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72화
이틀 동안 케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요즘은 켄터베리 홀과 모건의 외교관저를 왔다 갔다 하며 지내고 있는 앰버에게 도움을 청했다. 앰버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는데 그녀는 케이가 사라졌고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는 말만 듣고도 엘리자베스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에게 물었다.
“왜 더 묻지 않죠?”
“물어야 하나요? 사람에겐 누구나 비밀이 있는 법이에요.”
앰버는 기다란 담뱃대를 들고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어두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케이가 당신을 두고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난 별로 걱정 안 해요.”
앰버는 부드럽게 웃었다.
케이가 나를 두고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
대책 없는 낙관론에 불과했는데도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곰팡이처럼 제 온몸에 희망을 퍼트리고 다니는 것을 느꼈다.
케이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케빈 퍼킨은 이틀 만에 풀려났다. 오늘 오전이었다. 케빈도 케빈이지만 자칫 그 젊은 귀족이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풀려날 뻔했지만, 에밀리가 준 책을 엘리자베스가 다니엘에게 제공한 덕에 케빈도 풀려나고 그 귀족도 잡혀들어갈 수 있었다.
그 책을 통해 리오든의 젊은 귀족들끼리 내통하여 살인을 사주하고 살인을 벌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젊은 귀족들은 서로가 의심받지 않도록 자신의 집에 있는 하녀를 죽이는 데에 서로 도움을 주었다. 일종의 살인 계인 셈이었다.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다면 쉽게 체포되지 않았겠지만 그들 대부분이 아직 작위를 받지 못한 젊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줄줄이 연행되어 궁 앞에서 기자들에게 사진이 찍혔다.
신문에서는 연일 그 어린 귀족 남자들이 얼마나 불행한 어린 시절을 살았고 어린 시절 얼마나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미치광이였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살인 모임이 리오든에 팽배한 평민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차별적인 시선이라는 배경 하에 생겨났음을 보여주는 기사는 타블로이드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작은 석간신문에 에밀리가 인터뷰를 한 기사가 실렸는데, 거기에서 에밀리는 이번 살인이 당연히 자신의 권리였어야 할 특권을 빼앗기는 것을 견디지 못한 어린 귀족들의 소행이라며, 그들은 평민이나 여성들이 빼앗긴 권리를 찾는 것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여기고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내놓았다. 그 신문은 자극적인 기사들을 싣는 다른 신문들에 비해 큰 판매부수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신문을 몇 부 사서 가지고 다녔다.
케빈은 장기복역수처럼 수염이 송송 난 얼굴로 풀려났는데 엘리자베스는 이 어린 소년에게도 수염이 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어 괴로웠다.
오전에 케빈을 데리러 갔던 엘리자베스는 막 출소한 케빈에게 베이크드빈스를 내밀었다. 케빈은 통에 코를 처박고 그것을 흡입하다가 배가 차자 트림을 하고 공원 벤치에 앉아 이렇게 말했었다.
‘케이는 리오든에 괴물이 설치게 놔둘 수 없다고 했어요. 엘리즈도 리오든에 살고 있으니까, 이 리오든을 엉망으로 만드는 건 참을 수 없다고요. 결국 엘리즈는 케이를 위해 리오든을 지키고, 케이는 엘리즈를 위해 리오든을 지키고 그러고 있는 거죠. 뭐.’
엘리자베스는 담배를 뻑뻑 피우는 앰버 앞에서 케빈의 그 말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위해 리오든을 지키고,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위해 리오든을 지킨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을 하느라 골몰하고 있었던 탓에 앰버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앰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참정권 운동에 뛰어든 거예요. 그러니까 적어도 조지가 승리하는 걸 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돌아오겠죠. 게다가 아직도 나랑 케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줄로 생각하는 작자들이 있다니까요. 돌아와서 해명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나한테는 청혼도 하지 않았다고, 난 완벽하게 혼자니까 누구든 내 옆에 와도 좋다고 말해줘야죠.”
앰버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뒤에서 서성거리던 에드워드가 얼굴을 붉혔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에드워드의 반응을 보며 살짝 웃고야 말았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에드워드가 티가 나게 귀를 쫑긋했다.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의 마음을 확실히 눈치챘다. 앰버는 다리를 살짝 꼬고 눈을 또르르 굴렸다.
“적어도 박람회 전까지는 없었죠. 나한테 사랑은 늘…… 사치스러운 것이었거든요.”
앰버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녀는 한참동안 엘리자베스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며 뭔가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지금 이 공간, 이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닌 머나먼 시공간 속에 있는 어떤 것을.
앰버는 그것을 하염없이 응시하다가 담뱃대를 탁탁 털어냈다. 앰버는 금방 그 허무하고도 슬픈 표정을 감추고 다시 엘리자베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한테 동전이 좀 남을 것 같으니까요. 나도 이제는 사랑 같은 것도 사볼 수 있겠죠. 글쎄요. 그냥 생각만 해보는 거예요, 생각만.”
앰버의 애매모호한 말에 뒤에서 듣고 있던 에드워드의 기대감에 찼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앰버는 담뱃재로 가득 찬 재떨이를 들고 에드워드에게 내밀었다. 에드워드는 살짝 놀란 얼굴로 재떨이를 받아들었다.
“좀 비워줄래요?”
앰버의 말에 에드워드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그러자 앰버가 엘리자베스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수줍어하는 청년은 언제나 살 가치가 있죠.”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앰버의 입술이 매혹적으로 찢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여우같은 미소에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앰버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앰버는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곧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슬쩍 닦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로 난 케이가 꼭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케이가 없으면 돈줄이 없어지는 거니까 윌슨이 이끄는 노동자 협회도 중심을 잃을 거고, 조지도 노동자 협회와 노동조합을 맘대로 휘두르려고 들 테죠…….”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케이의 막대한 돈과 상징적인 위치가 그간 노동자 협회와 새로 건립될 노조, 그리고 조지 국왕과의 사이를 조율해온 것이다.
“물론 그걸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두고 보진 않겠지만.”
“저, 저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의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엘리자베스요. 프란시스가 말하지 않던가요? 케이가 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신탁과 무역회사 지분, 재산, 공장 소유권의 대부분을 자신의 사후 엘리자베스에게 돌아가도록 만들었다는 것? 물론 프란시스와 나, 그리고 에드워드에게는 멜니아에서 지낼 수 있는 신탁 계좌를 하나 만들어줬고요.”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요?”
앰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온 더 락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세상에, 정말 몰랐나 보네요. 당신은 이제부터 이 리오든에서 제일가는 부자 공녀님이에요. 심지어는 조지마저도 절대로 당신을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죠.”
엘리자베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케이가 벌인 짓을 깨닫고 욕지거리를 했다.
“이 개 같은 자식…….”
앰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참으로 개 같은 자식이에요.”
앰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치 죽을 날을 받아두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에요…… 공교롭네요…….”
앰버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케이는 정말로 죽을 날을 받아두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입술을 앞니로 세게 물었다. 입술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전투는 벌써 이틀 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 * *
엘리자베스는 복잡스러운 심정으로 왕립병원으로 돌아와 당연하게 창고로 향했다. 창고 문을 열자 닭이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정겹게 엘리자베스를 맞이했다.
닭장 안의 닭들을 확인한 엘리자베스는 당황해서 브레드를 불렀다. 브레드는 쌩쌩한 닭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살균이 완전히 잘못된 거 아니에요? 어제도 분명히 주사했잖아요.”
“그, 그랬죠?”
브레드의 자신 없는 말에 엘리자베스가 결국 브레드의 멱살을 쥐었다.
“어제도 살균에 실수한 거예요?!”
“아, 아닙니다, 진짜 아니에요, 선생님. 억울해요. 사실 어제는 아예…….”
“아예?”
엘리자베스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브레드를 보았다. 브레드는 엘리자베스의 부담스러운 시선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딴청을 부리며 말했다.
“아예 살균을 하지 않았어요. 또 혼날까 봐요!”
브레드의 대답에 엘리자베스는 뒷골이 서늘하게 당겨오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뒤에서 계속 변명을 지껄이는 브레드에게서 시선을 돌려 닭들을 바라보다가, 닭 한 마리에게 손을 뻗어 닭의 다리를 잡았다. 선명한 주사 자국이 보였다. 주사 자국을 기준으로 어디에도 검은 점이 보이지 않았고 닭의 상태도 멀쩡했다. 낮에 주고 간 모이도 다 소화시킨 것 같았다.
대체 왜? 어떻게 이 닭은 탄저병에 걸리지 않았단 말인가?
분명히 탄저병은 동물, 식물에게 전부 발견되는 병이다. 닭만 피해간다고 하기에는 닭도 탄저병으로 인해 폐사한 사례가 분명히 있었다.
이 닭이 무슨 신의 축복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그럼 탄저병으로 죽은 조엘이나 병사들은 신의 저주를 받았고?
엘리자베스는 심령과학회 같은 논리에 빠져드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생각은 자꾸만 비논리적인 곳으로 빠져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닭장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을 그만두고 일어났다. 그리고 창고 안을 계속해서 서성거렸다. 브레드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브레드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에 이 실험에서 통제하지 못한 변인들을 떠올려보았다. 살균. 주사 횟수. 주사량. 뭐가 문제였을까?
1차 주사 때는 살균이 과하게 된 균을 투여했고 2차 주사 때는 같은 균을 두 배로 투여했다. 3차 주사 때는 아예 조금도 살균을 하지 않은 탄저균을 그대로 주사했다. 조금씩 주사된 균의 양이 많아진 셈이다.
이게 모두 저 망할 브레드, 저 망할 의사 선생이라는 변인을 통제하지 못한 탓이다. 엘리자베스가 브레드를 노려보며 걸음을 멈췄다.
잠깐.
“저, 저, 정말…… 자, 잘못했습니다…… 흐흑……. 용서해주세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브레드가 무릎을 꿇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자베스가 그런 브레드에게로 걸어갔다.
“브, 브레드 선생.”
“제발 자비를…… 흐흑…….”
“브레드 선생!”
“용서를…….”
“이봐요! 일어나, 브레드!”
엘리자베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리자베스의 눈이 희번득하게 빛났다. 브레드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 어떤 단어 하나가 돌아다녔다.
종두법.
그건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천연두를 일부러 약하게 인체에 주입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