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77화
“하지만 갑자기 왜요? 왜 실험자가 되겠다는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미심쩍다는 듯이 말했다. 에밀리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더니 키득거리며 웃었다.
“왜일 거 같아요? 내가 내 일도 아닌 살인 때문에 컬로든 정문 앞에서 자고 체포되고 지붕에 올라가고 그러는 게 왜일 거 같아요?”
에밀리는 말 끝에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내 일이기 때문이다.
평민 하녀들이 죽어가고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지 못하고 또 하나의 여성 과학자가 사기꾼으로 내몰리는 건—
결국 또 전부 ‘우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 부엌에서 프란시스가 올라왔다. 엘리자베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에밀리 역시 부서진 콩을 냅킨 아래 숨기며 접시로 시선을 옮겼다. 프란시스는 그런 엘리자베스와 에밀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커다란 스프 통을 가리켰다.
“더 먹을 사람?”
* * *
식사가 끝나고 프란시스는 에밀리에게 차를 한 잔 대접하려고 했지만 에밀리는 밤이 너무 늦었다며 거절했다. 프란시스는 아쉬워하며 현관까지 에밀리를 배웅했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와 함께 현관 밖으로 나가 토비에게 에밀리를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에밀리는 토비가 마차를 끌어오는 것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저런 고급 마차라니. 인생에 이런 경험도 나쁘지 않네요.”
에밀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그럼 언제 어디로 가면 되죠?”
엘리자베스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내일 왕립병원으로요. 오후에 사우스리오든으로 갈게요.”
“또 마차를 타고 오나요?”
“그럴까요?”
에밀리의 장난스러운 말에 엘리자베스가 살짝 웃으며 물었다. 에밀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는 토비가 마차를 끌고 오자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벌렸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의 뺨에 입을 맞추고 에밀리에게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에밀리는 키득거리며 마차 안에 올라탔다.
“내가 무슨 아가씨가 된 것 같아요. 레트니 애비뉴에 사는 먼 친척을 방문하러 온 시골 자작 영애 같은 거요.”
에밀리는 웃을 때면 앳된 티가 났다. 에밀리가 화난 얼굴로, 슬픈 얼굴로, 절망적인 얼굴로 신문에 사진이 찍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를 태운 마차가 정문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다시 현관으로 돌아올 때까지 프란시스는 현관에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프란시스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계단 난간에 기대어 있던 프란시스가 말했다.
“케이는 오늘도 공장에서 잔다고 하니?”
엘리자베스는 우뚝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응접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엘리자베스에게 부드러운 소파의 감촉이 딱딱하게 와 닿았다.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뒤를 따라 응접실 소파에 자리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럴 거예요. 당분간요.”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둘이 싸웠다든가…….”
프란시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다가 이내 체념한 얼굴로 팔걸이에 손을 얹고 그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면 어디가 아픈 거니?”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질문에 잠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어디가 아플까? 지금 케이는 어디에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빅오크 포레스트를 헤매고 있을 케이 하커를 떠올려보았다.
밖은 어둡고 고요했다. 하지만 숲은 결코 고요하지 않을 테다. 쉐필드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온 엘리자베스는 숲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짐승들은 인간들처럼 제 집으로 돌아가 불을 끄고 자는 게 아니라 달빛을 받으며 언제나 사방을 경계하며 살아갔다.
몰록처럼.
밤이 되면 숲은 인간의 눈치를 보느라 평화롭고 아름다운 척했던 낯을 벗어던져버리고 그 무서운 야생의 낯을 드러낼 것이다.
사위는 짐승의 울음소리, 알 수 없는 신음소리, 그리고 나뭇잎이 떠는 소리로 가득할 것이고 케이는—
케이는 어디쯤에 있을까.
하얀 털을 가진 괴물이 되어 괴물과 싸우고 있을까? 아니면 인간으로 명예롭게 죽어가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엘리자베스의 마음이 편할 턱이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프란시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케이가 돌아오면 혼을 내주자.”
프란시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한 바람에 엘리자베스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웃는 것도 잠시,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검은 눈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혼이 나야 할 사람은 저인 것 같아요.”
“왜?”
프란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검은 눈동자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희망 따위는 전부 사라진 초라한 내 모습.
이걸 바라고 과거로 돌아왔던 것은 아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전쟁도 테러도 없었던 지난 생을 떠올려보았다. 차라리 지난 생에서처럼 몰락한 귀족으로 떠돌아다녔다면 어땠을까? 과학자 같은 것은 감히 꿈꾸지 않고 공작부부의 비밀을 파헤칠 생각도 하지 않고……
케이 하커, 너를 가질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프란시스를 보았다.
“제가 다 망쳤어요. 제가 바꿔버린 거예요. 케이도, 프란시스도…….”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랬다면 프란시스는 이곳에 없었겠지. 그런 생각이 엘리자베스를 붙잡았던 탓이었다. 미리엄도, 프란시스도 지난 생에서라면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꾸만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멈추고 프란시스를 보았다.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꽉 잡더니 말했다.
“뭘 바꿨다는 거야……?”
“제가 감히 탐내면 안 될 걸 탐낸 것 같아요. 제가 괜히 과학자가 된다거나 그런 말을 해서…….”
“……에밀리 저 여자를 죽이게 될까 봐 두렵니?”
프란시스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들으셨어요?”
“그래, 들었다. 그 어린 여자애가 바닥에서 콩을 줍는 것도 봤어.”
프란시스가 살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들으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작은 에밀리의 등을 떠올렸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정말 성공할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아무도 해보지 못한 거지, 엘리자베스. 해보지 않은 게 아니라.”
프란시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도 해보지 못했으니까 아직까지 탄저병에 걸려 사람들이 죽어가는 거고. 넌 세상을 바꿀 거야.”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뺨을 손등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세상을 바꿀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없었다.
프란시스는 몰랐다. 엘리자베스가 퀴닌을 개발한 것은 사실 이미 누군가가 ‘해봤던’ 일이었다는 걸.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길을 간 것일 뿐이라는 걸.
하지만 탄저균 종두법은 달랐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의 심장이 이렇게 어린 새처럼 파닥거리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작게 접힌 낡은 종이 하나를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내가 오늘 맘대로 케이 방을 뒤졌단다. 이 나쁜 자식이 무슨 짓을 꾸미는 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내민 종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두꺼운 목탄 스케치용 종이의 감촉을 느끼며 그것을 폈다.
종이를 펴자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져 있었다.
[엘리자베스에게.]
엘리자베스는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 종이를 다시 엎어버렸다. 엘리자베스가 떨리는 눈으로 프란시스를 보며 물었다.
“이걸…… 이걸 케이 방에서 발견했다구요?”
“그래. 읽진 않았어. 첫 문장이랑 마지막 부분만 빼면 말이야.”
프란시스는 폐부에 남아 있는 공기를 전부 끌어올리듯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내 세상을 바꿀 거야. 분명히 알 수 있어.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나는 외롭고 부족하겠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편지를 다시 열어보았다. 가장 아래 줄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너는 내 세상을 바꿀 거야. 분명히 알 수 있어.]
“그러니 난 절대로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난 절대로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밑에는 검은 밑줄이 그어져 있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와 그 옆에 케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말을 들으며 편지를 촛불에 비춰보았다.
그러자 숨겨진 글씨가 드러났다. 어찌나 꾹꾹 눌러 적었던지 선명하게 쓰여 있는 글씨.
[너의]
케이 하커.
* * *
다음 날 오전, 엘리자베스는 조금 늦게 일어나 케빈을 만나러 학술원에 갔다.
하지만 케빈은 없었다. 대신에 아루쉬를 잠시 만날 수 있었는데, 아루쉬가 케빈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벨룬타 공원 근처에서 만나서 같이 약초를 보러가기로 했어요. 오늘 새벽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마주쳤거든요.”
케빈이 치료제를 만들 실마리를 찾았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곧 루이 교수님의 호출을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켈리어스를 비롯한 교수들을 만났다. 그들은 엘리자베스에게 내기를 들먹거리며 오후에 학술원 앞에 기자들이 올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의 조롱에 가까운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바뀌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당당한 태도에 켈리어스는 우습다는 듯이 오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길로 사우스리오든에 들러 에밀리를 마차에 태웠다. 긴장한 엘리자베스에 비해 에밀리는 밝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다독였다. 엘리자베스는 거꾸로 된 것 같은 상황에 조금 우스워졌고 마음이 조금이나마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와 에밀리를 태운 마차가 거리마다 멈춰 섰다. 보비와 군인들의 숫자가 하루 만에 늘어났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꽃들은 하루 만에 사라져 있었다. 행인들도 거의 없었다. 리오든에도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역시 하나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에게 당분간 레트니 애비뉴에서 지내며 엘리자베스의 관찰하에 있기를 부탁했다. 에밀리는 흔쾌히 승낙했다.
에밀리는 긴장한 기색이 별로 없었는데, 막상 학술원 앞에 마차가 도착하자 얼굴을 살짝 찌푸리기는 했다.
학술원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우르르 마차 쪽으로 몰려드는 기자들을 보며 에밀리에게 말했다.
“이제 사람들이 당신과 나를 놓고 마녀들이라고 부를 거예요.”
“원래는 안 그랬다는 것처럼 말하네요.”
에밀리는 웃었다. 에밀리는 엘리자베스보다 먼저 땅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기자들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비켜요! 비켜!”
“엘리자베스 양, 이곳에 에밀리 양과 함께 나타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탄저병을 치료하는 약을 발명할 생각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정말 가능한 가요?”
“이번 내기에 대해 들었습니다. 켈리어스 교수는 엘리자베스 양의 실험이 윤리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음…… 켈리어스 교수는 에밀리 양을 ‘암소’ 취급한다고 엘리자베스 양을 비난했습니다. 그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엘리자베스는 기자의 말을 듣고 ‘후세를 위하여’라고 적혀 있는 청동판 앞에 서 있는 켈리어스 교수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