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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75화 (27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75화

“뭐?”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케빈이 들고 있는 책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손을 뻗자 케빈이 더 뒤로 물러나면서 말을 더듬었다.

“아, 안 된다니까요! 나도 이 책이 지금 필요하다구요!”

“나도 필요해……!”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비열한 신사들이나 할 법한 짓을 하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는 피해 온 도서관 안을 도망다니며 말했다.

“내가 아까 교수님들 무리가 왔을 때 얼마나 이 책을 들고 도망다녔는데……!”

“그건 참 고맙게 생각해, 케빈 퍼킨. 덕분에 내가 이 책을 읽게 됐으니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쫓아 도서관을 휘젓고 돌아다니느라 숨이 차올랐다. 엘리자베스는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몰록이었을 때는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그간 엘리자베스가 한 일이라고는 앉아서 뭔가를 읽거나 환자를 보는 것뿐, 몸을 움직이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헉…… 허억…….”

엘리자베스는 목구멍이 금방 말라오는 것을 느끼며 복도에 섰다. 그러자 케빈은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곤 잠깐 멈춰서더니 역시나 거친 숨을 토해냈다.

“우웁……. 잠깐만요. 토할 것 같아요.”

“나도 그래! 그러니까 그냥 내놔!”

“아니, 이걸 왜요! 나 이거 꼭 봐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나도 있어!”

“뭔데요?”

케빈이 힘들어 하는 얼굴로 몸을 숙이고 엘리자베스를 쳐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말을 떠올렸다. 루이의 도움도, 케빈의 도움도 절대로 받을 수 없을 거라는 말 말이다. 루이의 말은 냉정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만약 엘리자베스가 루이나 케빈의 도움을 받는다면 교수들이 부른 기자들 앞에서 망신을 당할 때 루이나 케빈 역시 함께 끌어내려질 것이다.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피실험자를 당연히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제 몸에 약화된 균을 집어넣고 제 몸에 다시 균을 집어넣어 탄저병이 발병하는지 확인할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모든 것은 엘리자베스 혼자 감당해야 했다.

“아, 시끄럽고! 나 그거 지금 필요해! 빨리 줘!”

“아니, 요새 자꾸 그렇게 소리 지를 때 보면 엘 삼촌의 괴팍함에 케이 하커 씨의 건들거림까지 한꺼번에 들어 있는 거 같은 거 알아요?!”

“알아!”

엘리자베스가 얼른 케빈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케빈은 슬쩍 몸을 뒤로 빼며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어디서 훔쳐가려고. 이거 진짜 꼭 필요하단 말이에요.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말 안 해주려고 했는데…….”

케빈은 제 앞에서 헐떡거리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엘리자베스가 지친 얼굴로 케빈을 올려다보았다.

“뭔데?”

케빈은 입맛을 다시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엘리자베스가 참지 못하고 윽박지르자 케빈은 얼른 책 표지를 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케빈이 펴준 책 표지에는 엘리자베스에게도 익숙한 글씨체로 뭔가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레본어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더듬더듬 그것을 읽었다.

“……원자보다 작은…….”

“갸흐통어를 할 줄 알아요?”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자베스는 그 틈을 타 얼른 케빈에게서 책을 빼앗아들었다. 그러자 케빈이 끙, 하는 신음을 내며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그거 아무래도 엘 삼촌이 사라지기 직전에 쓴 거 같아요. 갸흐통어에 그 그림 같이 또박또박한 글씨체. 전부 엘 삼촌 냄새가 나잖아요. 그래서 내가 그거 안 뺏기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내가 하루 종일 열심히 사전 찾아가면서 해석을 했는데요. 그거 치료제와 관련되어 있는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을 들으며 열심히 표지에 쓰여 있는 갸흐통어를 읽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빈을 보았다.

“치료제?”

“그래요!”

케빈이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원자보다 작은 핵과 양성자로 방사능 물질을 분리한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에게서 책을 빼앗아 들고는 어색한 갸흐통어로 첫 번째 문장을 읽었다.

엘리자베스는 원자보다 작게 물질을 쪼갤 수 있다던 엘우드 밀의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작은 단위까지 물질을 쪼갤 수 있는 건가? 미래에는?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미래와 현재 사이의 까마득한 간극 때문에 불안해졌다. 그건 단순히 과학자로서 지금의 지식이 너무나 도태되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불안이 엘리자베스를 사로잡았다.

만약 치료제를 만들 때 그런 신기술이 필요하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전기적 자극을 줘야 한다.’, ‘선형분리기를 다음 설계도와 같이 만든다.’ ……그 다음은 설계도인데……. 마지막에 쓰인 이 로…… 로쉬? 로…… 슈니? 이 단어 말고는 나머지는 전부 해석을 했어요. 이건 고유 명사 같은 건지……. 어쨌든 해석한다고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케빈은 더듬거리며 두 번째 문장, 세 번째 문장을 읽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가리키는 아래쪽 그림을 보았다. 그 그림은 아주 자세한 설계도였다. 엘리자베스 같은 과학자들은 잘 볼 일이 없고 기계를 만지는 이들에게나 익숙할 것 같은 복잡한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지?”

“글쎄요. 그런데 먼 미래에는 과학자들이 기계를 다루게 될 날이 온다고 했어요. 옛날에 삼촌이 한 말이에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그럼 이걸 가지고 공장에 가보면 되겠네? 응?”

“안 그래도 지금 가려고 하는 중이에요! 몰래 가려고 했더니만……!”

케빈은 얼른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고는 제 품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케빈이 한숨을 내쉬며 엘리자베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엘 삼촌이 돌아오면 제대로 물어보는 게 좋겠지만, 엘 삼촌이 이걸로 라듐을 치료기기 안에 넣고 조사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꿀 수 있다고 써뒀고 엘 삼촌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 내가 해볼 수 있는 데까진 해볼 거예요. 그렇지만…… 성공한다는 장담은 없어요. 너무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그래요.”

케빈은 어린애라도 다루듯이 어르고 달래는 투로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알아. 난 바보가 아니라고!”

엘리자베스는 제 안에 있는 어두운 마음을 내쫓으려고 일부러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자꾸만 불안해져왔다. 만약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 자체가 아예 이 레본에는 존재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곳이 정말 엘우드 밀이 살던 미래로부터 아주 먼 곳이라서 아예 치료제를 만들 수조차 없으면……?

그럼 정말 이대로 케이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지는 게 아닐까?

그때 케빈이 엘리자베스의 코앞에 대고 삿대질을 하면서 말했다.

“어허이, 이거 봐요. 벌써부터 실망하는 거. 이래놓고 무슨 바보가 아니에요? 벌써 기대를 해버렸으니까 실망을 하는 거잖아요?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한 지 1분도 안 지났는데!”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손가락이 제 눈앞에서 어른거리자 그것을 탁 쳐냈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물고 케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난 바보야…….”

“에이,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인정하진 말아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잖아요!”

케빈은 조금 당황해선 얼른 덧붙였다.

왜 과학자들은 이렇게 위로에 서툴까? 엘리자베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케빈을 힐끔 보았다. 케빈은 제 눈가를 긁적이더니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툭 쳤다.

“난 제약공장에 가서 이 기계를 만들 수 있는지부터 물어볼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자베스는 이거나 읽어요.”

케빈은 품 안에서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유명한 화학 학술지 번호와 연도가 적혀져 있었다.

“종두법에 대한 자료가 필요한 거 아니에요? 내일 화학사 수업 때 필요한 거죠? 이것들을 보면 될 거예요. 교수들이 싹 쓸어간 자료보다 훨씬 최신 자료라서 도움이 많이 될 거구요. 근데 그 교수들, 설마 선량한 부교수의 수업 준비를 방해하려고 자료를 싹 쓸어간 거예요?”

케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내미는 쪽지를 받아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루이 교수님의 말대로 내가 신사들이 얼마나 비열한지 몰랐던 거지.”

엘리자베스는 착잡한 얼굴로 케빈을 보았다.

“지금 공장으로 갈 거야? 같이 가자.”

“어허이, 어딜. 교수들이 와서 또 책 쓸어가기 전에 얼른 그 학술지나 읽어요. 나 혼자 갔다올게요. 어차피 둘이 가나 하나가 가나 기계에 대해 무식하기는 마찬가지예요.”

케빈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몸을 억지로 돌려세우고 도서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준 쪽지와 함께 도서관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가서는 케빈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네?”

“네 말이 맞다고. 나 무척이나 기대하고 실망하고 있다고.”

케빈이 헛웃음을 지었다. 케빈은 씁쓸해 보였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꼭, 반드시, 나를 위해서 결과를 가져와. 알았지?”

엘리자베스가 눈을 빛내며 케빈을 보았다. 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돌아서서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케이가 사라진 지 2일이나 지났다는 게 마음에 확 와닿는 순간이었다.

케이가 보고 싶었다.

케이의 갈색 눈동자,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삐뚜름한 얼굴과 특유의 오만한 미소—

엘리자베스는 이틀이라는 시간을 새삼 인식하고 나자 그 익숙했던 것들이 어느새 아련한 꿈처럼 느껴졌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가지고,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가졌던 충만했던 시간은 겨우 이틀이란 시간 속에서 흐려져 갔다.

* * *

엘리자베스는 실험실로 올라가 닭 피부터 광학현미경으로 살펴보았다. 탄저균은 발견되지 않았다. 닭에게 충분한 항체가 형성되었다는 의미였다. 엘리자베스는 약간의 실마리를 발견한 기분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책을 든 채 도서관을 나왔다. 원래는 도서관에서 밤을 샐 생각이었지만 그러기엔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아예 학술원을 나온 후에는 마차를 탔다. 프란시스에겐 케이가 공장에서 잠을 잔다고 거짓말을 해둔 탓에 레트니 애비뉴에 들른 미리엄이나 셜리가 괜히 프란시스에게 사실을 말해버릴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마차가 레트니 애비뉴 2번지에 도착한 후 엘리자베스에게 문을 열어주던 토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련님은 잘 계시죠? 요샌 왜 이렇게 집에 안 들어오세요? 한동안은 아가씨가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니시더니…… 마님이 걱정이 많으세요.”

토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난감한 얼굴로 토비의 시선을 피했다.

“바쁘니까 그렇지. 요새 맨날 공장에서 쪽잠을 자는 것 같아. 이 책 좀 들어줄래, 토비? 오늘은 저택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프란시스랑 저녁을…….”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밝게 말하며 정문을 지나쳐 정원을 가로질러갔다. 그때였다. 엘리자베스는 저택 현관 근처에서 서 있는 두 여자의 실루엣을 보곤 멈춰 섰다.

한 사람은 프란시스였고 한 사람은…….

“에밀리!”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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