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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76화 (27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76화

에밀리는 엘리자베스의 부름에 힐끔 뒤를 돌아 보았다. 에밀리는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의 호칭이 친근하게 바뀐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얼른 에밀리에게로 걸어갔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놀란 눈으로 에밀리와 엘리자베스를 번갈아 보았다.

“너 정말 이 여자랑 아는 사이구나?”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갸웃하자 에밀리가 말했다.

“내가 당신이랑 아는 사이라고 했어요. 실제로 아는 사이잖아요? 이 집에 와서 자고 가도 된다고 했다고도 했구요.”

에밀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정말로 자고 갈 곳이 필요해 온 거예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사우스리오든에 있는 공장에서 숙식할 수 있다고 해서 그쪽으로 갈 거예요. 거기 내 친구가 있어서 필요하다면 가끔씩 공장 사무실에서 원고를 쓸 수 있게도 해준다고 했구요. 덕분에 당분간은 잘 곳 걱정은 덜었죠. 그리고 당신 때문에……. 리오든에서 마녀 재판을 당할 걱정도 덜었구요. 내가 말한 증거를 보비들에게 잘 전달해줘서 정말 고맙다는 얘기를 하러 왔어요. 억울한 죽음을 당신이 막았잖아요.”

에밀리가 남부 사투리를 쓰며 말하는 통에 프란시스는 어지럽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케빈이 붙잡힌 일로 에밀리의 도움을 받았어요. 들어오게 해주세요. 식사라도 대접해야 돼요.”

프란시스는 케빈을 도와줬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에요?”

프란시스가 현관문을 열어주자 에밀리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전 이런 좋은 저택에서 식사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요? 제가 은식기 같은 걸 부러뜨리거나 흠집을 내면 어떡하죠?”

에밀리의 말에 프란시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 아가씨, 재밌어!”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하자 에밀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진심이에요, 프란시스 부인! 전 끽해봐야 스프와 빵과 치즈가 나오면 정찬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왔다구요! 있는 사람들의 식사라니…….”

에밀리는 콜린이 나와 인사를 하자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진심이에요? 나한테 인사를?”

콜린은 당황한 얼굴로 뒤따라 들어온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대충 넘어가라는 표정을 지었다. 콜린은 에밀리를 잠시 빤히 바라보고는 에밀리가 주춤거리자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빤히 보았죠? 하지만 분명히 어디서 뵌 적이 있는 것 같아서요. 이제 보니 신문 기사에서 자주 뵙던 분이군요.”

“네, 네. 아주 악랄한 마녀라고 신문 기사에 자주 실리죠.”

에밀리의 냉소적인 대답에 프란시스가 일부러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여기에 이제 마녀가 세 명이 된 셈이네요! 여기가 바로 마녀의 집이거든요!”

프란시스가 저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밀리는 프란시스의 신랄한 말투를 들으며 엘리자베스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돈 많은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도 어렵진 않네요.”

엘리자베스는 뭐라 대답할지 몰라 그저 에밀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식전주를 줄까요? 아니면 담배?”

에밀리는 얼른 대답했다.

“당연히 둘 다죠!”

* * *

에밀리는 스스로의 말처럼 정찬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에밀리가 은식기를 떨어뜨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귀족들의 식사 방식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엘리자베스가 일러주는 대로 식기를 사용하려는 노력은 기울였다. 에밀리는 밥을 먹으면서 내내 현관 쪽을 쳐다보았는데, 엘리자베스가 왜 그러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앰버 모건이요. 그 여자가 오나 하구요.”

“오면 나가려구요?”

엘리자베스가 농담조로 묻자 에밀리가 입맛을 다셨다.

“뭐……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 사실 전에도 앰버 플래스, 아니, 앰버 모건을 만난 적이 있거든요. 그때 그쪽에서 뭔가를 제안 해왔는데…… 내가 거절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좀 바보 같은 일이었죠. 그땐 나는 일종의 환상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었거든요. 나처럼 가난하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죽을 위기에 처한 여자들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이요. 물론 노동은 정당하고 신성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춤추고 노래하고…… 그런 건 노동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에밀리에게 했을 제안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박람회가 있기 전, 케빈이 켄터베리 홀 1층 커피 하우스에서 에밀리를 본 적이 있다고 했고 그때 아마 앰버가 에밀리에게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함께 ‘우리’가 되자고.

엘리자베스는 착잡한 얼굴로 에밀리를 보았다. 에밀리는 생선을 자르는 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엘리자베스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저요?”

“네. 당신은 꽤나 유명인사잖아요. 공녀님이고 국왕의 사촌인데 동시에 과학자이고 평민들 중에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구요. 하지만 난 당신이 국왕의 끄나풀이라고 여겼거든요.”

에밀리의 직설적인 말에 프란시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에밀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에 고생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은 손, 고상하게 책을 넘기면서 바지에 셔츠를 입고 취미로 신사 흉내까지 내는 여자.”

“지금 날 모욕하는 건가요?”

엘리자베스가 차갑게 물었다. 그러자 에밀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거였다면 여기에 들어와서 이런 은식기를 써서 식사를 하고 있지도 않겠죠. 난 모욕을 하려고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없어요. 내 말은 그런 고상한 방식으로도 세상이 바뀐다는 걸 느꼈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나처럼 지붕에 올라가거나 오물을 투척할 필요는 없다는 걸 말이에요. 한 가지 전술만 가진 군대는 적군을 이길 수 없는 법이죠.”

“당신도 글을 쓰잖아요.”

“아, 그렇죠. 그 글……. 뭐, 글을 쓰죠. 그런데 내가 쓰는 글은 프로파간다 같은 거예요.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는…… 뭐 그런 거요. 나한테 레본은 전쟁터거든요.”

에밀리는 냅킨으로 입을 쓱 닦고는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프란시스는 에밀리와 엘리자베스의 논쟁이 길어지리라는 예감을 가진 듯 음식을 더 내오겠다며 부엌으로 내려갔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나한테도 레본은 전쟁터예요. 우리 모두한테 그래요. 에밀리. 지금도 많은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고 난 그걸 막으려고…….”

엘리자베스는 입맛을 다셨다. 엘리자베스가 말을 하다 말자 에밀리가 엘리자베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뭔데요? 그걸 막으려고 뭐요?”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말해요.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도울 수 없어요. 내가 당신이 컬로든 궁 앞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시위하는 것을 도울 수 없듯이요. 이건 의학에 관련된 거예요.”

“의학?”

에밀리는 포크로 콩을 집으려고 들다가 접시 밖으로 콩을 발사시켜 버리곤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프란시스 부인에겐 말하지 말아요.”

에밀리는 얼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콩을 주웠다. 엘리자베스는 영락없는 시골 아가씨 같은 그 모습에 조금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탄저병에 대해 신문에 난 거 봤어요? 그걸 막는 종두법을 실시해보려고 해요. 그러려면 아무래도 건강한 사람에게 실험을 한 번 해봐야 하는데…….”

“누구한테 하려구요?”

에밀리는 콩을 들어서 슬그머니 냅킨 아래에 숨겨놓고는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나죠. 내가 아니면 누구한테 하겠어요.”

“……네?”

에밀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이 의사인데, 당신이 당신한테 주사를 놓는다구요? 말도 안 돼요!”

“왜요?”

엘리자베스가 눈을 끔뻑거리자 에밀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사람들은 그런 거 안 믿어요. 의사가 제 몸을 치료했다. 제 몸으로 뭔가 사기를 치려고 하는 게 아닐까? 나 같은 대중들은 그렇다구요. 글씨도 못 읽으니까 신문 같은 것도 누가 읽어줘야 아는 걸요! 그런데 당신이 당신 몸에 주사를? 누가 나한테 그런 기사를 읽어주면 난 그 의사를 절대 안 믿으려고 들 거예요.”

에밀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에밀리를 빤히 보았다. 그러자 에밀리가 헛기침을 하면서 눈을 슬쩍 피했다.

“기사를 읽어줘야 안다구요?”

“……어떤 사람들은요.”

에밀리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글을 못 읽어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에밀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에밀리는 냅킨 아래에 감춰뒀던 콩을 만지작거리다가 종래에는 터트려버리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나도 배우려고는 했어요!”

아니, 에밀리는 분명 신문에 글을 쓴다고 하지 않았나? 엘리자베스는 머릿속이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그럼 대체 글은 누가 쓰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나는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요. 내가 입으로 말을 하면 친구가 대신 써줘요.”

“배워볼 생각은 안 했어요?”

에밀리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금방 까먹구요. 맨날 보비들한테 쫓기면서 살았더니 시간도 없어요. 나도…… 배우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에밀리가 엘리자베스를 슬쩍 돌아 보더니 얼른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제 손에 닿아오는 거친 에밀리의 손바닥을 느끼며 어깨를 움찔했다. 몇 번 본 적이 없는 사람과 이런 친밀한 접촉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곧 엘리자베스는 제 손에 닿는 이 거칠한 감촉에서 케이 하커를 떠올렸다. 손의 피부가 독한 염료 때문에 다 벗겨졌다는 케이 하커.

“……창피해서요. 남들이 나를 무시할까 봐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케이의 스물한 살을 떠올렸다. 제게 무릎을 꿇고 청혼할 때 케이도 이런 얼굴이었다.

창피한 얼굴.

그때는 케이가 부끄러워하는 게 엘리자베스라고 생각했는데,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사랑하는 게, 그 사랑이 모욕적이라고 케이가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왜 사랑 받고자 하는 마음은 사람을 부끄럽게 할까? 그건 욕심이지만 나쁜 게 아닌데.

“……꼭 이거 비밀로 해줘요.”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엘리자베스가 어린 동생을 보는 기분으로 에밀리를 타일렀다. 에밀리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뜻밖의 제안을 했다.

“대신에 내가 주사를 맞을게요. 당신 대신에 말이에요. 나라면 당신과 접점도 별로 없고 나름 유명 인사니까 기자들이 좋아할 거예요. 어때요?”

엘리자베스의 눈이 커졌다. 지금 에밀리는 이 실험의 위험성을 알고 하는 말일까?

“에밀리, 이건 위험한 실험이에요.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직접 하려고 했어요? 왜요? 나는 죽으면 안 되고 댁은 되나 보죠?”

에밀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엘리자베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물었다. 내밀한 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죽음.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사라진 이후 그 말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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