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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71화 (27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71화

엘리자베스가 에밀리의 말에 어두운 표정을 짓자 에밀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공장에선 대부분 숙식을 제공해주니까요. 게다가 리오든 땅의 모든 여자들이 나를 만나면 하루 이틀은 반드시 재워줘요. 참정권을 가진 놈들은 모르죠. 이 세상 모든 권리가 한 쪽에 몰려 있어도 우리가 모조리 죽지 않는 한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는 걸요. 싸움은 평생 이어질 거예요.”

에밀리는 거센 남부 사투리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가 씨익 웃을 때 드러나는 덧니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젠가 잘 곳이 필요하면 레트니 애비뉴 2번지로 와요. 거기에서도 한 번은 재워줄 테니까요.”

레트니 애비뉴 2번지라는 말에 에밀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거긴 앰버 플래스가 사는 곳 아닌가요? 내가 알기로 그 여자가 거기서 자기 약혼자랑 파티도 벌였는데요?”

에밀리는 앰버 플래스라는 말을 하면서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앰버 플래스는 남자 노동자들에게도, 여자 노동자들에게도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 듯싶었다.

그녀는 여자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었고 남자들에게는 욕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게 비단 앰버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여겼다.

이 레본에서 여자들은 언제나, 지난 며칠간 죽은 하녀들처럼 경멸당하거나 상심한 엘리자베스에게 어느 신사가 위로랍시고 건넸던 꽃과 같은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앰버 플래스가 겪는 일은 에밀리가, 엘리자베스가, 이 레본의 모든 여자들이 겪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약혼자가 바로 케이 하커죠.”

엘리자베스가 착잡하게 말하자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네요! 그 사람…….”

“이봐요! 언제 끝나는 거예요!”

경사가 소리를 질렀다.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1분이요, 1분!”

엘리자베스의 대답에도 경사는 성에 차지 않은 얼굴로 옆에 남자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그쪽을 힐끔 보고 에밀리에게 말했다.

“앰버 플래스가 사는 곳이라 오기 싫다면 강요하진 않겠지만 지금은 그곳에 저와 프란시스 하커 부인이 살고 있어요. 앰버도 어쩌면 들를 수 있겠죠. 당신이 생각할 때 어떤 여자들은 당신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권리조차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지 않아도 돼요.”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보비와 군인들에게 소리쳤다.

“끝났어요! 이리로 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군인들과 보비들이 다시 이쪽으로 걸어왔다. 에밀리는 철창을 붙잡고 엘리자베스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제가 부탁한 거, 꼭 전달해줘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밀리는 조금 가뿐하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를 보며 말했다.

“부탁은 들어줄 테니 당신도 오늘은 다른 곳에서 자는 게 좋겠어요. 어때요?”

에밀리는 입맛을 다셨다. 군인들이 두 사람의 앞에 오자 엘리자베스가 에밀리를 추궁하듯 빤히 보았다. 에밀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군인들을 향해 말했다.

“이봐, 아저씨들. 날 사우스 리오든으로 데려다줘. 거기에 있는 친구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설마 당신들이 거기까지 데려다는 주겠지. 당신들의 골칫거리가 해결되는 거잖아!”

에밀리의 거침없는 말에 군인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일로?”

“웬일이라니! 나도 언제까지고 이 궁 앞에서 잘 수는 없지. 하지만 내일 또 올 거니까, 내일 또 보자고, 아저씨들.”

군인들은 에밀리의 말에 얼굴이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군인들은 ‘내일 안 와도 된다’며 툴툴거리면서도 에밀리가 마음을 바꿀까 봐 서둘러 길을 나섰다.

에밀리는 군인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엘리자베스를 슬쩍 보았다.

마치 내가 약속을 지켰으니 당신도 지키라는 투였다.

엘리자베스는 보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경사에게 말했다.

“다니엘 빌리스를 다시 불러줘요. 내가 꼭 전해야 할 게 있다고 해요.”

“뭐라구요?”

경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니엘을 다시 깨워 잔소리를 듣는 게 죽기보다 싫은 얼굴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경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다니엘을 불러주지 않으면 방금 내가 이 궁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위험 인사 에밀리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네 사람이 전부 나를 보호하지 않고 저쪽에 가 있었다고 이를 거예요. 어때요?”

엘리자베스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아직 정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에밀리와 군인들이 그 말을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입을 떡 벌렸다. 에밀리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키득거렸다.

“대단한 아가씨네!”

에밀리가 외치며 휘파람을 불자 군인들이 에밀리를 노려보았다. 에밀리는 곧 군인들에게 끌려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경사를 노려보았다. 경사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건 당신이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방금 전까지는 에밀리한테 날 아가씨라고 부르라면서요, 경사.”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삐뚤빼뚤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삐뚜름한 자세를 취한 것을 깨닫고 잠시 놀랐다.

이런 협박, 공갈, 사기는 케이 하커의 방식이었는데.

이 개자식.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변해버렸어.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만나면 반드시 따져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머니 속에 넣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따지기 위해서라도 케이는 반드시 살아 있어야 했다. 반드시.

* * *

엘리자베스가 왕립병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탔을 때는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마차에서 기절하듯 잠을 자다가 토비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토비는 엘리자베스에게 마차 문을 열어주면서 역시나 잠을 못 자 충혈 된 눈으로 말했다.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가씨.”

“아니야, 토비. 병원에도 휴게 공간이 있으니까 거기서 자도록 해. 브레드 선생한테 말해둘 테니까…….”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힐끗 정문을 보았을 때였다. 브레드가 정문 근처에서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곤란한 표정으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브레드를 보고 피곤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브레드 선생! 뭐하고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반갑게 부르자 브레드는 지옥에서 온 악마라도 본 얼굴로 화들짝 놀라서는 쭈뼛거렸다. 엘리자베스는 브레드나 다른 간호사들이 저렇게 불안한 얼굴을 할 때마다 제가 더 불안해졌다.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

엘리자베스는 전쟁이 끝나면 이 왕립병원의 모든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갈아 엎어버리리라 결심을 하다가도 이런 결심이 너무 엘우드 밀의 폭력적인 성향과 닮은 것 같아서 기분이 불쾌해졌다.

‘넌 그렇게 멍청한데 공부까지 안 하는 이유가 뭐냐? 엉?!’

엘리자베스는 남부를 떠돌 때 엘우드 밀에게 끊임없이 들었던 잔소리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로 엘우드 밀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엘리자베스는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브레드에게로 걸어갔다.

“브레드 선생! 왜 나와 있어요? 토비가 잘 곳이 없어서 그런데 혹시 휴게 공간에 자리를 하나…….”

브레드는 엘리자베스가 제 쪽으로 걸어오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엘리자베스는 대체 무슨 일이냐며 다그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미소를 유지했다. 브레드가 말했다.

“휴게 공간에요? 아, 물론이죠. 체이스 선생한테 말하면 바로 내줄 겁니다. 1층 접수처로 가봐요.”

브레드가 손가락으로 1층 접수처가 있는 곳을 가리키자 피곤했던 토비가 얼른 그쪽으로 걸어갔다. 토비가 엘리자베스와 브레드에게 고개를 꾸벅하고 사라지자 엘리자베스가 브레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여기에 나와 있는 거예요?”

“네? 어…… 그냥…… 산책하려고…….”

“거짓말!”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브레드는 금방 울상이 되어서는 입을 꼬물거리며 울먹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시시각각 바뀌는 브레드의 표정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보다는 분노가 치밀었다.

“또 무슨 사고를 쳤어요! 빨리 말해요!”

“사, 사, 사, 사고를 친 게 아니고요…….”

브레드는 말까지 더듬었다. 엘리자베스는 브레드가 사고를 친 게 틀림없다고 여기며 브레드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냥 빨리 말해요. 괜히 뜸 들였다가 혼만 더 나는 거예요. 알고 있잖아요?”

벽에 딱 붙어선 브레드는 고양이에게 쫓기다가 도망갈 곳이 없어진 쥐처럼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아드득 갈았다.

“그, 그, 그, 타, 타, 탄저균이요…….”

“아, 닭에게 주사한 탄저균이요? 어때요? 닭들에게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나요?”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브레드가 곤란한 얼굴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브레드의 기색이 이상해서 브레드가 고개를 돌리는 쪽의 벽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

그러자 브레드가 시선을 다시 엘리자베스에게로 돌렸다.

“뭐예요?”

브레드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고 체념한 투로 말했다.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새벽에 부탁을 하고 왔으니 그 정도 용량이면 닭에게 반응이 나타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어제 깜빡했어요? 어쩔 수 없죠…… 그냥 지금이라도 가서…….”

“그게 아닌데요?”

“네?”

“그게 아니고……. 제가 살균을 생각보다 좀 많이 했더니……. 아무래도 균이 미약했나 봐요. 그래서 안 그래도 아까 용량의 두 배를 더 넣었어요.”

엘리자베스는 브레드의 말에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무슨 스프가 망했다고 스프에 잡초를 뽑아다 넣는 격인가!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탓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브레드으으으으!”

“으아아아악!”

브레드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얼른 실험실로 개조한 창고로 향했다.

엘리자베스가 도착했을 때 창고는 닭들에게서 나오는 털 때문에 온통 엉망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목과 코, 입이 텁텁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안경을 썼다. 안경이 없으면 눈에도 털이 들어가 간질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푸드덕거리는 닭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닭들의 피부는 깨끗하고 상태도 양호했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뒤따라오는 브레드를 노려보았다.

“언제 주사했어요?”

“네? 그건 어제 밤…… 이랑……. 오늘 30분 전쯤요?”

엘리자베스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약통 두 개를 발견하고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이걸 전부 주사한 거예요?”

“아무래도 살균을 잘못했으니까 많이 넣어야 할 것 같아서…….”

브레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웃지 마요……. 정말 가만히 안 두고 싶어지니까.”

“……넵.”

브레드가 시무룩하게 대답하곤 벽으로 슬그머니 붙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사라지고 싶은 얼굴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건강하기만 한 닭들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하루 이틀 안으로 폐사처리가 될 닭들이었다.

아니,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닭들이 이틀 뒤까지 살아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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