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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80화 (28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80화

[넌 모든 사람들이 너를 보고 있는 걸 모르지. 보지 않으려고 해도 샴페인 잔을 집어 올리다가 창문을 열러 가다가 담배를 꺼내다가 너의 푸른 눈동자나 네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우아한 단어들이나 네가 고개를 숙일 때 보이는 목덜미의 작은 잔털 따위에 모든 사람들이 숨을 멈추는 걸……

너만 모르지.

너는 널 몰라.

네가 얼마나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지, 듣지 않으려고 해도 너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들리는지, 네가 하는 말들—

그래. 특히나 네가 하는 말들.]

그쯤에서 잉크가 짙게 뭉쳐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거기서 오랫동안 숨을 고르다가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꾹꾹 눌러썼던 글씨가 잠시 옅어지고 가늘어졌다.

[네가 내뱉는 우아하고 복잡한 말들. 예술과 사회에 관한 고상한 말들.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 지명, 용어들. 너는 내가 그 수많은 말들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했다가 실제로 읽는 책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대하고 화려한 닭장 같은 집에 와서 책장을 다 꺼내어 찾아보는 걸 모를 거야.

너는 모르지.

너는 날 조금도 몰라.

그러니까 그런 편지를 썼겠지. 내가 널 봐줬으면 좋겠다느니, 네가 날 바꾸고 싶다느니—]

거기서 글씨는 다시 진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조금 제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 내내 케이의 말투가 생각나서, 그 다혈질의 개 같은 성미가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헛소리도 하는 거지. 네가 나에게 알려준 시인의 이름들과 내가 평생 가볼 일 없는 도시의 건축물들, 그리고 들으러 가본 적도 없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쓰이는 악기 속 부품들을 나는 모조리 기억하고 있는데도.

너는 모르는 거야. 네가 날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를.

나는 그게…… 그게 너무 싫어.]

케이는 싫다, 라는 말을 꾹 눌러서 썼다.

[내가 얼마나 시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도, 그 시 속에 나오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모습을 자꾸 내 삶과 비교하게 되는 것도,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던 도시를 거닐고 싶어지는 것도, 그 도시를 함께 걷고 있을……. 너를 생각하게 되는 것도.

나는 너무 싫어.

너는 내 세상을 바꿀 거야. 분명히 알 수 있어.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나는 외롭고 부족하겠지.

그러니까 난 절대로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너의’라는 말을 썼다가 지운 것을, 엘리자베스는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랬다.

엘리자베스는 차가운 공장 바닥에 주저앉아서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기분을 맞닥뜨렸다.

나의.

나의 케이.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 * *

케빈은 다음 날까지 학술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학술원에서 밤을 샜기 때문에 케빈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케이가 사라진 지는 이제 나흘째가 되어갔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마음으로 엘린크 소식을 실은 신문을 틈틈이 사모아 정독했다.

엘린크에 흰색 괴물이 나타났다거나 산짐승이 사람을 물어갔다거나 하는 소식 따윈 없었다.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엘리자베스는 깨끗하게 밤을 새우고도 조금도 졸리지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정문에서 에밀리와 만나서 기자들이 모여 있는 학술원 내부 강당으로 향했다. 강당에는 이미 켈리어스를 비롯한 교수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를 보며 반갑다는 듯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 딱딱하게 인사를 하고 에밀리와 함께 강당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플래시가 마구 터졌다. 엘리자베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엘리자베스는 뒤늦게 강당에 들어온 루이 교수님이 기자들을 향해 자제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조금이나마 장내가 진정되었을 때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접종을 시작할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기자들을 향해 미리 가지고 온 커다란 가방에서 주사약을 꺼냈다.

“여기 이게 바로 탄저균입니다. 미리 균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썼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자들이 동시에 엘리자베스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엘리자베스느 차분하게 몇 가지 질문에 대답했다.

엘리자베스의 대답이 끝나자 정해진 순서대로 뒤에 앉아 있던 켈리어스 교수가 약병을 확인하기 위해 일어났다. 켈리어스는 약병을 확인하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

“왜 그러세요?”

엘리자베스가 나지막이 묻자 켈리어스가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어제 그 약병이…….”

“병만 바뀌었습니다, 교수님.”

켈리어스의 말을 끊으며 밑에 앉아 있던 켈리어스의 조수가 말했다. 켈리어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조수 둘을 바라보았다. 켈리어스는 조수의 말에 황당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걸 왜 자네가 대답하지?”

“아, 그게…… 제가 실수를 좀 해서요.”

“실수?”

켈리어스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루이 교수는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제가 실수로 엘리자베스 양의 약병과 교수님의 연구에 쓰이는 약병을 바꿔서 다른 장치에 넣을 뻔했더라구요? 자칫했다간 강한 멸균으로 엘리자베스 양의 내기를 제가 망칠 뻔한 것을 지나가던 루이 교수님이 발견하고 지적해주셨습니다. 두 약병이 너무 비슷해서 벌어진 일 같은 데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왜 그게 저희 연구실로 딸려왔는지…….”

엘리자베스는 조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켈리어스를 보았다.

사실 엘리자베스는 그 약병이 왜 그 연구실로 가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켈리어스 교수가 빼돌린 탓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 교수가 계속해서 약병을 빼돌리고, 약의 성분에 장난질을 칠 것을 알고 병을 바꿀 방법을 궁리했다. 켈리어스 교수와 다른 교수들이 알아볼 수 없게 말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켈리어스 교수가 알게 되더라도 절대로 꼬투리를 잡을 수 없는 방법이여야 했다.

타인의 손을 빌리는 방법 말이다.

그것도 켈리어스의 측근 같은 사람의 손.

엘리자베스는 조교의 말에 켈리어스가 벌컥 화를 내려는 것을 보고 얼른 말했다.

“그게 정말 왜 교수님 연구실에 가 있었을까요? 혹시 누가 바꿔치기를 한 건 아니겠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켈리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지금 자네 나를…….”

“네? 제가 언제 교수님을? 저는 그냥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일하는 누군가를 상정해서 말한 겁니다.”

엘리자베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왜 찔려 하냐는 말투였다.

그러자 켈리어스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켈리어스는 무척이나 불쾌한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그는 도움이라도 구하듯 뒤에 있는 교수들을 보았다. 하지만 교수들은 헛기침을 하며 켈리어스의 눈을 피했다. 자신이 용의선상에 오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켈리어스는 한숨을 내쉬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바뀐 병으로…….”

“걱정하지 마십쇼! 거기엔 병을 바꿀 때는 저뿐 아니라 루이 교수님도 계셨으니까요. 그렇지요, 교수님?”

조수가 해맑은 얼굴로 루이에게 동의를 구했다.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가 제 조수에게 보내는 강렬한 눈빛을 바라보며 조수의 미래에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켈리어스가 조수를 얼마나 노려보든 간에 루이 교수는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댄 채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봤습니다, 켈리어스 교수님. 그러니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약으로 바뀌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으니까요. 아, 그리고 에밀리 양도 걱정하지 마세요.”

루이 교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에밀리에게 말을 걸었다. 에밀리는 루이의 미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안 합니다. 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죠!”

에밀리가 큰 목소리로 말하자 기자들이 에밀리의 농담에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가 일부러 에밀리에게 말을 걸어서 켈리어스에게 이 사실을 환기시키려고 했음을 깨달았다.

당신은 계속해서 엘리자베스가 싫어서 실험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실험이 에밀리에게 위험해서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았나.

켈리어스가 내세웠던 이 대전제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켈리어스는 에밀리가 자신의 조교의 말에 수긍하고 실험의 진행에 동의한 이 상황에서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해서는 안 되었다.

켈리어스는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루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루이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손뼉을 마주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러자 기자들이 전부 루이를 바라보았다.

“그럼 접종을 시작합시다. 우리 모두 이 실험의 성공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여기에 있는 에밀리 양의 숭고한 희생에 큰 감사를 드리며, 이 실험의 성공이 엘린크에 있는 병사들에게 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교수님들?”

루이는 교수들을 바라보았다. 교수들은 켈리어스처럼 탐탁지 않은 얼굴로 저마다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루이가 말을 덧붙였다.

“설마, 전쟁에서 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죠?”

루이의 말에 교수들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지금 무슨 말을!”

“무슨 말도 안 되는!”

“조지 폐하 만세!”

엘리자베스는 교수들의 반응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교수들이 저마다 갑작스러운 충성맹세를 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주사약을 주사기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피스톤을 살짝 움직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주사기를 흔들었다.

에밀리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불안하게 말했다.

“윽, 저 바늘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죠. 꽤 아플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에밀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마치 칭얼거리는 소녀 같은 얼굴이었다.

에밀리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 감아도 될까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켈리어스가 지금 뒤쪽에서 조지 국왕에 대한 자신의 충심을 막 열거하려던 찰나였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에밀리의 팔을 들어올렸다. 엘리자베스가 에밀리의 팔에 주사기를 가져다대자 켈리어스의 목소리가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엘리자베스는 점점 줄어드는 주사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빨리 이 빌어먹을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이 전쟁만 끝나면 당장 엘린크로 가서 케이를 찾아내겠다고.

그리고 케이에게 가짜 약이라도 먹이고 그걸 치료제라고 속인 다음 멜니아로 끌고 가겠다고.

엘리자베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주사기를 뽑아냈다. 에밀리의 눈썹 끝에 눈물이 고였다.

그때였다.

강당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전투가 시작되었어요! 당장 기사를 써야 돼요! 나와요!”

엘리자베스는 강당 뒤를 바라보았다. 에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자들이 전부 자리를 우르르 이탈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강당을 채웠다.

“이오페아 연합군이 서부 항구로 어젯밤에 도착해서 이미 남부에 닻을 내렸다는군.”

“내부에선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야!”

“젠장할, 특종을 놓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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