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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73화 (27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73화

푸드덕! 푸드덕!

브레드는 닭장에서 탈출한 닭이 창고 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막느라 계속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느 순간 닭은 풀쩍 날아 높은 옷장 위까지 올라갔는데, 브레드는 울상이 되어서 대걸레를 집어들었다.

닭의 통통한 몸이 이 대걸레에 닿는 상상만 해도 괴로운 지경이었다. 브레드는 닭이 혹시라도 제 머리 위로 날아오를까 두려운 얼굴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에서는 닭장에서 꺼낸 닭에게서 피를 뽑아간 엘리자베스가 마부를 독촉해 마차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브레드는 슬픈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많이 안 혼났다…….”

* * *

엘리자베스는 학술원까지 가는 마차 안에서 유리병 안에 든 닭의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안에서……. 탄저균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엘리자베스는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약화된 균을 접종시키면 몸은 더 강한 균을 맞이해도 견딜 수 있다.

독이 약이 된다. 엘리자베스는 종두법을 배우면서 엘 선생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엘 선생은 그 말이 나중에는 무척이나 중요해진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엘리자베스에게 독도 약하게 쓰면 약이 된다는 걸 꼭 기억하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말이 몰록의 치료제를 놓고 한 말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엘우드 밀은 기억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지만 사실 몰록의 피에 감염된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몰록을 죽이는 독이었다. 그러니 그것도 독이 약이 되는 경우였다.

엘리자베스는 치료제를 생각하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차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도개교 건너편 에렌델 스트리트 초입에 놓인 꽃다발들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마부석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물었다.

“저게 뭐야, 토비?”

토비가 대답했다.

“아, 저 꽃이요? 이제야 보셨어요? 어제부터 있었는데.”

토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피곤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간 학술원과 왕립병원만 계속 오가며 병사들의 치료에만 집중했다. 오늘 낮에 처음으로 앰버를 보러 솔치노로 갔었는데 그때는 마차에서 곯아떨어져서 에렌델에 있는 꽃 같은 건 보지 못했다.

“저거 귀족 타운하우스가 모여 있는 거리마다 있어요. 이번에 귀족들이 평민 하녀를 죽이는 일이 일어났잖아요. 그래서 추모와 항의의 표시로 귀족들이 사는 곳마다 꽃을 가져다 놓는 거래요. 평민들이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들으며 달리는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렌델 스트리트처럼 귀족들의 옷을 파는 거리는 물론이고 컬로든 궁 근처, 레트니 애비뉴에 꽃이 늘어선 것이 보였다. 보비들과 군인들은 거리마다 서서는 그 꽃을 보고 곤란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폭탄도 아니고 꽃이라니.

길거리에 늘어선 수많은 꽃을 수거한 군인들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꽃을 든 군인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토비가 말했다.

“가끔 귀족들의 타운하우스에서도 꽃을 가져다 놓는대요. 그 집 하녀가 한 걸지도 모르지만……. 주인마님이나 아가씨가 했을지도 모르죠. 전 어젯밤 레트니 애비뉴 5번지에서 커다란 작약을 가져다 놓는 걸 봤어요. 그 집에 사는 자작 부인의 손녀딸이 가져다놓았어요,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한동안 품고 다니던 에밀리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신문을 집어 들었다. 아무도 이 신문을 사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지고 다녔는데,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신문을 읽었을지도 몰랐다.

자극적인 기사들로 살인자들의 악마적인 본성만을 부각해 페니를 뜯어내려드는 타블로이드지들 사이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들이 힘 없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하는 이 상황에 맞서야 한다는 이 신문 기사를 읽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꽃들을 바라보았다.

거리에 놓인 꽃은 그저 조의를 표하기 위한 하얀 꽃만 있지 않았다. 장미도 있었고 릴리도 있었으며 양귀비, 해바라기…….

알록달록 색색의 꽃들을 바라보며 엘리자베스는 저 꽃을 갖다놓은 사람들도 다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는 피해자들처럼 평민 하녀일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제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일 수도 있었고, 누군가는 귀족의 고명딸일 수도, 누군가는 마부일 수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토비에게 물었다.

“너도 꽃을 가져다 놓았니?”

토비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대답했다.

“네, 아가씨. 장미꽃을요.”

엘리자베스는 토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토비에게 잠시 멈춰달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마차 문을 열고 나가 거리에서 행상을 하는 꽃장수에게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꽃장수에게 바이올렛 한 다발을 샀다.

꽃장수는 요새 장사가 잘된다며 싱글벙글하며 두 다발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꽃장수에게 동전을 내밀고 꽃을 줍는 보비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바이올렛을 슬쩍 내려놓았다. 그와 함께 품고 다니던 신문들도 내려놓았다.

그러자 보비들이 불쾌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길거리에 꽃을 두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는 듯 짜증스럽게 다리만 떨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바이올렛과 함께 놓인 다양한 꽃들을 바라보다 건너편에서 아들과 함께 꽃을 놓고 가는 노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이 꽃밭 속에서 생각했다.

이 세상은 반드시 변할 거라고.

* * *

“탄저병을 치료한다고……?”

엘리자베스는 학술원에 도착하자마자 루이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았다. 그런데 하필 교수님의 연구실에는 약학회 소속의 다른 교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조셉에게 우호적이던 켈리어스 교수도 있었다.

켈리어스 교수는 엘리자베스가 탄저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말하자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탄저병은 치료제가 없어. 게다가 지금 닭에게 한 실험을 사람에게 적용하자는 건가?”

켈리어스는 코웃음을 치며 오만한 얼굴로 루이에게 말했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루이! 평민 남부 꼬맹이며 여자며 별별 놈들을 다 받아주다 보면 학술원이 엉망이 되어버릴 거라고 했지 않나! 자, 어떤가. 이제 왕립학술원도 심령과학회 따위와 다를 바 없어졌다네! 아닌가? 엉덩이나 가슴이 커지는 약을 만드는 부인약학회 쪽인가?”

켈리어스의 말에 주변 교수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상대의 신분을 가지고 상대의 논리를 파악하는 이 편협한 자들이 교수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님만큼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기대로 루이 교수님을 보고 말했다.

“치료제가 아니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독을 약하게 접종해서 그 독에 대항할 수 있게 만드는 거죠. 이미 이오페아에서도 널리 쓰고 있는 방법이잖아요. 종두법이요.”

“아하, 그런 식의 논리라면 저 초원 위에서 하얀 말을 한 마리 발견하면 이 세상 모든 말이 하얗다고 우길 수 있겠군,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이봐, 아가씨. 그런 걸 내 수업에서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가 콧소리를 내어가며 경멸조로 말하는 것을 참다못해 켈리어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는 아가씨가 아니고 이 학술원의 부교수예요. 저도 제 수업에서 하얀 말과 관련된 용례를 가르칩니다! 배우는 게 아니라요. 그리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지금 제가 아니라 켈리어스 교수님께서 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엘리자베스가 켈리어스를 똑바로 보고 따지자 주변의 남자들이 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켈리어스는 얼굴이 달아올라서는 당장이라도 엘리자베스에게 윽박을 지를 준비를 하고 엘리자베스에게 삿대질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간에 루이가 입을 열었다.

“엘리자베스.”

“네, 교수님.”

엘리자베스는 눈을 빛내며 루이를 보았다.

‘루이 교수님이라면 분명히……’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의 차가운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 말은 그래서 당장 이틀 후에 있을 전투에 대비해서 인체에 접종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임상 실험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지금 엘린크에서는 하루에 1~2명씩 꼭 환자가 나오고 있어요. 아무래도 성 안에서 기르는 모든 가축을 거래 금지시켰다고는 하지만 성 안 모든 거래를 일일이 단속할 수는 없죠.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에도 탄저병은 반드시 영향이 있어요. 탄저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면 리오든의 승리에도…….”

그때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뒤에서 중얼거렸다.

“리오든의 승리라니.”

엘리자베스는 휙 뒤로 돌았다. 그러자 비슷비슷하게 배가 나오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 학자들이 다 딴청을 피웠다. 방금 그 말……

마치 리오든이 승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섬뜩한 기분이 엘리자베스를 덮쳤다.

리오든이 분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엘리자베스가 너무 낙관한 것일까? 학술원에 있는 누군가는 사실 레트니가 돌아오길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니.

엘리자베스는 좌절감을 느끼며, 방금 대체 그것을 누가 말한 것인지 궁금해져 계속 남자 학자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엘리자베스를 비웃는 표정을 유지할 뿐 다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제 안에 피어난 곰팡이 같은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길거리에 잔뜩 뿌려져 있던 꽃들—

어디선가 엘리자베스가 살아갈 리오든을 위해 싸우고 있는 케이 하커—

엘린크 성의 병사들—

엘리자베스는 겨우 이 작은 비웃음 하나를 확대 해석해서 그간 수집한 모든 증거들을, 이 세상이 반드시 변할 거라는 증거들을, 가져다버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 그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루이 교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임상 실험을 하게 해주세요.”

루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희망에 찬 얼굴로 루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이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의외였다.

“안 돼.”

“네?”

엘리자베스가 당황해서 뒤집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뒤에서 켈리어스가 키득거리는 게 들렸다. 루이가 말했다.

“안 된다고. 사람을 가지고 실험한다고? 절대 안 돼. 이건 퀴닌 같은 거랑은 다른 걸세. 이건 균을 사람 몸에 주입하는 거야.”

“교수님……!”

엘리자베스가 항변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엘리자베스는 루이 교수의 고집스러운 눈매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못 미더워서 이러시는 건가요?”

루이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방금 말했지 않나. 너무 위험하다고. 미리엄은 아픈 환자였어. 그러니 목숨을 걸어서라도 치료제를 실험해보고 싶다고 자원했지. 하지만 이건 건강한 사람에게 균을 접종해야 돼. 만약에 환자가 잘못 되면…….”

루이의 말을 끊고 뒤에서 켈리어스 교수가 갑자기 말했다.

“아니지. 아니야. 생각보다 가치가 있는 일일지도 모르지 않나.”

엘리자베스는 켈리어스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켈리어스가 꿍꿍이가 있는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말이야?”

‘왜 갑자기 내 편을 드는 거지?’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표정의 루이와 음흉한 미소를 짓는 켈리어스를 번갈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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