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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79화 (27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79화

에밀리는 도개교 앞에서 내려달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사우스리오든까지 데려다달라는 강당에서의 말과는 달라 당황했지만 에밀리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기분이 났어요. 엘리자베스. 것보단 균이나 보관을 잘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내일 난 죽고 싶지 않거든요.”

에밀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살짝 웃었다. 엘리자베스가 웃는 것을 보더니 에밀리가 밝게 엘리자베스의 팔을 툭 쳤다.

“웃으니 보기 좋네요.”

에밀리가 그렇게 말하며 마차 문을 열었을 때였다. 때마침 사우스리오든으로 가는 도개교 앞을 지나던 한 무리의 여자들이 멈춰 섰다. 그들은 에밀리처럼 피부가 까무잡잡한 여공들이었다. 에밀리는 여자들을 보더니 씨익 웃으며 그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이봐! 앤! 나야!”

에밀리가 친근하게 한 여자의 이름을 부르자 여자가 놀란 눈으로 마차에서 내리는 에밀리를 보았다. 여자들은 금방 우르르 모여들었다.

“어디 갔다 와?”

“노스리오든 납품처에 갔다 오지! 오늘 누가 네 얘기를 하던데. 학술원에서 에밀리가 기자들의 눈길을 확 끌었다고? 그런데 이젠 마차에서 내리는 거야?”

앤은 장난스럽게 에밀리의 엉덩이를 툭 건드렸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보고 살짝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여자들이 엘리자베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별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려서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긴 원피스로 된 작업복을 입은 여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리자베스를 쳐다보았다.

“와, 그러니까 공녀님하고 에밀리가 친구가 됐다는 건가?”

주근깨가 가득한 한 여자가 에밀리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에밀리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엘리자베스의 팔짱을 꼈다.

“당연하지. 우린 친구야, 이제. 내가 엘리자베스 양의…….”

“조력자니까요.”

엘리자베스가 에밀리의 말을 이었다. 에밀리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살짝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자들은 에밀리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이 어린 여자들이 얼마나 끈끈한 우정과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엘리자베스가 사교 모임에서 만나왔던 영애들과는 달랐다. 이 여자들은 에밀리를 부러워할 일이 생긴다고 하여 에밀리에게 질투의 눈빛을 보내거나 엇나간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다만 에밀리에게 엘리자베스와 한 얘기나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본 것들을 전부 공유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이들이 내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자신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로 물러났다.

“전 이만 가볼게요, 에밀리. 덕분에 아주 고마웠어요. 신문에 글을 쓰는 만큼이나 말을 아주 잘 하더군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에밀리가 얼굴을 붉혔다. 엘리자베스의 말은 진심이었다. 에밀리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할 뿐이지 그 글 속에 나오는 모든 개념과 논리를 소화할 만큼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에밀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문자뿐이었다.

그때, 앤이라고 불린 여자가 말했다.

“에밀리의 글을 읽으셨어요? 역시 공녀님은 글도 잘 읽으시는 군요! 저도 언젠가 글을 열심히 익혀서 에밀리처럼 글을 쓰는 게 목표예요. 공녀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모르시겠지만…….”

엘리자베스는 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에밀리를 보았다. 에밀리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앤에게 얼른 대답했다.

“제가 에밀리를 통해서 글을 배우기 좋은 쉬운 책들을 몇 권 보내줄게요. 한 번 보면서 배워봐요.”

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다.

“정말이요?”

같이 있던 여자들이 앤의 호들갑을 보며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에밀리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다 같이 돌려봐도 좋아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되도록 사서 보낼 테니까 같이 읽어봐요, 알겠죠?”

엘리자베스가 에밀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에밀리가 끙, 소리를 내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에밀리의 귓가가 새빨갰다. 에밀리의 입꼬리가 숨길 수 없이 씰룩거렸다. 앤이 말했다.

“하지만 글을 읽을 줄 아는 노부인이 하나 있어서, 그분이 저희에게 글을 읽어주신답니다. 그때 엘리자베스 양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과학자라니. 너무 대단해요, 공녀님!”

앤이 눈을 반짝거리며 엘리자베스에게 수줍게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말했다.

“네, 너무 대단해요. 제 딸도 나중에 크면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딸이 있어요?”

“네, 열여덟 살에 낳았어요. 이제 두 살이에요. 둘째는 한 살이구요.”

엘리자베스는 그 여자의 말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어린 소녀들은 체구는 왜소했지만 적어도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일 테고, 에밀리처럼 주변의 시선에 격렬하게 대응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지지 못하면 미혼의 여성이 공장에서 일하는 건 쉽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미혼의 여성이면서 직업을 가진 탓에 많은 기자들이 그 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저도 학교를 다녀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공장에서 일하는 게 더 급해서 얼른 결혼부터 했어요. 하지만 제 딸이 학교를 가고 싶어 할 때가 되면 남편한테 공녀님 얘길 하면서 설득해볼 거예요. 제 딸이 원한다면 말이에요.”

여자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레본이 어떤 곳이었는지 차갑게 실감함과 동시에 자신이 누군가에겐 하나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 기뻤다. 이를 테면 언덕 위의 하얀 색 말만 바라보며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은 하얀 색이라고 우기는 이들에게 엘리자베스는 버젓이 언덕 위에 나타난 검은 말과 같은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편지에 쓰여 있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넌 모든 사람들이 너를 보고 있는 걸 모르지. 보지 않으려고 해도 샴페인 잔을 집어 올리다가 창문을 열러 가다가 담배를 꺼내다가 너의 푸른 눈동자나 네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우아한 단어들이나 네가 고개를 숙일 때 보이는 목덜미의 작은 잔털 따위에 모든 사람들이 숨을 멈추는 걸……

너만 모르지.]

[너는 널 몰라. 네가 날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를.]

엘리자베스는 꾹꾹 눌러쓴 글씨들이 제 눈앞에서 번뜩이는 것 같은 환각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여자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뭐가요?”

“그렇게 말해줘서요.”

내가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해줘서.

엘리자베스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는 얼른 마차 안으로 다시 올라탔다. 에밀리는 마차 문틀을 잡고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내일 만나요.”

“네, 그래요.”

에밀리가 마차 문을 닫았다. 열린 마차 창문 너머로 여공들이 깔깔거리며 에밀리를 둘러싸는 것이 보였다. 에밀리는 금방 그들 중 하나가 되어 엘리자베스의 눈앞에서 멀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와 여공들을 바라보며 잠시 마차를 돌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토비가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아가씨? 마차를 돌려요?”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제약공장으로 가자.”

엘리자베스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한 가지 생각만을 했다.

살아 있어라.

반드시.

반드시 살아 있어라.

* * *

엘리자베스가 제약 공장에 도착했을 땐 미리엄이 막 정문으로 들어가려는 참인 것처럼 보였다. 엘리자베스와 마주친 미리엄은 그간 너무 바빴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을 위로하며 공장 내부로 들어갔다.

공장 내부는 미리엄의 말처럼 정신이 없었다. 수많은 토닉워터 물량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엘리자베스는 공장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미리엄과 함께 사무실로 올라와서야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혹시 케빈이 오지 않았나요?”

미리엄이 눈을 끔뻑거렸다.

“케빈이요? 아, 케빈 퍼킨! 그 음험하게 생긴 남자애요?”

음험? 미리엄의 말에 차를 가져다주러 온 셜리가 미리엄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지그시 눌렀다.

“흥. 잘생기기만 했구만!”

“잘생기긴! 남자는 자고로 시원시원하게 생기고 몸이 좋아야지! 비리비리해서는 하얀 얼굴에 얼굴도 요만 하고.”

미리엄은 제 손가락을 가리키며 케빈의 얼굴이 얼마나 작은지를 강조했다. 셜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곧 사무실에서 나갔다. 미리엄은 셜리가 가져다준 차로 입을 축이곤 말했다.

“그 녀석 왔다갔어요. 이상한 설계도 같은 걸 가지고 왔던데요? 제철소에도 갔다 왔다고 했어요.”

엘리자베스는 긴장된 얼굴로 미리엄에게 물었다.

“그 설계도, 만들 수 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미리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부공장장님이 시키신 거였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면 케이가 시켰나? 케이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설계도를 내밀었을 리는 없을 텐데. 그런데 그 녀석 요새 뭐가 그렇게 바빠서 코빼기도 안 보여요? 앰버 양이 급한 돈은 변호사랑 와서 해결해주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이 투덜거리는 것을 중간에 끊고 미리엄의 말을 낚아챘다.

“터무니없는 설계도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러자 미리엄이 말했다.

“그래요. 그 설계도, 말이 안 돼요. 거기에 필요한 만큼의 전기를 구동시키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구요. 아마 요새 잘 나가는 왓슨 회사가 와도 고개를 내저을 걸요? 돈도 돈이지만 아예 공장이 그 전력을 버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설계도면에 있는 기계는 너무 작고……. 어디서 그렇게 터무니없고 쓸데없이 세밀한 설계도를…… 부공장장님? 괜찮아요?”

미리엄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하얗게 질린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비척거리면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미리엄이 놀라서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손이 너무 떨려요. 괜찮으세요? 갑자기 체하기라도…….”

“아예…… 아예 불가능하다구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미리엄이 말했다.

“네. 아예 불가능해요.”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말을 들으며 창틀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는 새하얗게 변한 손마디만큼이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결국은 엘우드 밀이 돌아오더라도, 케이가 살아서 돌아오더라도, 만들 수 없는 치료제였나.

엘리자베스가 결국 주저앉았다. 엘리자베스가 무너지자 미리엄이 놀라서 소리쳤다.

“아가씨! 아가씨!”

미리엄은 벌떡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었다.

“셜리! 이리 와봐! 아가씨가!”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목소리를 아스라하게 들으며 눈앞에 자꾸만 선명하게 어른거리는 케이의 편지를 떠올렸다.

[엘리자베스에게.

네 편지는 잘 받았어. 네 터무니없는 편지 말이야.

내가 널 한 번이라도 봐줬으면 좋겠다니. 이 세상에 그렇게 멍청한 소리가 어디에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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