예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밤이 되면 엘리자베스는 자꾸만 창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창문을 열면 저 어두컴컴한 거리 끝에서 케이 하커가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
엘리자베스는 그래서 창문을 열고 오랫동안 거리의 끝을 바라보곤 했다.
“……아무래도 내기 때문에 많이 신경이 쓰이시는 모양입니다.”
다니엘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이 아직 케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정확하게는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앰버가 중간에서 애를 쓴 덕이든지, 아니면 워낙 컬로든 궁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탓이리라.
앰버는 케이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으면 무슨 방법을 써야 한다고 말했었다.
‘물론 이런 얘기 듣기 껄끄럽겠지만……. 시체보관소에서 악어한테 물린 시체라도 빼와야겠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것으로요. 그래야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재산을 맘대로 처분할 수 있고, 그래야 조지가 전쟁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킬 테니까요. 자칫하다간 때를 놓칠 수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화를 내지도 않았고 서운하게 느끼지도 않았다. 앰버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했지만 엘리자베스는 괜찮았다.
요즘엔 케이가 멀쩡하게 돌아올 수 없다면—
차라리 영영 돌아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저 매일 밤, 저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며 케이를 기다리며 희망을 품을 수라도 있게.
엘리자베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니엘에게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에요.”
다니엘은 엘리자베스를 위로하며 곧 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프란시스와 에밀리에게도 인사를 했다. 다니엘은 에밀리에게 특히나 오랫동안 말을 걸며 에밀리가 이번 내기에 나서준 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처사였는지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봤자 아직 탄저로 인해서 꾸준히 전선에서 환자가 나오고 있어요. 제대로 종두법이 효과를 발휘하는지도 모르구요. 요새 상황을 보면 종두법의 효과보다 전쟁에서 이기는 게 더 빠를 것만 같은데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다니엘은 다른 말을 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응접실에서 프란시스와 에밀리가 잠시 나간 사이에 다니엘은 그 말에 대답했다.
“연합군의 압도적인 군사력 때문에 컬로든에서 엘리자베스 양의 종두법을 주시하지 않게 되었다는 건 엘리자베스 양의 착각입니다. 여전히 국왕 폐하께서는 엘리자베스 양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어요.”
“……설마 전쟁에서 이길 것 같다는 게 타블로이드의 거짓말인가요?”
엘리자베스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다니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전쟁에선 반드시 이길 겁니다. 폐하에게 레트니가 편지도 보내왔어요. 몇 가지 요구를 받아들여주면 전쟁을 끝내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그 요구를 다 받아들여주면 왕권을 다시 돌려줘야 하는 거지요. 어쨌든 편지의 내용보다는 레트니가 그런 편지를 보냈다는 게 중요합니다. 수세에 몰렸다는 거니까요.”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편지를 보내다니. 레트니는 엘리자베스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엘린크 성주의 문제입니다. 성주가 전쟁에서 이기는 듯하니 탄저병 문제를 국왕 폐하께 해결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게 되더라도 탄저병이 타블로이드들이 떠들어댄 대로 마녀의 병이니 뭐니 하는 소문이 퍼져 있으면 앞으로 엘린크 성주로서 성을 운영하는 게 아주 곤란해질 테니까요. 그리고 물론 엘린크 성 안에서 의심환자를 관리하고 격리하는 건 이런 전쟁 상황에서는 꽤나 곤란한 일입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니엘에게 엘린크 근처에서 커다란 체구를 가진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지는 않았는지, 혹시 하얀 털북숭이 악어를 목격했다는 농부는 없었는지 따위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엘리자베스가 그런 걸 물어볼 시간을 주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왔습니다. 물론 제가 여기에 온 것은 국왕 폐하는 모르시지요.”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조지가 모르게 다니엘이 독자행동을 했다는 것이 의아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소파 옆에 있는 서랍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니엘이 피식 웃으며 그 서랍장을 힐끔 보았다.
“저곳에 리볼버가 들어 있는 모양이죠?”
엘리자베스가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제가 못 쏠 거라고 생각하시죠?”
“뭐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빠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다니엘이 제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엘리자베스는 재빨리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첫 번째 서랍이 열렸다. 다니엘이 더 빨랐다. 그가 서랍 안에서 리볼버를 꺼내는 것을 본 엘리자베스는 품 안에서 다른 리볼버를 꺼내 다니엘을 겨눴다. 다니엘이 씨익 웃었다.
다니엘은 제가 든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틱.
약실에 총알이 들어 있지 않은 리볼버가 헛도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이런 재주가 있으셨군요. 사기에 재능이 있어요.”
“당신한테 칭찬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언제부터 품 안에 리볼버를 가지고 계셨습니까?”
“당신이 저택에 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요.”
엘리자베스는 담담하게 다니엘에게 말했다. 다니엘은 졌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엘리자베스가 방아쇠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다니엘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 총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 양은 제가 엘리자베스 양을 쏠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지만 저는 엘리자베스 양을 죽일 만큼 미워하지 않거든요. 원하시면 직접 안주머니를 뒤지세요.”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다니엘에게 걸어가 그의 외투 안주머니를 만졌다. 그러자 거기에서는 쇠로 된 매끈한 담배 케이스가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케이스를 던졌다. 그리고 리볼버는 다시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니엘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다니엘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허공에 뱉어낸 뒤 엘리자베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기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으니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에밀리 양에게 노출시킬 탄저균 말이에요. 그걸 바꿔치기 할 생각입니다. 엘리자베스 양이 도와주시면요.”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었다.
다니엘의 얼굴을 가린 뿌연 담배 연기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신음소리를 냈다.
“지금 저한테 뭘 도우라구요?”
“이 전쟁에서 엘리자베스 양과 조지 국왕 폐하를 더 큰 승리자로 만들 사기를 도우라는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밀려들어오는 담배 연기에 손사래를 쳤다.
탄저균 종두법이 성공하게 되면 조지는 엘린크 성주와의 갈등을 손쉽게 해결하게 될 것이고, 엘리자베스는 이 전쟁에서 한몫을 한 영웅이 될 것이다.
그뿐인가. 엘리자베스는 학술원 교수가 되어 최초의 여성 과학자가 아니라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될 것이다.
더 큰 승리자.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계산이 틀림없음을 알고 비릿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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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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