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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78화 (27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78화

“괜찮지 않을지도요?”

대답하지 못하는 엘리자베스 대신에 뒤에 있던 에밀리가 목소리를 냈다. 에밀리는 덧니를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에밀리의 말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방금…….”

엘리자베스가 에밀리를 쳐다보았다. 에밀리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피부 탄저로 실험했을 때 죽을 확률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여기 엘리자베스가 설명해주었습니다만 제 피부는 괜찮지 않을지도 모르죠. 제 피부에 검은 점이 나타나면 드디어 마녀가 화형당하기 시작했다며 사람들이 좋아할지도 모르구요. 아니면 마녀의 저주에 마녀도 걸렸다며 이상하게 여기려나요?”

에밀리는 능숙하게 기자들을 남부 사투리로 휘어잡았다. 에밀리의 노동자 어투는 악센트가 강해 무척이나 잘 들렸고 기자들은 에밀리의 농담에 실소를 터트렸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가 그간 타블로이드의 집중 포화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자신이 간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에밀리는 타블로이드와의 전쟁을 몇 번이나 견뎌낸 여자였다.

에밀리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옆으로 데리고 왔다. 곧 플래시가 팡팡 터지면서 엘리자베스의 눈앞에 빛무리가 어른거렸다.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는 왕립병원에서 병사들을 치료하는 데에 헌신하는 훌륭한 리오든의 시민입니다. 엘린크에서 병사들이 싸우고 있다면 우리들은 이곳에서 병사들을 돕기 위해서 싸우고 있죠. 제가 위험을 감수하지 못할 이유가 뭘까요? 안 그런가요?”

에밀리는 마치 대본을 읽는 배우처럼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기자들은 에밀리의 말을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었고, 에밀리는 자신의 대답이 끝나면 또 다른 질문을 맞닥뜨리고 또 거침없이 대답을 해댔다.

엘리자베스는 작은 등을 가졌던 시골 소녀 에밀리에게 의지한 채로 학술원 앞으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와 에밀리에게 기자들의 온 관심이 쏠리자 켈리어스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 특히나 에밀리가 피부 탄저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리오든의 승리를 위해 열심히 싸우는 사람인지를 짚은 덕분에 학술원 앞의 기자들의 관심사는 실험의 비윤리성 따위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깨닫고 켈리어스를 노려보았다. 켈리어스는 엘리자베스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 여러분. 이제부터 여기 있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과 약학 교수회의 내기가 시작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내기는 엘리자베스 양이 시작한 것으로…….”

내기를 내가 시작했다고?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를 힐끔 보았다. 그는 신사다운 미소를 띠고 거만한 자세로 기자들에게 말을 이어갈 뿐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마치 엘리자베스가 이곳에 서 있는 동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시하고 있었다.

“……이번 내기를 저는 사실 약간 우려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양이 교수 임용을 앞당기기 위해 무리한 실험을 강행하는 것이 아닌가…….”

켈리어스는 순식간에 엘리자베스와 에밀리로부터 자신에게 기자들의 관심을 돌리고 기자들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있었다. 그 먹이는 바로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였다. 그 먹이를 중심으로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에밀리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나는 적어도 학술원의 교수라면 이것보단 나을 줄 알았어요.”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의 말에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가 웃기가 무섭게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렸다. 에밀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방금 저 사진, 분명히 신문 1면에 쓰일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거만하게 웃었다. 이런 식으로요.”

헛웃음을 지은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나도 기자들이 이것보단 나을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요.”

켈리어스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내기를 시작합니다. 이 내기는 다들 아시다시피 엘리자베스 양이 ‘사람’에게 ‘우두법’을 시행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으면 엘리자베스 양이 학술원에서 교수가 되고, 엘리자베스 양이 실패하면 엘리자베스 양이 학술원에서 쫓겨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켈리어스는 일부러 ‘사람’이라는 말과 소에게 접종한다는 뜻의 ‘우두법’이라는 말을 병치해서 엘리자베스의 실험이 우습게 보이도록 했다.

엘리자베스가 뭔가 말하려고 하자 에밀리가 고개를 저으며 엘리자베스의 팔을 꽉 잡았다.

“그냥 둬요. 엘리자베스. 당신이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실험에서 이기는 것뿐이에요. 남자들은 말로만 떠들어대도 뭔가를 가져가지만 여자들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뭔가를 가져갈 수 있죠. 그렇지만 당신은 성공할 거잖아요. 안 그래요?”

에밀리가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에밀리.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 * *

엘리자베스와 에밀리, 그리고 학술원의 교수들 몇이 함께 커다란 강당 같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미리 준비한 탄저균을 교수들이 보는 곳에 살균 장치에 넣었다. 루이 교수님은 내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켈리어스는 기자들이 사라지자 비열한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이 멍청한 내기를 시작한 것을 후회하게 해주지, 엘리자베스 양!”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의 협박, 으름장, 모욕을 담담히 듣고 있었지만 에밀리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어요. 엘리자베스.”

“……네?”

에밀리는 두 다리를 의자에 얹고 불량한 자세로 켈리어스를 지그시 보았다. 켈리어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런 천박한 여자를 학술원에 들여놓다니! 학술원 공기가 점점 나빠지겠구만!”

에밀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에밀리는 그런 조롱에 대답하는 대신에 담담하게 엘리자베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국왕의 사촌이면 말이에요. 국왕 폐하에게 직접 어떤 어떤 교수들의 연구비를 삭감해주시면 좋겠노라, 말씀드릴 수도 있나요?”

에밀리의 말에 켈리어스를 비롯한 교수들이 흠칫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그렇겠죠?”

엘리자베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기 때문에 오히려 교수들은 더더욱 어깨를 움츠리고 겁을 먹었다.

“이를 테면?”

“이를 테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든지, 터무니없는 실험으로 연구비를 횡령하고 있는 것 같다든지요.”

“캬. 그것 참, 길에 채일 만큼 흔한 사유네요!”

에밀리가 그렇게 말하며 조롱을 이어가던 교수들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교수들은 엘리자베스가 국왕의 사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가 저렇게 국왕과의 사이가 돈독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에밀리가 속으로 통쾌해하는 사이 교수들이 담배를 피러 나가겠다며 우르르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강당에는 에밀리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루이만이 남았다. 루이가 에밀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무 경거망동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만.”

“왜요? 댁은 도덕적인 문제나 터무니없는 실험에 연구비를 횡령하는 일은 안 하나 보죠?”

에밀리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어 피우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를 노려보았다. 에밀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설마 강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안 된다는 말을 할 건 아니겠죠. 저 사람들 다른 강당에 가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에밀리의 말에 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의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일전에 루이가 엘리자베스의 내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을 떠올렸다.

루이 교수가 말했다.

“저 교수들이 당신 눈에는 다 우습게 보이겠지만 이 실험의 윤리적인 정당성 논란을 제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오. 모든 실험에는 변수가 있지. 그런데 그게 사람의 생명이라면 모든 과학자들은 비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고.”

루이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스승에게서 그런 눈빛을 받는 것이 괴로웠다. 그리고 루이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아무리 피부 탄저가 죽을 확률이 ‘적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탄저병으로 사람들은 죽을 수 있었다.

루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왔다. 루이는 살균 장치 내부를 살펴보며 말했다.

“용량은?”

엘리자베스를 루이의 질문에 마치 졸다가 기습 질문을 받은 학생처럼 더듬거리며 계획한 용량을 설명했다. 에밀리의 몸무게에 비례하여 맞춘 용량이었다. 에밀리는 자신을 무슨 가축처럼 이야기한다고 옆에서 투덜거렸지만 루이는 에밀리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품 안에서 작게 접힌 종이를 하나 꺼냈다.

그때 강당 뒤편에서 교수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는 재빨리 엘리자베스에게 그 종이를 쥐어주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교수들이 훔쳐간 책들, 그 안에서 너에게 필요한 정보만 간단하게 적었다. 그리고 닭 실험 때 예기치 않게 1차, 2차로 나누어서 접종했듯이 사람에게도 1, 2차 접종 시기를 떨어뜨려 놓는 게 나을 거야. 이유는 종이에 적었다.”

루이의 말에 에밀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거만한 신사가 엘리자베스를 돕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이에게 물었다.

“분명히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고…….”

“안 주고 있어.”

루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도움말이다. 안 주고 있는 거라는 말이야.”

루이는 힐끔 교수들을 바라보았다. 교수들은 저들끼리 뭔가 말을 맞춘 것처럼 엘리자베스에게 우호적인 얼굴로 생글거리며 들어왔다. 켈리어스가 말했다.

“엘리자베스 양! 이따가 연구실에 균을 넣어놓고 같이 식사라도 하러 가는 건…….”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이가 그들에게 제 입모양이 보이지 않도록 뒤를 돌아서 말했다.

“그리고 균은 반드시 공동 연구실이 아니라 내 연구실에 보관하는 게 좋겠다. 거기엔 자물쇠도 있고…….”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루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에게 커다랗게 대답했다.

“식사라니, 참 좋은 말씀이지만 저는 가볼 데가 있어서요.”

그리고 루이에게 작게 대답했다.

“아뇨, 교수님. 그것보단 다른 방법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뒤이어 엘리자베스가 살균 장치를 살피는 척하면서 고개를 루이 쪽으로 숙여서 조용히 하는 말에 루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까지 해야 된다는 말이냐?”

에밀리는 피식 웃으며 뒤에서 말했다.

“신사들이 얼마나 비열한지 잘 아시잖아요?”

에밀리는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아닌 척 교수들을 가리켰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에밀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마차를 태워줘요. 부잣집 아가씨가 된 기분에 중독된 것 같아요. 내 부탁, 들어줄 거죠?”

에밀리가 씨익 웃자 그녀의 덧니가 드러났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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