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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74화 (27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74화

“제정신이냐?”

켈리어스와 교수들이 나가기가 무섭게 루이가 엘리자베스를 몰아붙였다. 엘리자베스는 입을 꾹 다물고 서서 루이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내기를 하는 거지. 탄저균 종두법을 사람에게 실험해서 그 실험 결과로 그 사람에게 탄저균에 대항할 항체가 생긴다면 학술원에서도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의 능력을 인정해야 되지 않겠나. 내 명예를 걸고, 그리고 여기 모인 교수들의 명예를 걸고 자네가 교수가 될 수 있도록 힘써주지. 하지만—’

내기.

켈리어스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엘리자베스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많은 기자들을 불러 사람에게 탄저균 종두법을 실험하는 것을 알리자는 것이었다. 켈리어스가 말하는 기자들을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증인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네가 실패한다면 자네는 이 학술원에서 제 발로 걸어 나가야 해. 어때? 자네와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내기 말이야. 이 내기의 증인이 필요하지 않나? 혹시라도 자네나 우리 중 누군가가 이 내기의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켈리어스는 그렇게 말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의 내기가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자들을 부른 명목상의 이유는 엘리자베스나 교수들이 약속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엘리자베스를 망신주기 위함일 것이다.

학술원에 입학한 최초의 여자 과학자.

퀴닌의 개발자.

몰락한 귀족이자 조지의 측근.

엘리자베스는 학술원 내에서 젠체를 하며 레트니 정권에 붙어 기생하던 ‘신사’ 교수들에게는 눈에 가시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엘리자베스의 존재 자체가 학술원의 부조리를 자꾸만 드러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입학하고 나서야 학술원에 여자 기숙사가 없다는 사실이 계속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학술원에서는 왜 귀족이 아닌 자는 교수가 되기 어려운지, 정권과 친하지 않은 자는 논문 심사에서 왜 계속 탈락하는지 따위가 부각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들에게 일종의 상징물 같은 것이었다.

학술원이 변화의 물결에 잠식되어 가고 있다는 상징물.

그들은 그 상징물을 철거하고 싶어 했다. 그것도 자신들의 손을 더럽혀서가 아니라 대중과 언론의 힘을 빌어서 말이다.

켈리어스의 말을 들은 루이 교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켈리어스의 말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보다 엘리자베스의 대답이 빨랐다.

엘리자베스는 내기를 받아들였다.

“내기를 받아들여? 너 지금 저 내기가 단순히 네가 학술원에서 쫓겨나는 걸로 멈출 것 같으냐?”

엘리자베스는 눈을 내리 깔았다. 루이 교수는 초조한 얼굴로 연구실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엘리자베스의 앞에 멈춰 서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이제 공녀야. 그냥 공녀도 아니고 공작가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손이다. 작위를 물려받는 대도 이상하지 않아! 그런 네가 학술원의 웃음거리가 되어서 퇴출당한다? 거기에 피실험자의 목숨을 놓고 실험을 하는 비도덕적인 과학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고? 넌 대체 지금 이 상황의 심각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냐? 내가 그만하라고 했을 때 그만 했어야지! 넌 네 자존심이 그렇게 중요해?”

루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잔소리를 한참 듣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든 엘리자베스의 눈에는 차분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런 내기라도 하지 않으면 저한테 기회는 오지 않아요, 교수님.”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을 보는 순간, 그 눈에 깃든 체념을 읽은 순간 루이는 거친 숨을 몰아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가 말을 이었다.

“……자존심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비하면요.”

“너…….”

“제가 케빈의 이름을, 교수님의 도움을 빌려오지 않았더라면 제 이름으로 저온살균 공법이나 퀴닌 개발에 제 이름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제 단독으로요. 그럴 일은 없어요. 교수님도 아시잖아요……!”

엘리자베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루이는 시선을 돌렸다. 루이는 여전히 엘리자베스를 원망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학술원은 너에게 많은 기회를 줬다. 넌 부교수고, 이보다 나은 방식으로 탄저균에 맞는 종두법을 개발할 수 있어. 너무 성급했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연구실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약학, 의학, 화학 책들을 바라보았다. 책의 저자 이름은 제목 아래에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반짝거리는 저 수많은 이름 중에 여자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지금 자신이 성급하게 굴지 않으면 절대로 저 중에 여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제가 레트니에게 이용가치가 있었을 때 주어졌던 그 기회 말인가요? 정말 저를 학술원에 들여놓으면서 이게 학술원이 저에게 준 기회라고 생각하셨어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교수님. 전……. 전 한 때는 그게 저한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한 적도…… 있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처음 이 학술원에 들어와 공부를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매일 같이 마녀라는 소리를 듣고 테러에 가까운 행위를 겪어도 어쨌거나 이 학술원의 소속이 되었다는 감정에 도취되어 있었던 그때 말이다.

처음 학회에서 발표를 해보고 논문을 쓰는 법을 배웠으며 아버지의 서재에서 훔쳐보기만 했던 책들을 정당하게 읽었던 그때.

그때는 이 세상이 엘리자베스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엘리자베스가 잘 해내면 앞으로 더 많은 여자 과학자들이 학술원에 생겨날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교수님. 아시잖아요. 학술원은 저한테 기회를 준 게 아니에요. 저를 이곳에 입학하게 해준 것도, 부교수로 임용해준 것도, 전부 다른 여자들, 다른 평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죠. 우리는 이런 여자도 받아들인다. 그러니 우리를 욕하지 말아라. 네, 맞아요. 학술원도 변하겠죠. 언젠가는 말이에요. 하지만 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학술원이 저를 받아들인 건 그런 의미예요. 우린 이런 여자도 받아들였으니 더 이상 비판을 받지 않을 거다. 그러니 우리의 노력은 여기에서 끝이다. 우린 변화할 생각이 없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등 뒤에서 킬킬거리며 웃던 신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 신사들.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엘리자베스가, 에밀리가, 앰버 모건이, 결국에 그저 같은 여자일 뿐인 것처럼.

어떤 사회는 개별적인 인간들을 분리하고 분리된 인간들에게 이름을 붙인다. 그 이름 하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단순하게 불리게 된다.

신사, 평민, 노동자, 여자, 마녀…….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던 루이가 굳어진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루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미간에 골을 깊게 패고 말했다.

“……난 널 도와줄 수 없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피실험자를 선정하는 것부터 기자들 앞에 서는 것까지—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넌 혼자야. 내 도움도, 케빈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다. 이 내기에 응하기로 한 건 네 실수고 책임도 네가 질 거야. 만약 네가 실패하면 그건 학술원의 실패, 조지 국왕의 실패, 내 실패가 아니라 오로지 네 실패로 받아들여질 거다.”

엘리자베스는 루이의 냉혹한 말에 실망하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도움을 받을 생각 같은 건 애초에 하지 않았다. 막아서지 않는 것만으로도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연구실이나 실험실을 사용하는 건…….”

루이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건 전부 네 연구용으로 쓰는 거지! 내 허락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지 않나!”

루이는 버럭 소리를 지르곤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움직여! 방금 말했듯이 넌 혼자야! 방금 나간 교수들이 종두법에 관련된 책들을 싹 쓸어가기 전에 도서관부터 뛰어가!”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루이가 코웃음을 쳤다.

“넌 신사 놈들이 얼마나 비열한 자들인지 몰라. 그러니 이딴 내기를 걸겠다고 한 거지. 충고 하나 할까? 피실험자를 공개적으로 구인하는 건 절대 하지 말아라. 그자가 어디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의 비관적인 말을 믿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정말로 종두법에 관련된 책이 전부 사라진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런…… 미친…… 사람들…….”

엘리자베스는 몇 분후 사서 선생 앞에서 이마를 싸매고 벽에 기대어 섰다. 사서는 엘리자베스의 욕지거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세상에. 여자가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죠.”

엘리자베스는 교수들이 빌려간 책 목록을 살펴보며 사서에게 쏘아붙였다.

“댁 입이나 간수 잘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제 입에서 요즘 튀어나오는 말들이 전부 엘우드 밀의 말투를 닮았음을 알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엘우드 밀의 말투를 쓰는 게 기분 나빴지만 이젠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멍청한 사람들과의 침착하고 논리적인 대화는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봐…….”

“잠깐. 이 논문들은 아무도 빌려간 사람이 없네요?”

엘리자베스는 서둘러서 자신이 찾던 논문 제목을 사서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서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요. 그건 전부 저쪽에서 보고 있어요. 오늘은 학술지를 저쪽에서 전부 선점해가서 나도 아주 곤란해요! 엘우드 선생이 말도 없이 결근하기 시작한 이후로 우리 학술지 책장이 잘 정리되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 학생이…….”

엘리자베스는 사서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러자 거기엔 엘우드 밀처럼 책 안에 빨려들어 갈 듯 구부정한 자세로 책에 집중하고 있는 케빈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케빈에게로 걸어갔다.

케빈의 책상 위에는 온갖 학술지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 인사도 하기 전에 서둘러 케빈의 책상 위의 책들을 뒤집어엎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가 가까이 걸어오기 전까지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다가 갑자기 제 책상이 뒤집어지자 화들짝 놀라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즈?”

“인사는 나중에 해. 너 종두법에 관련된 책 읽고 있었니?”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묻자 케빈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네. 읽고 있었는데요……?”

케빈은 어쩐지 제가 읽고 있던 책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빈의 모습을 의심스럽게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부터 읽게 줘!”

엘리자베스가 윽박지르자 케빈이 책을 감싸 안고 고개를 저었다.

“시, 싫어요!”

“……?”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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